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45
844화 기다릴 이들에게 (1)
“송 실장님에게 굳이 제 기억을 건네줬다는 건 제가 도와주길 바란 거 아닙니까! 제대로 설명을 하십쇼, 제대로!”
뭐든 간에 아는 대로 다 털어놔라. 성현제가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돌려주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전부 주지 못한 건 사과하지.”
“성현제 씨!”
“나머지 분에 대해서는 대가를 지불하겠네. 기억에 가격을 매기기는 힘들겠지만.”
“필요 없습니다!”
내뱉고 나니 조금 아깝긴 했다. 하지만 돈 받고 내 기억을 팔아넘길 생각은 없었다.
“전부 다 제대로 돌려받을 겁니다. 그러니 남의 기억 떼먹을 생각은 하지 마시죠.”
이자 정도는 받을 수도 있겠지만.
“괜히 말 돌리지 마시고요. 이렇게 성현제 씨 흔적까지 남겨 놓고서. 뭔가 생각이 있긴 있을 거 아닙니까.”
“여기서 멈춰도 괜찮아.”
성현제가 말했다. 무슨 개소리냐며 그를 쏘아보았다.
“이제 와서요?”
“한유진 군은 그 누구도 놓지 않으려 하겠지. 알고 있어. 그러니 방법이 있다면 나를 찾아와도 된다네.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나직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오지 않아도 괜찮아. 살아가면서 항상 앞으로 나아갈 수만은 없어. 누구에게나 장벽은 생기고 그것을 넘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지. 물러섬이 나쁜 것만은 아니야. 오히려 현명한 선택일 때도 있다네.”
“…그러나 저는.”
“한유진 군은 멈출 수 없었을 거야. 한유진 군에게 있어 포기한다는 것은 동생을 손에서 놓는다는 소리와 같았을 테니.”
움켜쥔 손을 절대 놓을 수 없었다. 차라리 내 목숨을 내던졌으면 내던졌지, 물러나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한유진 군의 괜찮은 실패가 되어 주겠네.”
“…무슨 소립니까, 그게.”
“실패해도 괜찮아.”
성현제가 가볍게 웃었다.
“책임지지 않아도 돼. 수습할 필요도 없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뒤는 어른에게 맡겨.”
“저는 스물여섯 살이고 서른한 살입니다만.”
“너무 일찍 자라 버린 어른이지. 넘어져도 괜찮은 시기를 빠르게 떠나보낸.”
…내 어린 시절은 까마득했다. 무언가를 책임지는 것이 어른이라면 나는 확실히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
“실패 또한 경험이며 학습이야. 너무 쉽게 포기하는 버릇을 들여서도 안 되겠지만, 필사적으로 붙잡는 버릇 또한 좋은 것은 아니라네. 놓아야 할 것은 놓고, 붙잡아야 할 것은 붙잡고. 보통 실패해도 감싸 줄 손길이 있는 시기에 그것을 배우게 되지.”
“…전 시기가 좀 많이 지난 듯합니다만.”
“나는 한유진 군에게 진심으로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어.”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짓궂은 기 하나 없이 차분한 그의 표정이 어쩐지 조금 멀게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그가 어른이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별짓을 다 해놓고서, 어른인 척하는 겁니까.”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할까.”
약간 먹먹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박살 났다.
“또 무슨 헛소리야!”
“한유진 군이 나를-.”
“아니, 차라리 아빠라고 해라! 창피하지도 않아요?”
얼굴 두꺼운 줄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런 소리가 입에서 술술 나오냐고. 성현제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성한 아들에게 어머니 대접받는 것은 한-.”
“잠깐만요! 으아아악!”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시시오가 헛소리할 땐 분명 회귀 전 성현제가 있지 않았냐! 얼른 송 실장님 앞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듣지 마세요! 성현제가 안타깝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네만.”
…젠장, 상급 헌터들이 입도 가볍지! 그 소문이 진짜 다 퍼진 건가? 정말로? 송 실장님도 아시는 건지 눈치를 살폈지만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제발 영원히 모르셨으면 좋겠다. 애들 귀에도 들어가면 안 되는데.
“어쨌든요! 성현제 씨의 배려는 알겠지만 괜찮다고 해도 제 마음이 편할 거 같습니까? 혼자서 어쩌려고요.”
“버티겠다 하지 않았던가.”
“버티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초승달은 나를 만월로 만들 수 없어. 나는 반항할 준비를 갖추었다네.”
반항할 준비라고? 나와 송 실장님이 동시에 성현제를 쳐다보았다. 뭔가 희망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우선은 시그마. 내게서 떨어져 나간 한 조각 덕분에 초승달은 나를 완벽하게 옭아맬 수 없게 되었지. 그렇다고 내가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승달의 지배력은 조금이나마 약화되었어.”
성현제의 손바닥 위로 마석이 떠올랐다. 물론 진짜는 아닌 기억 속의 환영이다.
“초승달은 내가 정원사의 마석을 흡수한다면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네. 원래라면 그랬겠지. 때문에 나는 이것을 빌미로 초승달을 물러나게끔 만들었어.”
“성현제 씨가 초승달의 공격을 막았, 아니 그럼 안 되잖아요!”
“아니, 괜찮아.”
성현제가 나를 바라보았다. 이어 분홍색 요정용의 환영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한유진 군의 기억과 한결 군의 능력. 이 둘의 도움을 받아 나는 정원사의 마석을 삼키더라도 근원으로 완성되는 것을 미룰 수 있게 되었다네. 스스로를 잃지 않고 쌓인 시간을 느리게나마 소화하는 것이지.”
“…하지만 성현제 헌터. 그 방법은 초승달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에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송 실장님이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냐며 끼어들었다.
“당신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고요.”
“그래. 초승달은 그런 나를 막으려 하겠지. 그러니 버티는 거라네.”
성현제가 두 팔을 벌려보였다.
“초승달의 지배력은 약화되고 나는 강해졌어. 도망치진 못하더라도 반항하며 버틴다면 초승달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깎아내겠지.”
“깎아낸다고요?”
“몇 번쯤 죽이고 죽여서라도. 지금쯤 꽤 엉망이 되지 않았을까.”
남 일처럼 말하는 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그러면요.”
“결국 내가 굴복한다더라도 초승달은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세계로 심어 넣는 일을.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기껏해야 서너 세계 분량 정도일까.”
…초승달에 의해 제압되고 또 다시 자기 자신을 잃은 채로 헤매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성현제는 그런 소리를 태연하게 했다.
“그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거잖아요.”
“초승달이 지우는 것은 내 기억뿐이라네.”
“그러니까… 아.”
설마.
“한유진 군의 기억은 남아 있겠지. 양육자의 힘과 함께.”
그랬다. 내 기억의 일부는 아직 성현제에게 남아 있었다.
“나는 시간과 기회를 얻게 될 거라네. 쌓인 것들을 소화하여 초승달로부터 벗어날 순간을 노릴 수 있게 되겠지.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역시 성현제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대책 없이 괜찮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살아갈 길을 손에 쥐고서 끝까지 맞서기 위해 떠난 것이었다.
“한유진 군이 살아 있는 한 내게 남겨진 기억과 양육자의 힘도 유지되겠지. 그러니 한유진 군, 오래오래 살아. 돌아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제 맘대로 됩니까. 길어봐야 백 년일 거고.”
성현제는 내 기억 중 무엇을 가지고 갔을까. 모든 것을 잊고서 그 혼자 낯선 땅에 떨어져 무엇을 바라보며 걸어가게 되는 걸까. 상상하기 힘들었다. 아득히 먼 감각으로만 느껴졌다.
“한유진 씨가 마지막을 맞이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다면.”
송 실장님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우리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기를 수 있겠지요. 더욱 안정적으로 제 힘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겁니다.”
송 실장님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평소처럼 차분해진, 그러나 전보다 강한 빛을 띤 눈이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내가 다 짊어지려 할 필요 없다고 두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게 될 수도 있겠지. 한유진 군의 환갑잔치에는 참석하도록 노력해 보겠네.”
“…누가 초대한대요? 지금이랑 똑같이 매끈한 낯짝으론 발들일 생각 하지도 마세요. 짜증 나니까.”
진짜 변함없는 얼굴로 불쑥 나타나면 열 받아서 잔치 상 엎어 버리지 않을까. 마치 바로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인사를 건넬 것 같아서, 생각만으로도 혈압이 올랐다. 그래도 반갑겠지.
“다만 초승달이 걱정됩니다.”
송 실장님이 얼굴을 약간 굳히며 말했다.
“한유진 씨가 사라진다면 성현제 헌터가 지닌 기억도 소용이 없어질 테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정원이 아쉬웠지. 한유진 군의 동생과 시그마 때문에라도 처리해야 했지만.”
“초승달이 우리 세계에까지 손을 뻗어 올 것 같습니까.”
“시스템 연결이 끊어졌으니 쉽지는 않겠지만. 어르신도 나서 주신 듯하고.”
성현제와 송 실장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성현제의 일은 성현제에게, 송태원의 일은 송태원에게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다 같이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두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역시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았다. 보기 좋잖아, 즐겁기도 하고.
“그러니 힘내서 기다리고 있으세요, 성현제 씨.”
“한유진 군이 원한다면.”
성현제가 대답했다. 송 실장님도 나를 막아서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한번 더 해봐야지.
“다만 조심하게.”
“걱정 마세요. 그리고 성현제 씨 때문만은 아닙니다.”
뭐, 성현제만 남았다더라도 홀가분하게 두고 갈 수는 없었겠지만. 전하고 싶은 말은 다 전했는지 성현제의 모습이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가 나와 송 실장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주 특별하게 좋아하는 두 사람에게. 즐거웠어.”
미련 하나 없어 보이는 얼굴로 성현제가 사라졌다. 주위의 풍경도 다시 빌딩 아래로 돌아왔다. 내 앞에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있는 송 실장님이 보였다.
“형!”
몸을 일으키는 나에게 유현이가 다가왔다. 송 실장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붙잡는 대신 맑게 가라앉은 검은 눈이 올려다봐왔다.
“잡으세요. 저 그렇게 약하진 않습니다.”
“예.”
송 실장님이 내 손을 잡았다. 힘껏 당겨 일으켜 주었다. 유현이가 나를 살피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형이 오 분 정도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어. 괜찮은 거야?”
“송 실장님이 성현제가 가져갔던 내 기억을 돌려주셨어.”
“다시 기억하시네요! 세성 아저씨 또 잊어버리셔서 놀랐다고요.”
예림이가 다행이라며 세성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거냐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럼 형 기억은 전부 되찾은 거야? 그렇잖아도 걱정되었었는데.”
“조금은 가지고 갔다는데 별 이상 없는 거 보니 거의 돌아온 거 같아. 끊기는 느낌도 안 들고.”
기지개를 쭉 켰다. 달이 사라진 하늘은 맑았다.
“성현제 헌터는 초승달에게 갔습니다.”
송 실장님이 나를 대신해서 여기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정원사는 사라졌고 성현제는 정원사의 마석을 들고 초승달에게 붙잡혀 갔다고. 소영 씨가 고개를 잔뜩 꺾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길드장님 괜찮으실까요? 길드장님 걱정은 별로 한 적 없는데요, 그래도 무사하셨으면 좋겠어요.”
“무사히 돌아오긴, 쉽지 않겠지.”
문현아도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예림이에 박하율, 노아 씨와 리에트까지. 유현이와 피스는 관심 없었지만.
“그럼 이제 세성 아저씨 구하러 가는 거죠?”
예림이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어느새 예림이 머리 위에 자리 잡은 박하율이 잎사귀를 흔들었다.
– 꿈의 세계를 완전히 벗어났어. 구하긴커녕 쫓아가는 것도 힘들걸?
“하지만 잡혀갔는데!”
– 자기 세계를 빠져나가는 건 초월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세성 길드장은 초승달과 계약도 되어 있으니 쉽게 데리고 간 거고. 세계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찾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지. 밖이 얼마나 넓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면서 박하율이 말했다. 예림이가 시무룩해지고 소영 씨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한 소장님, 송 실장님. 혹시요… 저희 길드장님 못 돌아오시는 거예요?”
소영 씨가 나와 송 실장님을 돌아보며 물었다. 송 실장님이 잠깐 머뭇했다가 입을 열었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대비는 해두셔야 할 듯합니다. 우선은 실종 상태로 둘 예정입니다.”
“지, 진짜요?”
“예.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강소영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에요. 길드장님께선 제가 길드장 대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미 준비해 두셨습니다. 다행히 제겐 코메트가 있어서 S급 헌터와 동등한 자격을 얻었어요. 영국 전투 이후 확실하게 인정도 받았고요. 길드장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충분히 세성 길드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더 담담하게 소영 씨가 말했다. 회귀 전 코메트 없이도 세성 길드를 맡아 지탱했던 강소영이다. 그러니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허니. 길드 일은 못 도와줘도 거슬리는 놈 열 명쯤은 공짜로 처리해 줄게~.”
“안 됩니다, 리에트 헌터.”
“공무원 씨 몰래 감쪽같이 없앨 테니 걱정하지 마.”
“더더욱 안 됩니다.”
소영 씨가 고마워요 언니, 하고 웃었다.
“길드장님이 안 돌아오실 리는 없으니까요! 괜찮아요. 미래의 세성 길드장 예행연습 한다고 치죠.”
“그래, 성현제 녀석이야 금방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튀어나오겠지. 그러니 무리는 하지 말고.”
현아 씨가 강소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성현제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불쑥 멀쩡한 얼굴로 나타날 것만 같긴 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돌아오기 힘든 길이다. 그 잘난 세성 길드장님이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데리러 갈 거야.”
시선들이 우르르 나를 향해 쏟아졌다. 그 속에서 웃으며 말했다.
“다만 나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