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81
579화 재료 손질 (1)
대형 스크린이 어둡게 물들며 아래쪽 중앙에 환한 빛이 모였다. 사각형으로 커지며 문 모양이 되더니 스크린의 일부가 그 모양 그대로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쪽으로 채터박스가 두어 걸음 걸어갔다. 나를 향해 상체를 틀며 손을 내밀어온다.
“그리고 당신을 위해, 제안을 한 가지 하지요.”
하얗게 빛이 모이는 연출로 열린 문이었지만 그 너머는 새카맣게 어두웠다. 어떤 제안을 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없으니까. 유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이 언뜻 보였다.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관중이 남아 있다. 방송도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악당 취급받으면서 쫓겨나는 것도 의외로 괜찮을지 모르겠다만.’
거리낄 거 없어서 자유롭긴 하겠지. 그래도 난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까지 욕먹는 건 싫단 말이야. 유현이는 신경 안 쓰겠지만. 결국 내가 싫은 거지.
채터박스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가 앞장서서 문 너머로 들어섰다. 무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몇 개 내려가지도 않아, 발끝을 더듬거릴 정도로 어두워졌다. 뒤쪽의 문까지 닫히자 바로 앞의 채터박스조차 흐릿하게 윤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채터박스가 손을 들어 올려 검지와 엄지를 딱, 맞부딪쳤다.
화라락-
벽을 따라 불이 점점이 맺힌다. 하얀색으로 일렁이는 작은 불꽃들이었다.
“이런 식의 공간은, 이쪽 세계에서는.”
텅, 텅, 텅.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북을 두드리듯 둔중하게 울린다.
“무덤 속인 경우가 많더군요.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그래서 어쩌라고. 별로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계단을 내려서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행이 얼마 가지 않아 문이 나타나고, 문 너머는 평범한 대기실 같은 곳이었다. 막혔던 숨이 탁 트이는 듯했다.
“차라도 드릴까요?”
채터박스가 기다란 팔을 뻗어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큰 키에 길쭉길쭉한 팔다리가 학처럼 우아하게도 느껴졌지만 동시에 벌레를 마주친 것처럼 징그럽기도 했다. 움직임은 분명 하나하나 고상했지만 피부 위를 기다랗고 가는 수많은 다리들이 기어가는, 그런 감각이었다.
…내가 가진 채터박스에 대한 편견 때문일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저 잘나디잘난 셀럽 정도로 느낄지도. 아니, 분명 그렇겠지.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 보지 않아도 지금쯤 여기저기서 난리 났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 말 하지 않자 차가 따라졌다. 물을 끓이지도 않고서 찻잔 위로 김이 솟아오른다. 채터박스가 나를 향해 네모나게 포장된 티백을 들어 보였다. 어이가 없어졌다.
“별의별 점잖은 척, 고급스러운 척은 다 해놓고 티백?”
“우리가 마시는 차는 당신에게는 잘 맞지 않을 것이라서, 랍니다.”
우리? 순간 의아해했다가, 그 우리에 속하는 채터박스 외의 다른 한 명이 무해의 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채터박스가 포장지를 뜯고 티백을 가볍게 잡아 내 찻잔에 담갔다. 꼬리표가 달린 줄이 찻잔 밖으로 늘어뜨려지고 투명하던 물이 붉게 물들어갔다.
“잘나신 세성 길드장님께서도 차를 직접 우려서 내오셨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의자에 걸터앉아 차를 들어 올렸다. 향은 꽤 괜찮았다. 맛도 뭐 먹을 만은 했다. 하지만 다과도 내오지 않았다. 채터박스가 구운 건 입에 대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제안이 뭡니까. 관중들 다 사라지면 카메라 부수고 난입할 사람들 여럿이니 빨리 말씀하시죠.”
아무리 내 안전을 보장해 준다 했어도 얼마나 오래 버티겠어. 채터박스의 입술 양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마지막 게임을 지시하는 대로 따라 준다면.”
“내 소중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시시해라.”
태연한 척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따라 속이 뜨끈해졌다.
“그쪽 말대로 저는 저 별로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목숨 내놓을 생각까진 없어.”
어쨌든 나는, 살고 싶었다. 스스로를 아끼진 못한다고 해도 날 좋아해 주고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정확히 뭘 원하는지 궁금하긴 하니, 좀 더 들어는 보죠.”
너만 포기하면 돼, 는. 너무나도 쉽고 달콤한 말이라서.
“당신이 목숨을 잃는 것은 나로서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오히려 조금의 흠도 내고 싶지 않답니다.”
“그래, 다시 구하기 힘든 소중한 유품일 테니까.”
“지금까지는 아주 잘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녀가 되기에는 부족하지요.”
“실례지만 저는 신체건강, 까진 아니고 그래도 대체로 건강하고 군대도 다녀온 대한민국 남성이랍니다. 벗어 볼까 미친놈아.”
채터박스 놈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했다. 어차피 성별 따윈 저 미친놈에겐 중요한 게 아니겠지만. 석상 깎을 때 이 바위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잖아. 그저 재료일 뿐이다.
“완벽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적어도 이 파티에서는 가장 강하고 빛나는 존재가 되어 주길 바랍니다.”
“세성 길드장이라고 추천해 드립니다.”
그 인간 건드렸다간 초승달과 머리채 잡고 싸워야겠지만. 둘이 싸우다 동귀어진이라도 하면 참 좋겠네.
“성 자 현 자 제 자이신 분이 갈고닦지 않아도 알아서 강하고 번쩍번쩍 빛도 잘 내거든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인데 다리 좀 놓아 드릴까요.”
“그러나 당신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종합 성적 1위라고 그쪽이 직접 말했습니다만. 한 시간쯤 지났나.”
“스탯이 F인 만큼 약간의 보조 정도는 시청자들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겁니다. 1위 혜택이라고 할 예정입니다.”
“알고 보니 내가 투명인간?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물론 당신의 역량 또한 중요하겠지요.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내기입니다.”
채터박스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서 계약서가 도르륵, 펼쳐졌다.
“최선을 다해 당신을, 시청자가 불공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보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일정 이상의 성과를 낼 때마다 당신의 소중한 이들을 나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내게 덤벼오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손댈 일은 없을 겁니다. 처음에는 당신 앞에서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채터박스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생겼으니까요. 만약 완벽하게 가장 위에 서게 된다면, 숫자의 제한 없이 소중한 이들 모두를.”
“…….”
솔직히, 내게 손해 되는 계약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어떤 게임이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계약이 없다 하더라도 서너 명 정도는 채터박스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 정도의 성적을 내겠지. 그러니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그렇게 억지로 떠받들게 된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박제?”
“잘 보관해 둘 테니 걱정 마십시오. 그 일은 파티가 끝난 직후부터, 입니다.”
그 전까지는 계약으로 보호하고 있으니. 채터박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나라는 재료를 다듬는 중이다. 손바닥을 허벅지에 조금 문질렀다. 오늘 무대에서 느낀 불쾌감이 또다시 가슴을 두드렸다.
오늘 나는 사람들을 구했다.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다. 채터박스가 이끌고 만들어 낸 모습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지막 게임 역시 완전한 내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이제 겨우 한유진이, 그래도 조금쯤은…….
“계약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당신에게는 패널티가 없습니다.”
유혹적인 목소리였다.
“성적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 계약이니까요. 내 도움을 받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저 그뿐입니다. 나는 비교적 만족스럽지 못한 유산을 얻게 되겠지만요.”
일단 서명하고, 관둬도 된다. 테이블에 놓인 찻잔 옆에 펜이 나타났다.
“…내게 너무 유리해. 이런 식의 계약에는 반드시 함정이 붙어 있던데.”
“이번 계약은 어디까지나 나의 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사랑스러운 안개를 위해.”
펜을 들었다.
“채터박스를 위해서, 겠지.”
지금 이 광경 어디에 추모가 깃들었으며 애도가 흐르고 있을까. 그저 눈앞의, 초월자의 욕심일 뿐이다. 그리고 나도,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내 욕심이겠지. 펜 끝이 머뭇 허공을 배회했다. 계약 자체는 득이면 득이지 해가 될 내용이 없었다. 몇 번이나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서명하면 되는 건데.
삑-!
그때 채터박스의 허리춤에서 알람이 울렸다. 채터박스가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응?
[지금─]직원의 목소리 사이로.
[수리비 청구는 세성으로 해!]문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휴대폰을 켰다. 개인방송 중에 현장을 촬영 중인 것이 있었다.
└ 현아언니 대박!!!!!! 사랑해요!!!!!!!!!!!
└ 아 그냥 계속남아서 구경하고싶다
└ s급들 저만큼 모아놨는데 안싸우는게 기적이지LOL
다행히 싸움으로 인해 이미지 나빠질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럼 혹시.
‘일부러 싸우는 건가?’
나를 되찾겠답시고 무대를 부수는 건 안 된다. 하지만 S급들끼리 싸우다가 실수로 부수는 건 괜찮다. 인명피해 내지 않고 보상도 해준다면 문제 될 거 없었다. 오히려 구경꾼들은 신나하겠지.
[한유현 헌터도 필립 마스 헌터가 험담을 했다며, 윽!]쾅! 여기까지 폭음이 들리며 천장이 살짝 흔들렸다. 채터박스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몇 명을 제외하곤 이동에 동의하지 않는군요. 오늘 일정은 끝난 셈이기도 하고.”
쿠르릉, 또다시 어딘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울렸다. 피스가 있으니 나를 찾는 건 금방일 것이다. 어쩔 거냐는 듯이, 채터박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머뭇거리다가 계약서와 펜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 직후.
콰앙!
벽을 산산이 부수며 거대한 창이 튀어나왔다. 번뜩이는 빛이 튀며 창끝에 검은 인영이 사뿐히 내려선다. 짧은 망토가 가볍게 펄럭였다.
“안녕, 한 소장님.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수리비는 저쪽이 낸답니다~”
문현아가 소개하듯 손짓하고 성현제가 창 위에 선 채 우리를 향해 팔을 가슴께로 올리며 인사해 보였다. 이어 반대편 벽이.
서걱!
커다랗게 잘려 나갔다. 휘리릭, 공기를 휘감는 소리와 함께 검은 연검이 주인에게로 돌아가 사라졌다.
– 끼앙!
몸집을 줄인 피스가 내게로 뛰어와 발치를 맴돌았다. 유현이가 내 앞으로 다가와 미안해하는 척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참으려고 했는데, 계속 시비를 걸었어.”
“그래, 잘했다.”
정말로 욕했는지 안 했는지 모를 헌터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저씨~ 전 그냥 구경 왔어요!”
예림이가 훌쩍 순간이동 하며 채터박스와 나 사이를 가르듯 파고들었다. 송태원의 모습도 보였다. 사고가 커지지 않나 감시하기 위해서 왔다는 분위기였지만, 그가 지금 이 난리의 목적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막지 않은 것이겠지.
“뭐, 모인 S급들이 몇인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안 그렇습니까, 채터박스 씨.”
웃으며 하는 내 말에 채터박스가 역시나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한유진 헌터 주위의 S급 헌터들은, 무척 사이가 좋군요. 한유진 헌터가 있는 덕분이겠지요.”
보상 청구는 하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돌아들 가시라며, 채터박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아무도 이동을 거부하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고 성현제가 창에서 내려섰다.
“진짜 제대로 한번 붙어 볼래?”
문현아의 말에 성현제가 어깨만 으쓱했다. 예림이가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내게 바싹 달라붙었다.
“유령 놈이 무슨 짓 했어요?”
“차만 마셨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라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멋쩍어 하며 다시 대답했다.
“마지막 게임에서 날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완벽하게 이길 수 있도록.”
“진짜 그것뿐이에요? 아저씨한테 좋은 일처럼 느껴지는데.”
“방심하면 안 돼, 형.”
“걱정 마. 대답은 안 했어.”
아직은.
그리고 그날 밤에, 잠들기 전에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들 나를 도와주러 와주어서, 그래서 더욱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다. 채터박스가 나타나서 내게 게임 내용과 아이템 몇 가지를 빌려주었다. 꼭 돌려줘야 하나.
새벽녘에는.
“유진 씨.”
금빛 용이 찾아왔다. 그가 건네준 파일을 받아 확인하고 휴대폰에도 따로 저장해 두었다.
“…편지가 있긴 한데요.”
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무척 더러운 물건 대하듯 손가락 끝으로 편지를 잡아 내밀었다.
“그 중국인이, 보낸 거예요.”
“아.”
“한글로 번역했대요.”
얼씨구. 정성을 봐서 편지를 펼쳐 보았다. 자칭 사랑을 듬뿍 담은 응원 메시지였다. 노아가 편지를 독으로 깔끔하게 녹여 주었다. 못 볼 걸 봐버렸어.
* * *
“이것 봐요, 아저씨. 완전 영웅 취급이에요!”
예림이가 잡지를 힘차게 펄럭거렸다. 헌터를 반대하는 무리의 습격으로부터 오만 여명의 사람들을 구한 F급. 채터박스가 돈이라도 먹였는지 사방에서 찬양 일색이었다.
“으, 응.”
혹시 날 쪽팔려서 죽게 만들 생각인 걸까. 저건 진짜 내가 한 일이 아니다 보니 더더욱 심란했다.
“채터박스 이야기도 더럽게 많지만요.”
잡지를 넘기며 예림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얼굴 공개된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유현이가 더 잘생겼지.”
“그런 건 아니고요! 아니, 솔직히 뭐.”
예림이가 내 옆에 딱 붙어 있는 유현이를 힐끔힐끔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채터박스보다는 낫긴 하지만. 제 의견 쏙 빼고! 지극히 객관적으로요. 전 한유현 얼굴 별로 안 좋아해요.”
처음 만났을 때 잘생겼댔으면서. 입 밖으로 꺼냈다간 분명 토라질 테니 그저 웃기만 했다.
“미국의 영웅!”
문현아가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다른 헌터들도 그만들 쳐다봐. 뭔 구경났냐.
잠시 뒤 채터박스가 단상에 올라섰다.
“참석자 여러분, 아쉽게도 오늘이 파티의 마지막 일정입니다.”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들 보상이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얼른 끝내고 보상 받아내고 싶겠지.
“그럼 한유진 헌터.”
채터박스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올라갔다.
“종합 성적 1위인 한유진 헌터가 마지막 일정의 주인공이자, 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