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109
ⓒ 목마
만남-2
발할라에서는 페페로, 현실에서는 이현지.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화장실 거울을 노려보았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오늘 그녀는 발할라 아이디 ‘라덴’과 현실에서 직접 만남을 갖기로 했다.
“내가 미쳤지.”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현지는 다시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나름 신경을 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꾸미지는 않았다. 괜히 그런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끄러움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평소에 조금 번화하다 싶은 곳은 사람이 미어터지는 날이다. 덕분에 약속 장소를 정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조금 놀만한 곳은 사람이 미어터지느라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 테니까.
‘그럼 제가 그쪽 동네로 갈 게요.’
결국 그런 대화가 되어서, 이현지의 동네에 김현성이 오게 되었다. 내가 미쳤지. 이현지는 뱉었던 중얼거림을 다시 생각하면서 몇 번째인지 모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현실에서 만나자고 한 것일까. 뭘 믿고 무슨 생각으로 이현지는 기껏 잘 만진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었고, 그 즉시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다시 만졌다.
약속한 시간은 오후 3시. 조금 늦은 저녁 시간에 만나는 것보다, 아예 이른 시간에 만나서 점심 겸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래, 밥만 먹자. 이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연락처는 주고받았다. 핸드폰으로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덕분에 이현지는 발할라의 ‘라덴’이 현실에서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게 되었다. 본명은 김현성. 나이는 22살.
‘연상이잖아.’
4살 연상이야. 화장실을 나온 이현지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48분. 앞으로 12분 뒤에는 약속 시간이다. 이현지는 불안과 긴장 속에서 지하철 개찰구 앞의 의자에 앉았다.
게임 속에서 만난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번개니 정모니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설마 직접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잖아.’
알고 지낸지는 몇 개월 정도 되었지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게임 속에서 만난 적도 몇 번 없고.’
대장간에 찾아왔을 때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을 뿐.
‘그러면서 왜 만나자고 한 거야’
만나자는 말도 이현지 쪽에서 먼저 했다. 왜 생각해 보았고, 이현지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린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았고, 거기서 두근거림을 느꼈다. 내가 그런 취향이었나 초조하고 긴장된 탓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꺅!”
이현지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놀란 비명을 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현지는 주머니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라덴(김현성).
이현지는 저장해 두었던 이름을 확인하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그녀는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 옆으로 가져갔다.
[아, 여보세요] “네, 넵.”목소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이현지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긴장하고 싶지 않은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저 지금 도착했거든요. 어디로 가면 돼죠] “그… 개찰구 바로 나오시면 돼요. 1번 출구 쪽으로. 저 회색 코트 입고 있거든요. 얼굴은 게임 속이랑 똑같… 아니, 화장을 하기는 했는데…”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횡설수설 떠들던 이현지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입을 다물었다. 일단 진정하자. 그런 생각을 하고서, 이현지는 표정을 굳혔다.
“개찰구 쪽으로 오세요. 알아 볼 테니까요.”
[아, 네.]
전화가 끊어졌다. 이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개찰구 쪽으로 다가갔다. 긴장할 것 없다. 게임 속에서 몇 번이나 만났었으니까. 발할라의 아바타는 현실의 몸과 똑같다. 커스터마이즈가 가능한 것은 머리의 모양이나 색깔 정도. 기본적인 외형은 바꿀 수 없다. 그러니까, 긴장할 것은 없다. 게임 속에서 몇 번이나 보았던 얼굴을 게임 밖에서 만날 뿐이다.
“…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개찰구 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고서 이현지의 입술이 벌어졌다. 다를 것은 없었다. 이목구비도, 키도, 덩치도, 머리 모양도. 유일하게 다른 것은 옷차림이었다. 12월의 추운 날씨 때문에 남자는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 페페로님”
김현성도 이현지를 알아보았다. 대장간에서의 후줄근한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화장을 했다기에 얼마나 다를까 싶었는데, 그렇게 많이 다르지도 않았다.
“페페로님”
개찰구를 나온 김현성이 이현지에게 말을 걸었다. 긴장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행동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뺨이 뻣뻣하게 굳은 것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게임 속도 아니고. 서로 본명으로 부르는 것이 어때요”
“아, 확실히. 그러면… 어… 이현지님”
“…오빠가 저보다 네 살이나 더 많잖아요.”
먼저 오빠라고 불렀다. 이현지는 땀이 찬 손을 코트 뒷자락으로 넘겨 벅벅 문질렀다.
“그러니까 편하게 불러요. 나도 그냥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요.”
“어, 음… 그래.”
김현성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이현지가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김현성도 조금은 긴장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올해 크리스마스이브는 영락없이 집에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런 약속을 잡게 될 줄이야.
“열여덟 살이면, 고등학교 2학년인가”
“네.”
지하철역을 빠져나왔다. 눈은 오지 않았고, 대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이현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코트 자락을 여몄다.
“…어제 일은 고마웠어요.”
대화거리로 삼을 이야기가 너무 적어. 이현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입을 열었다. 접점이라고 해 봐야 게임 속의 이야기. 그렇다고 같이 사냥을 하거나 하는 사이도 아니라, 게임을 대화거리로 잡아도 나눌 이야기는 많지 않다.
“별로 고마워 할 것은 없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내가 너한테 고마워해야지.”
“일을 했을 뿐이에요.”
이현지는 괜히 시선을 피하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별로 부끄러워 할 얘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힘들었다. 싫다니까. 이현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밥은 뭐, 먹고 싶은 것 있어”
“시간이 애매한데… 어차피 저녁 시간 되면 어지간한 곳은 만석일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가요.”
“그거로 괜찮아”
“이브잖아요. 어쩌면 지금 시간도 만석일 지도 몰라요.”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3시 10분. 런치와 디너에 걸쳐진 애매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애매한 시간 탓인지 대기 시간 없이 바로 자리로 안내 받을 수 있었다.
“지금 시간이면 디너 가격을 받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웨이터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메뉴판을 받았다. 김현성이 메뉴판을 넘기는 동안 이현지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스테이크 두 개와 샐러드 바 2인. 주문이 끝나자마자 이현지는 바로 의자를 뒤로 빼고서 일어섰다. 김현성과 마주 앉는 것은 이현지로 하여금 여러 가지 애로사항을 느끼게끔 만들고 있었다. 얼굴은 자꾸 화끈거렸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샐러드바를 돌아 접시에 음식을 담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이래서야 만나자고 한 의미가 없잖아.’
애초에 의미를 두고 만나자고 한 것이었나 알버트가 옆에서 거들기에 일단 덥썩 물었던 것이 전부인데. 이현지는 샐러드 바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김현성의 자리를 노려 보았다.
‘언제까지고 나 혼자 부끄러워하는 것도 성질에 안 맞아. 그래, 까짓거 뻔뻔하게 나가자고.’
한 번 마음먹으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이현지의 성격이었다. 이현지는 살짝 머리를 끄덕거리면서 김현성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김현성이 자리에 돌아와 앉은 즉시, 이현지가 입을 열었다.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김현성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그의 얼굴을 노려 보았다.
“어 뭘”
“오빠는 여자 친구 있어요”
“…푸핫!”
질문한 즉시 웃음이 튀어나왔다. 이현지는 웃음을 터트린 김현성을 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여자 친구 있었으면 오늘 같은 날에 내가 한가했겠어”
“…아, 음. 그러네요. 여자 친구 있었으면 제가 밥 사달라고 했을 때 거절했겠죠.”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처음부터 수를 잘못 둬버렸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이현지는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접시를 내려 보았다.
“그러는 너는 남자 친구 없어”
“없으니까 오빠보고 밥 사달라고 했죠.”
이현지가 김현성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서 대답했고, 김현성은 그 말을 듣고서 피식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크가 나와 김현성과 이현지의 앞에 놓였다.
“…오빠는 여러 가지로 이미지가 다르네요.”
불쑥 이현지가 말했다. 칼을 들고서 스테이크를 썰던 김현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지 무슨 말이야”
“오빠가 아스가르드에 올린 동영상을 봤어요. 동영상에서는… 음… 조금 무서운 이미지 같던데.”
“무섭다고”
“그렇잖아요.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혼자서 싸우고, 투기장 영상에서도 자비 없이 다른 사람들 때려죽이고. 처음에는 같은 사람인가 의심했다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만나보니 음…”
“왜. 실제로 만나 보니 좀 이상해”
“아뇨. 그냥 착해 보여요.”
“그거 칭찬할 것 없을 때 대충 둘러서 하는 말 아니야”
“나는 오빠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그냥 느끼는 대로 한 말이에요.”
이현지는 한 입 크기로 썰은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요”
“그, 게리안의 둥지에서 만났던 네 친구들. 사이가 안 좋아진 거야”
“네.”
이현지가 머뭇거림없이 대답했다. 이현지의 눈썹이 팍하고 찡그려졌다.
“내가 스승님 대장간에서 아르바이트 시작하고서, 걔들이 찾아와서 날 엄청 귀찮게 굴었거든요. 공짜로 장비 수리해달라고 하고, 강화해 달라고 하고, 뭐 만들어달라고 하고. 처음에는 나도 뭐, 스킬 수련하는 겸 해줬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죠.”
그렇게 말하는 이현지의 목소리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한 달 정도 계속 그러니 내가 열 받아서 작작 하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걔들이 뭐라는지 알아요 친구인데 그것도 못 해주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예요. 그게 뭔 친구야 그냥 호구 부려먹는 거지. 그래서 꺼지라고 했어요. 학교에서도 나한테 와서 지랄하기에 머리채 한 번 잡았죠.”
이렇게. 이현지는 활짝 펼친 손을 보란 듯이 김현성의 앞에 뻗었다.
“그렇게 완전히 쌩깠어요. 나야 뭐 상관없었죠. 내가 걔들 뒤집기 전에 우리 아빠 일 문제로 이사 일정이 잡혀 있었으니까. 어차피 지역 옮기고 전학가면 다시 볼 일 없는 년들인데, 흥. 싸대기라도 한 대 때릴 것을 그랬어.”
이현지가 씨근거리며 말했다. 머리채를 잡아 흔들기는 했지만 그때 쌓였던 분통을 아직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후로도 짜증나는 일의 연속이었죠. 친구 오빠라는 것이 갑자기 찾아와서 들이대고. 싫다고 싫다고 말을 해도 도대체가 듣지를 않아서. 아마 크리스마스 앞두고서 더 발정이 났었나 봐.”
“그 정도로 두들겨 팼으니까 더 오지는 않을 거야.”
“오면요”
“말했잖아. 오면 그때도 나 부르라고. 내가 쫓아내 줄 테니까.”
김현성의 대답에 이현지가 쿡쿡거리며 웃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해준다면 저야 고맙죠. …대신에 나도 오빠한테 여러 가지로 서비스 많이 해 줄게요. 장비 수리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으니까. 제작도 뭐… 스승님만큼은 아니지만. 엘리트 아이템 까지는 만들 수 있어요.”
“그럼 나도 좋지. 아, 공짜로 해줄 필요는 없어.”
“저도 공짜로 해줄 생각은 없어요. 적당히 깎아 주겠다는 거죠, 적당히.”
계산을 끝내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나왔다. 시간은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고, 여전히 눈은 오지 않았다. 이현지는 입에서 나오는 김을 올려 보면서 김현성 쪽을 힐긋 보았다.
“…오빠는 오늘 집에 가면 뭐할거예요”
“게임 해야지.”
즉답이었다. 아무 망설임도 없이 나온 대답에 이현지는 순간 어이가 없어서 입을 반쯤 벌려버렸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뭔 상관이야”
“…내일 크리스마스인데요”
“여자 친구도 없고, 크리스마스라고 다른 친구 만나서 술 마시는 것도 궁상맞잖아. 그러니 집에서 게임이나 하려고. …해야 할 일도 많고.”
“해야 할 일 무슨 일이요”
“레벨 업.”
그 역시 즉답이었다. 그쯤 되니 이현지는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김현성을 보기만 했다. 김현성은 그런 이현지의 시선에 쓰게 웃으면서 뺨을 긁적거렸다.
“너는 어떻게 할래 밥도 먹었고.”
“…집에 가야죠.”
머릿속에 세워두었던 계획이 싸게 식었다. 노래방을 가던가, 카페를 가던가. 거기서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시간을 보내고, 아직 시간도 그리 늦지 않았으니 그럴 계획이었는데.
“…뭐, 밥은 얻어 먹었으니까요. …어차피 지금 어디를 가든 크리스마스이브라 사람이 넘칠 테니까.”
이현지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첫 만남의 수확치고는 나쁘지 않아.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일단은 친한 오빠 동생부터 가자.’
‘생각보다 일찍 끝났으니 집 가서 인던 한 번 가봐야 겠네.’
이현지가 내심 결의를 세우는 동안, 김현성은 발할라 생각을 했다.
발할라 중독이었다.
만남-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