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협회장은 (2)
노트북 모니터 속의 석시명이 말했다. 생방송은 아니다. 녹화분이다. 차분한 목소리에는 과하지 않을 정도의 비통이 어려 있었다. 귀에 부드럽게 스며들다 못해 가슴까지 파고드는 목소리다. 음향시설에 돈깨나 썼겠는걸.
구김 하나 없는 정장에 쓸 필요 없는 얇은 테의 안경까지. 원래도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상이었지만 신경 쓴 코디와 헤어스타일이 더해지자 더더욱 목소리의 설득력이 높아졌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주장해도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버릴 것만 같다.
‘저 사기꾼, 진짜.’
내가 납치된 사이 적당히 밑밥 깔아 달라 부탁은 했다만, 너무 과한 거 아니냐고.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주요 기사들과 그에 대한 반응 요약본 등이었다. 주가 지수 떨어진 것 좀 봐라. 옵션 거래 했으면… 일부러 납치당한 거니 사기인가.
‘아무튼 저 아저씨, 여론에 불길을 당기다 못해 활활 타오르게 만드셨네.’
방법은 간단했다.
우선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차분하고도 정중하게 실드질 하는 협회 상대로 제 감정 조절 못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협회가 잘못한 거 맞고 해연이 화낼 만했지만 석시명의 도를 살짝 넘어서는 태도에 그를 탓하는 어그로 기사가 쏟아졌다.
여론이 석시명 말이 너무 심했다, 협회도 할 만큼 했다, 로 기울어진 바로 그때. 대국민 사과 연설이 등장했다.
자신의 태도가 과하였다는 백 점 만점짜리 모범적인 사과와 함께 협회를 향해, 사실상은 국민을 향해 호소하는 협회의 문제점과 해연의 슬픔과 납치 사건으로 인한 안타까움과 크나큰 국가적 손실.
그리고 다시 언론이 파드닥거렸다. 종전과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멀끔한 얼굴과 쓸데없이 좋은 목소리가 언론과 합세해 국민에게 심어 준 것은 다름 아닌 죄책감이었다. 저 사람이 좀 과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고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는데, 근데 잠깐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같이 욕해 버렸다.
원래는 남의 일이었다. 국가적 손실이니 해도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니까. 하지만 죄책감이 들어 버렸다면 강 건너 불구경에서 벗어나 양심의 찜찜함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한마디 더 거들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인 것이다. 그에 더해 휩쓸리지 않은 사람들은 도덕적 우위에 서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안 그래도 불쌍한 피해자인데 못 할 짓을 해 버렸네. 이게 다 협회 때문이다. 원흉인 협회를 조지자, 로 이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언론에 압력도 좀 들어갔겠지.’
저 정도로 술술 일을 진행한 걸 보면 말이다. 해연만으로는 힘들었을 테고, 세성 쪽에서도 협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유진 불쌍해. 우리가 지켜 줬어야 했는데. 나라가 보호해 줘야 할 귀한 헌터를 팔아먹게 내버려 두다니. 이제라도 지켜 주자! 로도 이어져 버리고 말았다, 망할.
동네에서 광고 전단지 좀 돌려주세요, 했더니 공중파에 고퀄리티 CF 흩날리는 짓을 하다니. 심지어 유명 연예인이 아닌 내가 메인이다. 앞으로 어떻게 얼굴 들고 다니라고.
‘…그래도 이왕 판 깔아 준 거 버리기는 아깝고.’
써먹긴 해야지. 무릎 위의 피스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려 한쪽에 마련된 와인 바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 놓인 노트북과 종이 뭉치에는 내 것보다 훨씬 살벌한 내용이 들어 있을 터였다. 호텔 수거물에 대한 것이라거나 같은.
“성현제 씨.”
내 시선 뻔히 눈치채고 있었을 거면서 몰랐던 척 이쪽을 돌아본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도련님이 접근은커녕 말도 섞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서 대답해 줄 수 없다네.”
유현이는 다른 애들과 함께 야시장엘 갔다. 내가 피곤하니 빠지겠다고 하자 자기도 가지 않으려 들었지만 제일 어른이 애들 좀 돌보라며 억지로 내보냈다. 속마음은 애들끼리 놀았으면 좋겠다, 였지만.
너무 빨리 돌아올까 봐 시간도 정해 주었다. 넷이서 잘 놀다 왔으면.
“시답잖은 소리 마시고요.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한유진 군이 동생 날뛰는 걸 못 봐서 그래. 화상 자국도 아직 이렇게나 남아 있잖나.”
“그놈의 화상 평생 우려먹을 겁니까? 됐고요, 송태원 씨 말입니다.”
“쉽지 않을 텐데.”
성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 한 병과 잔 두 개를 들고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취기 오를 일은 없지만 주는 대로 받아 들었다.
“어긋나 있기론 둘째가라기에 서러울 남자라.”
“성현제 씨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주위를 비트는 것과 자기 자신을 비트는 것은 전혀 다르지.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를 속이지는 않아.”
그것 참 부러운 소리구만. 나는 나한테 거짓말 많이 하고 살았는데. 돌연 독 저항을 꺼버리고 싶어졌다. 여기서 취하면 절대 안 되지만.
“제가 궁금한 건 친애하는 송 실장님께서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는가, 입니다. 전에 보니 시비 참 많이 걸어 보신 가락이 보이시던데.”
“여러 번 건드리긴 했지.”
“어디까지 해 보셨는데요?”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비는 정도?”
…미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이없어하며 쳐다보자 1인용 소파에 느긋이 기대 있던 미친놈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뭘 한 겁니까.”
“컨디션 난조로 인한 휴가.”
“…S급 던전 터져 나가기 직전이고요? 다른 S급 헌터들은 공략 들어갔을 테고, 송태원 씨도 자리를 비울 수 없었겠지요. S급 던전이 두 개 동시에 아슬아슬한 상태였습니까.”
“협회가 과욕을 부리고 있었다, 까지 추가하면 정확하다네.”
헌터협회가 감당 불가능한 수와 등급의 던전을 손아귀에 억지로 쥐고 있다가 일 터졌던 모양이로군. 송태원은 협회와 성현제의 힘겨루기에 등 터진 꼴이었을 테고.
“그럼 협회장을 무릎 꿇리든가요. 왜 애꿎은 사람에게 행팹니까.”
“무고한 피해자는 아니지. 협회가 목 뻣뻣이 세울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이 송 실장 아니던가.”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송태원의 잘못이기는 했다.
스스로가 지닌 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의지 없는 무기 노릇을 하고 있다. 공직자라는 언제든지 끊어 버릴 수 있는 얄팍한 실에 휘감긴 채. 덕분에 방해받는 입장으로선 시발, 끊으라고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거고.
“그래도 성의를 보아 피곤한 몸 이끌고 나서 주기는 했다네. 원래라면 끝까지 구경만 할 생각이었지.”
“민간인 피해 좀 생각해 주시죠.”
“관리 못 할 던전의 권리를 세성에 넘긴다는 쉽고 빠른 방법을 두고서 국민의 안전을 인질로 잡은 건 내가 아니었네만.”
“주도권 싸움이 팽팽했던 모양이로군요.”
“당시 내가 너무 봐준 게 아닌가 싶기도 해.”
언제쯤 일이었을까. 2년 차 초까지는 S급 던전의 수가 몇 없었으니 일 년에서 일 년 반쯤 전? 상급 던전이 갑자기 늘어난 시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귀다툼 속에서 유현이도 고생 많았겠지. 가뜩이나 나이도 어린데.
“도련님도 이리저리 꽤 치이던 시기였지.”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성현제가 말했다.
“어린애 상대로 어른들이 양심도 없었군요. 하긴 지금도 없죠.”
더 자세히 듣고 더 깊이 생각했다간 2층 테라스로 올라가 수영장으로 뛰어내려 버릴 테니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아니면 와인이라도 머리에 끼얹을까.
“동굴에 처박혀 있는 거 멱살 잡고 끌어내다가 싫은 자리에 앉히고 협박해 대면, 저 죽이려 들까요?”
“한유진 군이 스탯 F급에 공격 스킬이 없는 이상, 무슨 짓을 해도 목숨까지 노리지는 않을 거야. 반대로 한유진 군을 보호하려 드는 어이없는 꼴은 볼 수 있겠지.”
정말 그럴듯한 소리다. 내가 철천지원수쯤 되더라도 일반인과 다름없는 이상 지켜 주는 건가. 정상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달가운 미친 성격이다.
머릿속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며 와인 잔을 비웠다.
현재 내 실종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은 송태원에게 몰려 있다. 납치되던 날 내게 말했던 것처럼 자처해서 희생양이 되겠다 했겠지. 협회야 얼씨구 잘됐구나 하고 사양도 없이 덥석 받아들였을 테고. 그렇게 해서 협회를 보호할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죄송하지만 송태원 씨, 전 당신 목보다 협회 목을 베고 싶거든요.
동영상은 멈춘 지 오래고 침묵 속에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 작게 흘러나왔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펜 끝으로 종이 위에 툭툭 점을 남기다가 입을 열었다.
“바바르 때 제가 기절한 뒤에도 스킬 공유가 되고 있었던 모양이던데요.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가볍게 던진 물음에 성현제가 미소 지었다.
“이런, 역시 도련님이 눈치챘었나 보군.”
긍정이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가슴 안쪽이 약간 서늘해졌다.
“사과라도 할까.”
“필요 없습니다. 제가 바보짓 한 거죠.”
“한유진 군의 믿음을 깨뜨린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겠네.”
“믿은 적 없습니다.”
내 안이함에 대해 실망한 거지.
“이참에 확실하게 말해 두죠. 애들은 손대지 마십시오. 적정선을 지켜 주세요. 그 선의 위치는 저보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도련님은 성인 아니던가.”
“유현이가 저보다 어린 이상은 안 됩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5년은 더 지나야 한다. 아니지, 지금 당장 죽는다 치면 고작 스물다섯 살이잖아. 역시 서른은 넘어야지.
“그럼 한유진 군의 선은 어디쯤일까.”
“어른들끼리는 그때그때 적당히 조절하도록 하죠.”
“물떼새 같군.”
그건 또 뭐야. 아무튼 허튼짓하면 눈앞에 둔 아이템을 잃게 될 것이라 경고해 두었다. 마음 같아선 깔끔하게 죽여 버리겠다 협박질 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보은에 대한 건 낌새도 눈치채게 해선 안 되었다.
저 인간이 내게 관대히 구는 건 어디까지나 스탯 F이기 때문이니까. 자신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런 위험 요소를 과연 그냥 내버려 둘까.
적어도 지금처럼 적당히 느슨하게 묶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힘들어질 것이다.
“송태원 씨 개인번호 등록되어 있죠? 폰 좀 빌려주세요.”
내 휴대폰은 물론이요 받아 둔 명함도 없어서. 지금 한국은 몇 시지. 한 시간쯤 차이 나던가. 성현제가 휴대폰 잠금을 풀어 내게 건네주었다. 연락처 목록을 내리는데 특이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소유격 붙이지 마십시오, 좀.”
“그렇다고 멋대로 수정하다니. 너무하는군.”
“정 붙이고 싶거든 그만한 대가를 치르시라니까요.”
스킬 다 내놓는 수준 아니면 안 받을 거지만. 송태원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중하면서도 선을 긋는 딱딱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성현제의 번호라 그런가, 무슨 일이시냐고 묻는 어조에 벌써부터 피로가 스며 있다.
“안녕하세요, 송 실장님. 그간 고초가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한유진 씨.]“죄송하지만 저는 한유진이 아닙니다. 이름 없는 협박범이지요.”
당황한 듯, 침묵이 대답했다. 벌써부터 미안해지지만 어쩌겠어. 나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를 협박했다.
* * *
나와 함께 공항에 들어선 것은 유현이와 강소영뿐이었다. 유현이는 나를 구하러 홍콩까지 온 것으로, 강소영은 세성 길드의 협조자로 되어 있었다. 예림이와 노아는 출국 기록조차 없었던 탓에 피스와 삐약이를 데리고 조용히 빠져나갔다. 둘 다 비행 가능하고 순간이동과 은신이 있어서 쉽게 탈출했다.
“나 좀 피로해 보이냐?”
일부러 밤 꼬박 새웠는데. 비행하는 내내 졸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힘들었다.
“응. 안색이 별로야. 입술도 말랐고.”
“보이는 곳에 멍이라도 하나 달고 싶은데.”
상급 헌터 둘씩이나 달고 포션 안 쓰는 건 너무 속이 드러나는 꼴이지. 멍 좀 든 거에 포션 붓는 씀씀이는 아니다만.
한숨 한 번 삼키고 공포 저항을 껐다. 슬금슬금 긴장감이 올라오는 게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인간 경매장에서 구출된 지 얼마 안 된 피해자.
“유현아, 좀 더 붙어. 난 아직 겁먹었고 너도 아직 좀 예민해 보이는 편이 좋겠지. 그렇다고 주위 사람 괜히 겁주진 말고.”
적당하게, 적당하게.
해연과 세성에서 나온 헌터들이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친 가운데,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장날 시장통처럼 인파가 드글드글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진짜 한 달은 집에 처박혀 있든가 해야지. 한동안은 소란스럽겠지만 얌전히 지내면 금방 잊힐 거다.
“한유진 씨! 납치범들의 얼굴은 기억하고 계십니까?”
“각성자 경매장에서 구출되었다 들었는데요, 좀 더 자세한—”
“홍콩에 나타난 크라켄과 연관이 있습니까? 수몰된 호텔에서 경매가 열렸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어디서 새어 나간 정보냐. 경매 참가자들 윗대가리들이야 멀쩡히 남아 있으니 그쪽에서 말이 나왔으려나. 지친 표정으로 카메라를 피하듯 고개 돌리며 유현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각오하고 나선 거지만 갈수록 기분이 좋질 않다. 그때 송태원이 등장했다. 협회 관련인들 몇과 함께, 기자들이 알아서 피해 주는 길을 따라 저만치 앞에 멈추어 선다. 그를 향해서도 질문이 쏟아졌지만, 일자로 꾹 다물린 입술은 열릴 줄을 몰랐다.
‘내키지 않는 표정이시구만.’
공항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협회에 대해 무슨 악평을 할지 모른다고 압력을 넣으면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핫한 피해자 혓바닥은 누구든 찔러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날카로운 칼이니까.
“송태원 실장님.”
그를 향한 비난이 대부분인 시선 속에서, 미소를 머금었다.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송태원을 향해 다가갔다. 위압감이 양어깨를 눌러 왔지만, 이 정도는 버틸 만했다.
우리의 대화에 귀 기울이기 위해 떠들썩하던 주위의 소리가 줄어든다. 송태원의 눈매가 미미하게 비틀어지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