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90
“이건.. 그러니까..”
아라포니아가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라덴은 아라포니아를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저런 표정과 저런 목소리를 뱉는 아라포니아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라포니아는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더니 발을 들어 근처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그래, 놓쳤다.”
개입한 마법사의 실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무리 아라포니아가 악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녀 정도나 되는 대마법사가 다른 마법의 개입을 순간이나마 탐지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아라포니아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고 한들, 그녀의 구속 마법을 파훼하고서 악희를 데리고 탈출했다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발할라 대륙 내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는 뜻이다.
“잠깐만 기다리거라.”
아라포니아는 마도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마력에 공명한 마도서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아라포니아는 우선 이 거대한 알라베스 산 전체에 탐지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악희의 존재감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아라포니아는 공간이동으로 사라진 마법의 역추적에 들어갔다. 하지만 실패했다. 개입한 마법사 측에서 의도적으로 공간좌표를 꼬아놓은 탓이었다. 그렇게 되니 아라포니아로서도 역추적은 불가능했다.
“완전히 놓쳤구나.”
아라포니아는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라덴은 부르르 어깨를 떠는 아라포니아를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곁에 서있는 유성을 힐긋 보았다.
“어.. 어떻게 하죠?”
“으음..”
유성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악희의 봉인이 풀렸다. 그리고 이제는 이 넓은 대륙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흑성.. 아니, 다크 세인트님도 쫒을 수 없다면 현 대륙에서 악희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라포니아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펼쳐져있던 마도서가 얌전히 덮혔다.
“이 대륙에서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마법사는 없단다. 내가 쫒을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쫒을 수 없는 것이야.”
“..그러면, 부탁은?”
라덴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넘기려고 해도, 아무래도 건수가 건수이다 보니 얌전히 놓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덴은 일주일 전에 아라포니아의 부탁으로, 세하라의 왕릉에서 수정 구슬을 가져다주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아라포니아는 자신의 ‘신뢰’와 라덴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말했었다.
라덴은 이번에 그 부탁을 사용했다. 악희를 죽여달라고. 아라포니아는 그것을 받아 들였고, 성공할 뻔은 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라포니아는 실패했다. 악희를 놓쳐버린 것이다.
“..부탁은.. 그래. 이 경우는 내가 실수한 것이지.”
아라포니아는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중얼거렸다. 그녀로서도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개입했다고는 해도, 아라포니아가 악희를 놓친 것은 명백히 말하자면 아라포니아의 실수였다.
“이번 부탁은 없는 것으로 치지. 다음에 다시,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래. 그때 다시 부탁을 하거라.”
그렇게 말하는 아라포니아의 입술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라덴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냥 퉁 치죠. 그렇게 쿨하게 말하기에는 흑성, 다크 세인트라는 이름값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때를 위한 보험으로 두는 편이 낫다.
“..앞으로가 걱정이군요.”
유성이 입을 열었다. 그는 착잡한 얼굴로 무너진 동굴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저 포악한 괴물이 다시 풀려났으니.. 앞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아라포니아가 유성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팔을 다시 로브 안으로 집어 넣고서 로브의 앞섬을 여몄다.
“힘을 잃어 전성기만큼은 못한다고 하지만, 지금의 세상에서 악희가 날뛰는 것을 잡을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만약 그 못된 것이 힘을 회복하기라도 한다면 여러 가지고 귀찮아 질 거야.”
“그래서 걱정입니다. 10년 전에는 저와 동료들이 어찌 봉인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무리지. 그 계집이 바보가 아닌 이상 또 똑같은 봉인을 당하겠느냐?”
아라포니아의 말에 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유성은 자신의 다른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카작의 위치야 라덴 덕에 알게 되었지만, 다른 동료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너는 어쩔테냐?”
아라포니아가 라덴을 향해 물었다.
“아라포니아님은요?”
“오랜만에 한 외출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아. 그렇다고 밖에 나와서 할 일이 더 있는 것은 아니니, 이만 돌아가야지.”
“저는..”
라덴은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원래는 악희의 봉인 퀘스트를 완료하고서, 유성에게 부탁하여 알라베스 산을 넘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퀘스트는 실패했다. 블랙벨트가 사라졌는지 남았는지는 아직 확인이 안 되었지만,
‘지금 내가 알라베스 산을 넘는다고 해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 라덴은 자신의 레벨에 맞지 않는 퀘스트를 클리어 해 왔다. 편했던 퀘스트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도 없었지만, 진짜로 못 깨겠다 싶은 퀘스트도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무리를 한다면.. 깰 수 있었다.
덕분에 라덴은 3개월이라는 시간에 레벨 60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발할라를 즐기는 플레이어 중에서 라덴만큼 빠르게 레벨 업을 한 플레이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라덴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편법을 써서 알라베스 산을 넘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성에게 부탁하는 것도 있었고, 아니면 아예 아라포니아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알라베스 산을 넘어서 제노미아에 도착하고, 키라이스를 만난 후에는?
거기서 다시 퀘스트가 발생할 것이다. 나는 그 퀘스트를 깰 수 있을까. 애초에 이 퀘스트의 전제조건은 알라베스 산을 넘는 것이다. 현재 발할라의 랭커 중에서도 알라베스 산을 넘을 수 있는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 잘난 레이크가 파라곤의 길드원 전체를 동원해도 알라베스 산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단 레벨업을 해야죠.”
결국 라덴은 그것을 선택했다. 현재 확인된 유일한 경쟁자인 가람을 제치고 알라베스 산을 넘어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보다는, 당장 레벨을 올리는 것이 급하다. 그것은 라덴이 악희와 마주하면서 느낀 무력감 때문이기도 했다.
라덴의 컨트롤은 나무랄 곳 없이 뛰어나다. 하지만 아바타의 스펙은 너무 낮다. 세하라의 왕릉에서도.. 검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오를 잡을 방법이 보이지 않아서 결국 도망쳐 버렸다. 언젠가는 갚아 줄 생각이었지만, 개입 없는 일대일 상황에서 도망쳤다는 것 자체가 라덴에게는 굴욕이었다.
‘지금 알라베스 산을 넘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당장 앞서간다고 해도 결국 발이 묶인다.’
그럴 바에는 아예 깔끔하게 뒤로 물러서는 것이 낫다. 아니, 이 경우에는 물러선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아직 블랙벨트가 사라졌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니까.
블랙벨트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가람 역시 발이 묶인다. 그 사이에 라덴은 최대한 빠르게 스펙을 올려 놔야 했다. 최소 레벨 80은 찍고 강기방출 스킬을 익혀놔야 상위 랭커들과 제대로 경쟁이 가능하다.
퀘스트 수행 때문에 레벨업은 뒤로 미뤄두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당분간은 레벨업에 집중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당분간이 아니라 꽤 오랫동안.
다행히 라덴에게는 이 레벨에 가는 던전보다 효율이 좋은 파밍 장소가 있었다.
투기장이다.
*
“큭!”
악희는 땅에 뒹굴고서 신음을 흘렸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려는 그녀를 향해서 로브를 뒤집어 쓴 누군가가 다가왔다. 머리를 들어 올린 악희는 눈에 힘을 주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뭐야?”
“당신을 구한 겁니다.”
로브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낮은 남자의 것이었다. 그 말에 악희는 자세를 고쳐서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삐딱하게 머리를 기울이고서 남자를 노려 보았다.
“나를 구해? 네가?”
“예. 제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흑성에게 죽었을 겁니다.”
“맞아. 꽤 적절한 개입이었어. 그 순간만큼은 나도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
악희는 웃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한 것이다. 전성기 때보다 약해졌다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 무력하게 당할 줄이야. 파고드는 것이 너무 얕았었나? 악희는 자신의 실수를 복기해 보면서도 불쾌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뭐? 내가 너한테 뭘 해줄까?”
악희가 물었다. 그 말에 남자는 팔짱을 끼고서 악희를 내려 보았다. 악희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참 대범한 놈이었다. 아무리 악희가 약해졌다고 한들, 겨우 저런 실력을 가진 마법사를 찢어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
“당신한테는 크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주제에 왜 구했는데?”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 둘 것을 그랬습니까?”
남자가 역으로 질문했다. 악희는 낮게 웃으면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아니,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지. 오랜 봉인에서 간신히 벗어났는데.. 죽어버리면 아깝잖아. 안 그래?”
“그러시겠죠.”
“너는 누구지? 그리고 이곳은 어디야?”
악희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실 지금 악희의 몸상태는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라포니아의 마법은 저주처럼 남아 악희의 상처를 곪아 썩게 만들고 있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충분히 회복하겠지만, 당장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악희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오만하게 턱을 세우며 질문했다. 남자는 그런 악희의 질문에 살짝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는 악희를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상대가 상처 입은 맹수라고는 하지만. 상처 입은 맹수가 달려들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잘 치료해주고 품어서 호감을 사는 편이 낫다고 본 것이다.
“..어디 보자. 저는 한센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저희 조직의 아지트 중 하나죠.”
“조직?”
한센은 느릿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은 둘째치고, 악희가 눈을 빛낸 것은 한센이 힘을 주어 말한 ‘조직’이었다.
“뭐하는 조직인데?”
“뭐하는 조직.. 이라.. 으음.. 뭐라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좋은 일을 하는 조직은 아닙니다. 아니, 사실 그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뭐라는 거야? 확실히 말해 봐.”
“아니, 진짜로 제가 방금 한 말대로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저희 조직은 좋은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을 하는 조직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제가 모르니,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뭐야 그게? 뭐 그렇게 애매모호해? 조직의 최종 목적, 그런 것 없어?”
“있습니다. 제국의 붕괴죠.”
한센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표정으로 뱉기에는 터무니없는 대답이었다. 악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한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제가 잘못 말하지는 않았으니, 아마 당신께서 들은 것이 맞을 겁니다.”
“제국 붕괴.. 붕괴? 제국을 무너트리겠다고? 이 세상을?”
“일단 목적은 그렇게 두고 있습니다. 지금은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단계고요.”
한센의 말에 악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웃음을 흘렸다. 악희는 자기 자신이 제법 미쳐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제국을 붕괴시키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왜 그래야 하는가?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너 재밌네.”
“저희는 꽤 진지합니다만.”
“그래서 더 재밌어. 제국 붕괴.. 붕괴! 아하하!”
악희가 머리를 흔들며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한참을 웃던 악희의 웃음이 어느 순간 뚝 멈췄다.
“이렇게 하지.”
악희의 얼굴에 묘한 여운을 담은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한센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내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내가 너를.. 아니, 너희 조직을 도와주도록 할게. 어때?”
“악희께서 도움을 주신다 하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뭐 이런 것을 바라고 당신을 구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돕고 싶어졌어. 내가 봉인당해 있는 동안 세상이 아주 재밌어졌잖아, 응? 그래, 너희 조직의 이름이 뭔데?”
“별로 멋있는 이름은 아닌데..”
“네 이름도 그래. 한센이라니, 너무 흔한 이름이잖아. 그거 본명이야?”
“본명입니다.”
“좋아, 한센. 그래서 너희 조직의 이름이 뭐야?”
악희가 웃으며 물었다. 한센은 괴물의 웃음을 마주보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황혼입니다.”
스토리가 개변되기 시작했다.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