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75
673화 달의 세계 (3)
“초승…달.”
할 말이 많았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갖 단어들이 와르르 쏟아져 좁은 목구멍을 꽉 틀어막은 듯했다. 글자의 각진 모서리가 목 안을 찌르는지 따끔따끔거리기까지 하였다.
“역시 나를 아는 시선이로구나.”
초승달이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기억에는 분명히 없지만. 너는 나를 알고 있어. 그렇지 않느냐.”
콜록, 기침하듯 숨을 토했다. 눈치 한번 빠르시네. 내가 너무 티 나게 굴긴 했지만. 아직도 그물에 휘감겨 있는 듯 허둥거리다가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그, 러니까, 분홍머리신 줄은… 몰랐네요.”
– 삐약!
“어, 대충 알고 있기는 한데 이런 모습은 몰랐다고 해야 하나요.”
내가 본 초승달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초승달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휘휘 감듯 건드렸다.
“네가 좋아하는 색이란다.”
“…예?”
“나는 밤을 여는 가장 낮은 달이니. 어두운 숲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달빛은 당신이 바라던 꿈결. 지금은 햇빛 속이라 머리색 정도만 네 눈이 원하는 대로 비칠 뿐이지만.”
“…아니, 저 분홍색 안 좋아하는데요.”
초승달이 두 눈을 살짝 휘었다. 분홍색 머리칼에 드리운 은빛이 점차 짙어지며 물감을 쏟은 듯 번져 나간다. 가닥가닥 흩어지는 마지막 한 오라기까지 전부 금빛 섞인 은색으로 물들었다. 태양 아래 되레 짙어진 달의 빛.
“원래의 내 머리색이지.”
“…….”
“하지만 분홍색도 괜찮을 듯하구나.”
내가 민망해하자 초승달이 웃으며 자신의 머리색을 바꾸었다. 그리곤 머리칼 한줌을 집어 이리저리 살펴본다.
“초록색이나 하늘색 머리를 가진 사람은 본 적 있지만 분홍색은 처음이야. 새로워.”
“…염색이라면 저도 본 적 있습니다만 아무튼 분홍색 안 좋아해요.”
“녹색과 청색 계열은 물에 사는 종족에게 흔하지. 또한 숲에서 초록빛을, 하늘에서 푸른빛을 머금기도 한단다. 그러나 분홍은 어디서든 눈에 띄는 색이니.”
“왜요, 분홍호수도 있고. 플라밍고 사는. 아무튼 분홍색 안 좋아합니다.”
“볼수록 마음에 들어. 그러니 너도 좋아하는 것이겠지.”
“아니 안 좋아한다니까요.”
사람 말 좀 들어 줘. 그래도 쓸데없는 잡담을 나눈 덕분에 복잡하게 날뛰던 머릿속이 좀 가라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음, 초승달 씨.”
대체 왜.
“왜 남의 인생을 멋대로 휘두른 겁니까?”
지금의 초승달은 초월자가 아니다. 성현제와 만나기는커녕 그의 존재조차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그 말이 튀어나왔다. 달이 뜬 밤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금 부드러이 선을 그린다.
“그것은 네가 아는 나인가.”
“…예?”
무슨 헛소리냐고 되물을 줄 알았는데 초승달의 반응은 차분했다. 초승달이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수풀에 발이 스치는 소리가 바스락 들려온다. 흰 손끝이 들어 올려지고 내 뺨에 닿았다. 약간 서늘했다.
“너는 내게 바쳐진 적이 있구나.”
두 번. 하지만 바쳐진 건 아니지. 은색 달을 똑바로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한 번은 제가 낚은 거고 다른 한 번은 그쪽이 멋대로 덮친 겁니다만. 그것도 남의 결혼식장에서 말입니다.”
“결혼식?”
“초승달 씨 예비 신랑과 그 납치범의 결혼식이었죠.”
정리하고 보니 막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순도 백 퍼센트 진실만을 담았다. 초승달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내 말이 이해가 잘 안 가겠지. 사정 모르고 들으면 누구든 그럴 거다.
“그쪽이 공들여 키우는 중인 예비 신랑이 저랑 비즈니스 파트너 사이였거든요. 갑자기 납치당해서 결혼한다기에 축의금이나 줄까 하고 참석했었죠. 쫙 빼입고 다 함께 결혼식장에 들어섰더니 초승달 씨는 저를 덮치고 예비 신부는 결혼을 엎고 저는 예비 신랑을 내쫓아 버리고… 뭐 대충 그랬습니다. 진심으로 충고컨대 그 남자는 아니에요. 얼굴 말곤 볼 게 없어요.”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떠시려나. 초승달이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이었다.
“너는 예비 신랑을 퍽 아끼는 모양이로구나.”
“아낀다기보다는 그래도 아는 사이고 물질적으로는 나름 끈끈한 관계라 강제결혼 당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정도입니다만. 싫다잖아요. 그러니 친절하신 초승달 님, 지금이라도 결혼은 포기하시는 게 어떨까요.”
나 초승달은 성현제와의 관계를 끊어내겠다, 라는 계약 같은 걸 지금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사라진 과거의 한순간이지만 조금쯤은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나.
“내가 왜 어린 신랑을 키우고 있는지는 조금도 짐작 가지 않으나 그런 나에게도 분명한 이유는 있을 것이다. 네 주장만으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란다.”
“당사자가 싫다잖습니까.”
“자세히 설명하여 설득해 보거라.”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근원에게 잡아먹히는 수많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성현제라는 한 인간을 성장시켜 근원을 대체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 한 명의 희생으로 이 세계가 안전해진다.
만약 내가 완전히 무관계한, 아예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네, 라고 말하지 않을까. 알지도 못하는 한 명 때문에 내게 소중한 이들이 위험해져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선량한 인간은 아니라서.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나와 비슷할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싫다는 사람 붙잡는 건 잘못이죠.”
어떻게 잘 속여 넘길 순 없을까. 내 몇 마디만으로도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아 쉽지 않을 듯했다. 힘으로는… 당연히 안 되고. 지금 초승달은 그래도 착해 보이는데 매달려 부탁이라도 해볼까.
“너는 어떠냐.”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데 초승달이 뜬금없이 말했다.
“너 또한 묶여 있지 않는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아이야.”
초승달의 손이 내 눈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눈동자가 희미하게 아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였다.
“은색 눈. 검푸른 달.”
“…제 눈이요?”
“이곳의 종족들은 눈에 얽매인 것이 나타나지.”
무심코 손을 들어 내 눈을 매만졌다. 그런다고 색의 변화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은색 눈이야 초승달의 영향이지만 검푸른 달은 또 뭐지.
“아니, 그믐달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불이로구나.”
당혹감 속에 눈을 확 감았다. 뒤로 물러서려다 무언가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나를 초승달이 붙잡아 주었다.
“불꽃에 휘감긴 채 달빛에 물들어, 나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렇지 않느냐.”
…무슨 하늘의 별자리 보고 점괘 풀이하듯 말을 하고 있다.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초승달은 여전히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종족을 해치려는 이들이 많으니 눈은 한동안 그대로 두마.”
– 삐약!
삐약이가 내 머리 위로 건너왔다. 초승달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멈칫했다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잠깐만요! 성현제 씨를 놓아주겠다고 한 마디라도 해주세요!”
“합당한 이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강제 결혼은 범죕니다!”
“네 말만 듣고 믿을 수는 없단다. 어쩌면 네가 나를, 혹은 예비 신랑을 노리고서 거짓을 고하는 것일지도 모르니.”
“트럭으로 줘도 싫, 그러니까 지금 초승달 씨가 싫다는 건 아니고요. 성현제 씨는 진짜 억지로 붙잡혀 있는 거 맞아요!”
하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성현제한테 초승달과의 결혼을 진심으로 거부합니다, 라는 자필 증명서라도 한 장 받아 놓을걸.
“뭐냐, 사실 성현제 씨는 결혼하면 죽게 되거든요. 그런 운명이에요.”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초승달이 어디로 가는 중이었냐고 물어왔다.
“초승달 씨 찾으러 온 겁니다. 그럼 이건 어때요. 성현제가 초승달과의 결혼을 원치 않을 시 초승달 역시 성현제와의 결혼을 포기하겠다, 라고 쓰는 건요. 이러면 제 말이 거짓이면 아무 소용없는 백지가 되는 거잖습니까. 결혼은 서로 좋아해야-.”
텅! 무언가가 눈앞을 스치며 내 바로 옆의 나무를 두들겼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돌멩이가 뒤늦게 보였다. 돌이 날아온 곳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굵은 나뭇가지 사이에 초록색 머리카락을 땋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나를 향한 검은 눈 안쪽으로 작은 나뭇잎이 스며들어 있다.
“그러면 안 돼.”
초승달이 나직이 말했다. 소년이 뺨을 붉히더니 휙 사라진다.
“내 곁에서 떨어지는 편이 좋을 거란다.”
“…제가 외부인이라서요?”
“아니. 나와 함께 있기 때문이지.”
“각서 한 장만 써주시면 바로 떨어져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 여기 오래 못 있어요.”
신입이나 명우가 언제 날 찾으러 올지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오솔길이 어느새 확 넓어졌다. 바퀴 자국까지 나 있는 길로 들어서고 저 앞에서 성별이 불분명한 사람이 다가왔다. 초승달에게 공손히 머리 숙인 그가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래도 아까 그 애처럼 돌을 던지지는-.
“누구지.”
뒤쪽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보던 얼굴이야.”
길옆에서도 불쑥 덩치 큰 사람이 나타났다. 세 명, 네 명, 다섯 명. 계속해서 늘어간다. 그리고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차가운 시선들이 낯설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초승달에게 바싹 다가붙자 까득, 누군가가 이를 갈았다. 이건, 그래.
‘질투.’
해연이나 세성에서 받아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네가 뭔데 S급 헌터들과 어울리느냐는 시선. 요새는 덜하지만. 근데 지금 난 그냥 초승달과 같이 걷고 있을 뿐인데?
“…저기, 우리는 별 사이 아니라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초승달이 나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따스한 미소가 나를 향하였다.
“나는 네가 사랑스럽단다.”
정말로 심장이 뛰었다. 두 가지 의미로. 고맙긴 한데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될 거 같습니다만. 전신을 찌르는 눈길들이 아플 정도였다. 옛날 생각도 나 속도 욱신거렸다.
“그리고 덤불숲, 너도.”
맨 처음 나타난 자가 언제 사나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초승달과 마주 미소 지었다.
“세이파리와 강물돌, 파란뿔.”
애정 어린 부름에 사람들의 굳어진 얼굴이 풀어졌다. 단순히 말뿐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을 담는 초승달의 눈빛은 분명 사랑스러운 상대를 향하고 있었다. 설사 눈먼 이라 해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따스한 시선이었다.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전부.”
초승달이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금 옮겨갔다. 뒤따르는 내게 또다시 송곳 같은 눈길이 박혀들었다.
“그 삶 자체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저는 일단 초면입니다만.”
“그래. 나와 마주치기까지, 마주친 순간에도 너는 살아가고 있으니. 사랑하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너희들에게 사랑받기 위한 조건은 없다.”
조건 없는 사랑. 달콤한 말이었다. 누군가가, 그것도 남들에 비해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 애정을 쏟아부어 준다. 그 애정이 싫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거부감이나 부담감도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아무 걱정 없는 어린아이처럼 그저 사랑받기만 하면 된다.
주위를 흘끔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말이죠.”
공평한 사랑이 나쁜 건 아니겠지만. 보통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습니다.”
“만족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특별해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지.”
넓어졌던 길이 다시금 좁아졌다. 언덕 위쪽으로 작은 집이 홀로 서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나만을 사랑하고, 내게도 그것을 바라는.”
서쪽 언덕 하늘은 희미하게 붉었다. 우리를 뒤쫓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언덕 아래에서 멈추었다. 나를 찌르는 시선은 여전히 창날 같았다.
“홀로 남으려 한 아이도 있었단다. 나를 변화시킬 수 없기에 주위의 모든 것을 베고 부수어 그 한 몸으로 애정을 받으려 하던.”
문 앞 낮은 계단에 선 초승달이 몸을 돌렸다. 봄볕처럼 따스한 눈빛이었다.
“나라 전체가 붉게 물들기 전에 막아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아이를 사랑했지.”
여전히. 변함없이. 그자는 마지막까지 특별해질 수 없었다. 마치 산에게, 바다에게 덤벼들며 소리치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발버둥 또한 삶의 일부이기에. 미쳐가는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애정에 질식한다면 그런 감각일까.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이를 사랑한다. 여기까지는 바람직하고 평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누구에게나 닿아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있어 자신은 주위 모든 사람과 동등했다. 넘쳐나는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이 계속될 뿐이다.
차라리 미움이라도 받길 원했을까. 결국 변하지 않는 애정 속에 잠겨 말라 죽었을 자의 기분이 쉽게 짐작 가지 않았다. 살육의 대가로는 충분했겠지.
“그래서 이렇게 외딴 곳에 머무는 겁니까.”
“내 곁에 머물던 아이들은 보통 세 가지 결말을 맞이했다. 포기하고 떠나거나 나를 죽이려고 들거나 내 주위를 없애 버리려 하였지. 떠나지 않은 아이들은 모두 미쳐 버렸단다.”
짝사랑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짝사랑이다.
“너는 어떨까.”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지요. 전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밀어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떠날 겁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초승달이 나를 사랑스러워하며 바라보았다. 지금의 그녀는 성현제를 희생시킬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한 명만 특별히 취급하는 일이니까. 혹은 성현제는 초승달에게 있어 최초로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던 것일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계약서 한 장만 써주세요!”
주위의 공간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초승달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밖에서 나를 찾아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계약서부터 꺼내어 초승달 앞에 들이밀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과거사가 어찌 되었든 나와 운 없는 성 모 씨는 현재를 살아가야 하니.
“나 초승달은 성현제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요구하지 않겠다, 라고.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친절하고 착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초승달 님 부탁드립니다! 이왕이면 한유진과 그 주위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 라고도 적어 주시고요.”
“한유진이구나.”
“저 사랑하신다면서요. 네? 서로 해치지 않고 평화롭게 살겠습니다, 하고요. 평화 좋잖습니까. 러브 하면 피스!”
– 삐-약!
내 머리 위에서 삐약이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공간이 다시금 더 크게 흔들렸다. 시간 없어요! 눈앞에서 팔랑이는 계약서에 초승달이 눈꼬리를 살짝 내렸다.
“나는 네 편만을 들 수 없단다. 대신 내게 부탁은 해주마.”
“부탁이요?”
“강제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으면 싶구나. 라고.”
초승달의 손에 펜이 나타났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대신 짧은 글이 쓰였다. 번역 아이템이 있음에도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들어줄 거 같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거 말고는, 약점이나 계약 방법 같은 걸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지금의 초승달은 아직 초월자는 아닌 듯했다. 능력치도 엄청나게 차이 날 테니 약점을 알아내도 별 소용없을 것이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현재의 초승달도 이러면 얼마나 좋아. 친절하고 온화하고 미친 살인마도 죽이지는 않고.
구르릉- 기다렸다는 듯이 공간이 더욱 크게 흔들리며 길게 갈라진다. 초승달과 주위의 풍경이 흐릿하게 지워지며 반짝거리는 촉수가… 갈라진 틈새에서 기어 나왔다. 꽃을 달고 있는 게 신입인 모양이었다. 저걸 잡아야 하나. 끈적거릴 거 같은데.
다가오는 촉수를 한숨 섞어 바라보는 그때.
– 삐약삐!
찰싹! 삐약이가 날개로 촉수를 쳐냈다. 그와 동시에 흐려진 주위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