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90
789화 안개와 바다와 기억 (3)
“내가 고마워서 그러지!”
“추운데 잠깐 들어와서 몸 좀 녹여.”
“이거 맛이라도 한번 보세요. 입에 맞으면 좀 가지고 가시고.”
어느 재래시장의 풍경이 안개를 밀어내며 선명하게 나타났다. 송태원은 연신 사양 중인 자신의 뒷모습에 당황했다. 언뜻 들은 바로는 분명 한유진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무해의 왕과 무언가 하려는 듯했는데, 엉뚱하게도 그의 과거가 비춰지고 있었다.
‘이때가 분명…….’
명절 즈음이었다. 본래 송태원이 맡은 구역은 아니었지만 대리로 순찰을 나갔었다. 북적이는 시장의 후끈한 공기가 서늘한 바람 사이로 퍼져 나가던 그날. 환상임에도 온갖 음식 냄새가 선명히 코끝으로 섞여들었다.
송태원은 짧은 꿈과 같은 풍경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지키고 있는 것은 여전히 같았다. 하나 지금의 그가 몸담을 곳은 폐허였다. 몬스터가 나타나고 일상의 풍경이 짓밟힌 자리에 섰으며 그래야만 마땅했다. 던전의 내부 또한 오랜 과거에 남겨진 파괴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가슴속 깊게 자리 잡은 불안감은 스스로를 홀로 웅크려 가둬 놓을 때 비로소 흐릿해졌다. S급 각성자, 보편적인 인간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를 혐오하면서도 목줄을 차야만 하는 당위성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감 또한 느끼고 있었다.
괴물을 극도로 거부한다. 동시에 괴물이기에 억눌러져야 한다는 것에 안심한다.
다만.
“무슨 일이래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태원은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시장의 반찬가게였다. 명절음식 준비로 바쁜 그곳에 한유진이 서 있었다. 지금보다 더욱 앳된 얼굴로 상인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한 송태원의 뒷모습을 기웃거린다.
[연예인이라도 온 거 같네. 딱 봐도 몸 좋은데 얼굴까지 잘생겼나 보다.]한유진이 말했다. 아니,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보니 한유진의 속마음이 소리가 되어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키도 엄청 크고. 좋겠다.]“유진아! 밀가루 가지고 오라니까!”
“아, 넵!”
한유진이 앞치마에 물기 젖은 손을 문질러 닦으며 가게 옆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창고로 향했다. 환영이 흐려진다. 송태원의 기억이 아닌 한유진의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송태원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겠지.’
같은 나라에 같은 도시다. 서울 인구가 천만이라곤 하지만 송태원도 한유진도 외부 활동이 잦았으니 몇 번쯤 같은 공간에 있었을 법도 했다.
“송태원 실장님은 좋은 분이세요.”
다시금 한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태원이 몸을 돌렸다. 안개 사이로 한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자판기 옆의 의자에 앉아 있다. 옆에 목발이 비스듬히 기대 세워졌다. 각성자 관리실의 구석진 뒤쪽. 송태원은 이내 회귀 전의 한유진의 기억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최소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봐주시지 않습니까.”
그곳에는 회귀 전의 송태원도 서 있었다. 굵은 손가락 끝이 묵묵히 자판기 버튼을 누른다. 김이 옅게 피어오르는 밀크커피가 한유진에게 내밀어졌다.
“제가 사야 하는 건데.”
한유진이 민망해하면서도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저 때문에 괜히 더 고생하셨잖아요.”
“…아닙니다.”
송태원의 눈가가 희미하게 움찔거렸다. 한유진은 그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송태원은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몸짓, 눈빛, 입매, 한유진에게는 감추고 있는 무언가에 미안해하면서도 난감해하는 기색.
‘성현제인가.’
한유진이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송태원 또한 자세히는 모르지만 시간을 되돌리기 전 성현제가 한유진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했었다. 아마도 그가 한유진을 어떠한 사건에 휘말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한유진 씨는 아직 성현제 헌터의 정체를 모르는 듯하군.’
성현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한유진에게 접근했다 하였다. 저 때의 자기 자신이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성현제가 정체를 들키기, 혹은 밝히기 전인 것일 터였다. 어깨를 약간 움츠린 채 커피를 홀짝이는 한유진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 때의 송태원 또한 비슷한 감정인 듯했다.
‘더더욱 평범한 F급이었을 텐데.’
지금의 한유진은 반항할 수단을 갖췄지만 저 때는 아니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다 따끔거려오는 듯했다. S급 헌터와 엮여 버린 보호받지 못하는 무력한 F급.
“그런 표정 지으실 거 없습니다.”
한유진이 작게 웃었다.
“송태원 실장님은 오히려 화내셔야죠.”
“저는, 아닙니다.”
“뭐가 아니에요. 전 또 그럴 텐데.”
키득거리면서 한유진이 고개를 들어 송태원을 올려다보았다.
“또 사고 치고 또 송태원 실장님을 귀찮게 만들 겁니다. F급 주제에 얌전히 제 분수나 지키는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에요. 못돼먹었죠.”
“…목적이 불분명한 낯선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네?”
의아해하는 한유진에게 송태원이 한숨을 삼키며 당부했다.
“이상하리만치 여유롭고 말로 쉽게 타인을 홀리며 무엇이든 다 아는 것처럼 막힘없는 사람을 경계하십시오.”
“…사기꾼이요? 헌터계에 사기꾼이 많긴 하지만 저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닌걸요. 역으로 털어 먹기도 했습니다.”
“가급적 멀리하십시오.”
송태원이 약간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중재를 해드릴 테니 해연 길드의 보호를-.”
“저 혼자 알아서 잘 살고… 잘은 아니어도 아무튼 보호받을 나이는 아닙니다.”
한유진이 눈을 내리떴다. 웃고 있던 얼굴이 단숨에 딱딱해진다. 이를 꽉 깨문 듯 입매가 굳더니 목발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
한유진은 송태원을 지나쳐 걸어갔다. 한 발 한 발 꾹꾹 누르듯이 땅을 디디다가.
“…어?”
송태원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 송태원 실장님이…….”
그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자판기 앞에 송태원이 서 있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역시나 송태원이 서 있었다. 복장은 달랐지만 분명 동일 인물이었다.
“한유진 씨, 그게.”
송태원 또한 당황했다. 환영으로 나타난 한유진이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저는, 그러니까.”
“아… 그, 아……!”
한유진이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송 실장님!”
어느새 목발은 사라지고 없었다. 조금 더 어려진 얼굴로 한유진이 송태원 앞으로 뛰어왔다.
“그러니까 이게 제 기억인데, 헉?”
한유진이 다시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그사이 과거이자 미래의 송태원은 사라지고 없었다.
“…송 실장님과 성현제 씨에 대한 기억은, 분명 지워졌을 텐데.”
악몽 던전의 성현제가 지웠다고 말했었다. 한유진이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된 건진 잘 모르겠지만요, 많이 놀라셨죠? 예림이와 무해의 왕이 잘해 준 거 같아요.”
“…진짜 한유진 씨입니까?”
“물론이죠. 볼 꼬집어 드려요? 그게 대충 예림이 스킬로 제 기억들을 끌어올리는 중인 모양이에요. 이게 다 제 기억이니까 저 맞죠.”
설명하던 한유진이 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상한 기억까지 다 나와 버리면 안 되는데! 별일 없었죠? 각자 관련된 기억만 나올 거라곤 했지만, 제가 송 실장님께 허튼소리 하진 않았지요?”
“예. 없었습니다.”
“다행이다.”
한유진이 눈을 느릿이 깜박였다. 졸린 듯한 표정을 짓더니 그의 모습이 안개와 섞여 사라진다. 송태원은 흐르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현재의 자신이 개입하면 한유진은 기억이 아닌 현재의 그로 돌아온다.
‘회귀 전 기억이 나타나면 간섭하지 않고 지켜봐야 할까.’
강제로 지워진 기억이 스킬이 해제된 후에도 그대로 남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 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한유진에게 알려 줘야 하지 싶었다.
“한유현에게 알렸다고요?!”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송태원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유진과 그 앞에 선 송태원이 보였다. 이번에도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이었다.
“성현제 헌터는 위험합니다. 한유진 헌터가 그의 정체까지 알게 된 이상 이대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가 F급이니까, 그런 겁니까.”
송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현재의 송태원은 거리를 적당히 벌려 안개 사이로 몸을 감추었다.
‘나 역시.’
처음에는 한유진을 S급으로부터 보호하고 떼어 놓으려고 들었었다. 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적으로라도. 같은 송태원이기에 저 때의 송태원 또한 비슷한 행동을 하였다.
“송태원 실장님께서도 결국은 그놈의 등급이군요.”
한유진이 웃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한유현이었다.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송태원에게 짧게 형식적인 목례를 한다. 한유진이 옆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어금니를 사리물며 동생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린다.
“해연은 한유진 헌터를 보호할 의무가 없습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말했다. 한유진은 입을 꽉 다문 채 침묵했다.
“그러나 저와 혈연관계인 이상 세성을 비롯한 대형 길드와 공식적으로 연관되도록 두는 것 또한 불가합니다.”
“…성현제 헌터 역시 아직은 공식적인 연결고리는 만들지 않을 생각인 듯합니다.”
한유현이 한유진을 짧게 바라보았다. 동생을 아예 못 본 체하겠다는 듯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린 한유진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이 일로 세성 길드가 해연에-.”
“그럴 일 없어!”
한유진이 터뜨리듯 소리쳤다.
“성현제 헌터가 헛수작 부리려고 들면 머리 박고 뒈져서라도 막을 테니까 걱정 말고 꺼지시죠, 해연 길드장님!”
한유현이 입을 다물었다. 송태원이 한유진 앞을 반쯤 가리듯 자리를 옮기며 대신 변명해 주듯 말했다.
“성현제 헌터가 길드의 이득을 위해 한유진 헌터를 이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부분은 이미 확실히 해두었습니다. 애초에 그런 방식은 택하지 않을 사람이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한유현이 짧게 말했다.
“한유현 헌터도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세성 길드는 머잖아 해외로 본부를 옮겨갈 예정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그쪽으로는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그래서 강소영 헌터가 길드장 대리를 맡은 것이겠지요.”
“…그 말대로고, 해연에는 아무 관심 없다고 했으니까.”
한유진이 시선을 떨어뜨린 채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너나 해연에 손대지도 않는댔고. 성현제 헌터가 F급에게 굳이 그런 거짓말 할 일도 없고. 아무튼 너한테 폐 끼칠 일은 없을 거다. 됐지?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송태원 실장님.”
고개를 푹 숙인 채 문 쪽으로 향하는 한유진의 팔을 한유현이 강하게 붙잡았다. 그대로 한유진을 끌어당기며 송태원을 바라보았다.
“이거 놔!”
“당분간 각관실의 각성자 보호감호 시설에 두었으면 합니다.”
“한유현!”
발버둥 치던 한유진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느새 안개에서 벗어나 그들 가까이 서 있던 송태원과 눈이 마주치고, 스르르- 한유진을 포함한 기억의 환상이 사라졌다. 송태원의 입에서 길게 숨이 토해졌다.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한유진에게 미안해졌다. 약하다고 해서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 S급 앞에 F급을 무방비하게 두는 것은 여전히 거부감이 컸지만 예전처럼 극단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이제는 들지 않았다. 지켜보고 겪은 일들이 있었기에.
송태원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자연스럽게 손을 뒤덮으며 일렁거린다. 스킬을 사용한다는 감각도 사라지고 보다 능숙하게 약탈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이 힘을 타고난 듯이 익숙해지고 계속해서 커져 나간다면, 그러면.
‘정원사.’
S급들은 인간을 넘어선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연스럽게 태어났다. 송태원은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어지는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형아야.”
그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태원의 등이 덜컥 떨렸다. 안개 사이로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여기서 뭐 하노.”
작은 아이와 조금 더 큰 아이. 송태원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그것은 그의 기억이었다. 한유진이 알 리가 없는 어릴 적의 송태원. 더 큰 아이, 송태원의 동생이 형의 손을 잡았다.
“그거 아나.”
어릴 적의 송태원은 작고 약했다. 오래 못 살 거라는 소리도 들었었다. 반면에 그의 동생, 송태일은 건강했다. 또래보다 덩치도 커 이내 형의 키를 뛰어넘었다. 형제가 걷고 있는 동네는 한적했다. 송태원은 먼 기억 속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조부모의 집이었다. 약한 송태원을 돌보느라 건강한 동생은 자주 조부모에게 맡겨지곤 했다. 조부모의 사투리가 입에 붙어 동네 어른들이 귀여워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형 때문에 밀려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어린애가 원망 한번 하지 않았다.
“내랑 형아랑 이름 같은 거.”
“우리 이름이 왜 같아?”
“옆집 아재가 일이 영어로 원이라켔거든. 원 투 쓰리. 그니까 태일이가 태원이고 태원이가 태일이지.”
신기하지 않으냐며 동생이 웃었다. 송태원은 멍하니 두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송태원은 그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어른들은 충격으로 잊은 거라 말했었다.
형제의 뒷모습을 덮으며 안개가 흐릿하게 퍼져 나간다. 그 사이로 잔뜩 흐려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켜 준다 안 했나.”
송태원은 눈을 감았다.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에 삼켜지기라도 한 듯이. 검은 그림자가 안개와 뒤섞여 일렁인다.
* * *
성현제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철벅이는 바다 위로 물안개가 짙게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