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187
ⓒ 목마
브레이크-3
무릎을 크게 앞으로 낮춘다. 흑월이 휘두른 검은 느리게 보였고, 실제로도 느렸다. 그런 검이 라덴의 몸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라덴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크게 발을 뻗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활짝 펼친 손으로 흑월의 허리를 안으려 들었다. 일단 허리르 잡고, 그대로 뒤로 넘어트려서 마운트 자세로…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안되겠지.’
현실은 가혹한 법이다. 이미지로 완벽한 동선을 그려도, 현실은 잘 되지 않는다. 흑월의 발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그의 몸이 사라졌다. 라덴은 앞으로 몇 걸음 더 움직이고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길 수 없어.’
그것은 라덴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흑월은 강해도 너무 강하다. 검왕까지는 아니어도, 검왕의 검에 근접한 정도는 될 것이다. 라덴은 몸을 돌려 섰다. 흑월은 여전히 검을 쥐고서 라덴을 보고 있었다. 라덴은 그런 흑월을 보고 뿌득 이를 갈았다.
파앗! 라덴의 발이 땅을 걷어 찼다. 그는 단숨에 흑월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손톱을 휘둘렀다. 흑월은 칼을 잡은 손을 아래로 늘어트리고서 라덴이 달려드는 것을 보았다. 흑월의 발이 살짝 움직였고, 라덴의 손톱은 허공을 할퀴었다.
‘빨라…!’
양자택일을 사용하고 있음에도 흑월의 움직임을 쫒을 수 없다. 라덴은 흑월과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연이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흑월은 갈대처럼 몸을 조금씩 휘청거리면서 라덴의 주먹을 모조리 피해냈다.
귓속말이 들렸지만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라덴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고 있던 흑월의 검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파앗! 번개처럼 빠른 찌르기가 쏘아진다. 라덴은 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왼쪽 팔뚝이 살짝 스쳐 피가 튀었다.
‘이런…!’
라덴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가장 먼저 왼 팔의 감각을 확인해 보았다. 은검에게 당했을 때가 떠오른 탓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검, 현철은 백주 시시시네처럼 편리한 저주가 붙어있지는 않거든.”
흑월은 그렇게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냥 엄청나게 단단하고 예리할 뿐이야.”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칼에 베였던 팔의 감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라덴은 피가 흐르는 팔뚝을 움켜 쥐고서 흑월을 노려보았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흑월이 입을 열었다.
“전투 중에 강해지는 네 능력 말이야. 그 외에 조건이 더 있나”
“타격이 성공해야 돼. 당신이 좀 맞아줘야 한다는 말이지.”
“그래 그렇다면 평생 볼 일은 없겠군.”
맞을 일이 없을 테니까. 그 뒷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덴은 꿀꺽 침을 삼키면서 발을 뒤로 끌었다. 유의는 아직 쓰러져 있었고, 라바로크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몸을 떨고 있다. 도시의 NPC들은 불안과 호기심을 섞은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그냥 보내주면 안 될까”
라덴은 흑월을 노려보면서 물었다. 그 질문에 흑월은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당연한 거절이었다.
‘어떻게 하지’
흑월이 아니라 다른, 은검 정도 되는 놈이었다면 어떻게 쓰러트리고 도망칠 방법을 모색해 보겠는데…
‘흑월은 안 돼.’
폭혈의 광란 중첩을 5로 올리면 불가. 광폭을 쓰면 불가. 강신 상태로 베헤모스를 쓰면 그래도 불가. 라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대응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격이 다르다. 라덴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이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유의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유의와의 연결점이 노출된 이상, 유의를 키아미르에 두고 가는 것은 너무나 리스크가 큰일이다.
당장 유의의 안전도 그렇고, 만약 유의를 인질로 삼아 라덴을 끌어내려 한다면, 라덴으로서는 저항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흑성에게…’
라덴이 그런 방법을 떠올린 순간, 차가운 냉기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라덴은 흠칫 놀라 냉기가 발산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흰색과 푸른 색이 조합 된 의복을 입은 새턴이 지팡이를 들고 서있었다. 새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바로 곁에는 굳은 표정을 하고 선 알케나가 있었다.
“네 친구들이 온 모양이군.”
흑월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덴은 지금 상황이 과연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에 대해 잠깐 동안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파티를 부른 것은 바로 라덴이다. 하지만 라덴은 그들에게 성벽을 넘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조우하라고 했을 뿐.
‘그러고 보니 아까 귓속말이 왔었지.’
대답할 겨를이 없어서 무시했는데, 그것에 괜히 걱정해서 구하러 온 모양이었다. 라덴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파티원들을 향해 손을 들어 주었다.
“플레이어에게 죽음이라고 해 봐야 별 볼 일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는 자들과 함께 죽는 것이 덜 외롭겠지”
“누가 누구보고 죽는다고 하는 거야”
새턴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안개가 퍼져 나간다. 새턴의 고유 특성인 ‘얼음 안개.’ 미세한 얼음 결정을 살포하는 것으로, 새턴을 제외한 얼음안개에 노출된 이들에게 미약한 둔화와 장시간 체류 시에 동상을 걸게 한다.
그리고 겨울 전염. 새턴이 펼친 마법이 얼음 마법으로 바뀐다. 그녀의 주변에 자그마한 구체들이 떠올랐다. 매직 미사일에 냉기가 어린다. 흑월은 그런 새턴을 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어도 너희들 전부는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새턴은 매직 미사일을 쏘아냈다. 수십 개의 마법 탄환이 흑월을 향해 쏘아졌다. 흑월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직접 닿은 것도 아니다. 검격이 일으킨 바람이 공중에서 매직 미사일을 폭발시킨다. 그것을 보고서 새턴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흑월은 검을 가볍게 흔들면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이미 주민들의 이목은 충분히 모였다.
그렇다면 더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플레이어 랭킹 1위의 실력은 보았고, 경계할 것은 못 된다. 마음을 먹었다면 이미 몇 번, 몇 십 번은 죽였을 것이다. 기왕이면 확실하게 죽여 더 성장하지 못하게 끊어두고 싶었지만, 상대가 플레이어인 이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확실하게 본보기로 삼아 두는 수밖에. 흑월의 발이 움직였다. 라덴이 대응하기도 전에,
흑월은 새턴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새턴은 눈을 크게 뜨고서 자신의 앞에 서있는 흑월을 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벌렸고, 흑월의 검이 들렸다.
까아앙! 둔탁한 쇳소리가 침묵을 박살낸다. 흑월은 가늘게 뜬 눈으로 옆을 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알케나가 검을 들이 밀고 있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개입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흑월조차도 그녀의 검이 끼어드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지”
흑월이 물었다. 그 말에 알케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씹기만 할뿐, 대답하지 않았다.
알케나의 고유 특성은 각각 특징이 다른 다섯 개의 검을 불러내는 것이다. 지금 알케나가 왼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라곤.’ 라곤으로는 상대에게 데미지를 줄 수 없지만, 라곤을 쥐게 되면 살기에 굉장히 민감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공격이 펼쳐지기도 전에 예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 라곤을 쥐고서 펼칠 수 있는 특수 스킬이 바로 ‘팬듈럼.’ 순간이나마 시간을 느리게 인지할 수 있게 만드는 스킬이다. 기왕이면 오른 손에 쥐고 있는 ‘파라스’로 공격하고 싶었지만, 느려진 시간 중에서도 흑월의 검은 너무나 빨랐다. 간신히 끼어들어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단 말이다.
“내 움직임을 본 눈치는 아니고… 그렇군. 너도 그런 재주… 아니, 스킬이구나.”
흑월이 중얼거리는 중에 새턴은 블링크를 사용해서 뒤로 물러섰다. 스크라이더가 급히 방패를 세우고서 흑월의 앞을 가로 막는다. 로사나도 뒤로 물러서서 시위에 화살을 걸었고, 해로이도 클로를 꺼냈다. 라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흑월의 뒤를 잡고서 자세를 낮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회의적인 생각 뿐이다. 흑월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7명. 모두가 레벨 105가 넘어가는 상위 랭커들이었고, 전력을 따져 보면 지금 당장 보스 레이드가 가능할 정도였지만…
‘그래도 안 돼.’
해보지도 않고 그런 의문이 바로 뒤를 따른다.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흑월이 검을 휘둘렀다. 현철. 단단하고, 예리하고. 그것이 전부인 검이다. 그런 현철은 검강이 실린 것도 아닌데 스크라이더의 방패를 일격에 반으로 갈랐다. 스크라이더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순간 스크라이더가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양 손으로 쥐고 있는 방패의 무게가 줄었다는 것 정도 뿐이었다.
뻗은 발이 거리를 좁힌다. 스크라이더의 앞에 선 흑월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잘린 양 팔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제 서야 스크라이더의 입이 벌어졌다.
그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이었다. 흑월의 몸이 검은 안개로 변하더니 무너져 사라졌다. 흑월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당황으로 굳어 버린 해로이의 앞이었다.
“으…”
소리를 지르려고 했겠지. 아니면 기합이던가. 해로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 클로를 휘둘렀지만, 흑월은 해로이의 클로가 제대로 휘둘러지기도 전에 검을 길게 뻗었다. 푸욱! 흑월의 검이 해로이의 배를 꿰뚫고, 다시 빠져 나왔다.
“이…!”
그런 흑월의 뒤를 라덴이 덮쳤다. 흑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검을 들었다. 촤아악! 호신강기에 덮여 있던 왼 팔이 그대로 잘려 위로 솟구친다. 라덴은 피를 뿜는 자신의 팔을 보면서, 키라이스가 했던 충고를 떠올렸다.
암검의 대주. 흑월을 만나게 되면 무조건 도망치라고. 진작에 도망쳤어야 했다. 라덴은 잘린 팔을 아래로 내리면서 발을 들었다. 그대로 휘두르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검이 움직인다. 잘린 다리가 땅을 뒹군다. 갑자기 균형이 무너졌지만, 라덴은 용케 넘어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왕이면 아끼고 싶었고, 이보다 더 필요한 상황에서 사용하고 싶었다.
‘아니. 지금 말고 어떤 상황에서 쓰겠다는 거야’
흑월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 설령 도망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유의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바로크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더더욱 무리다. 라덴은 피를 뿜는 팔과 다리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외 발로 껑충 뒤로 물러서면서, 머릿속으로 간절히 바라였다.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인물. 이 상황을 정리하고 탈출시켜줄 수 있는 인물.
시커먼 어둠이 몰아쳤다.
라덴과 흑월 사이에서 솟아난 어둠은 검은 안개가 되어 주변을 할퀴었다. 그 어둠의 한 가운데에서 보라색 모자를 쓴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에는 은색 빛을 발하는 두개골이 이를 딱딱걸며 소리를 냈고, 두꺼운 마법서가 두개골의 곁에 떠올라 공명하고 있었다.
“…흑성.”
흑월은 미간을 찡그리면서 어둠 한 가운데에 서있는 아라포니아를 노려보았다.
“다크 세인트라고 부르거라.”
아라포니아가 모자를 손끝으로 올리면서 쏘아붙였다.
브레이크-3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