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Coming of Shinken RAW novel - Chapter 91
“임원 회의라니, 급하긴 급했나봐?”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앨리스는 손을 들어 셔츠의 구김을 손으로 털어 폈다. 앨리스의 옆에서 그녀의 자켓을 들고 서있던 남자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연히 급하겠죠. 히든 스토리가 개방되었으니까.”
“애초부터 개방되라고 둔 거였잖아. 뭘 놀랄 일이라고 임원까지 소집해?”
“타이밍이 별로 안 좋았잖아요. 지금 개방되면 기존에 두었던 스토리 라인이 꼬이고서 독자적 스토리가 만들어지니까. 그래서 아닐까요?”
“그게 웃긴 거야. 애초에 발할라의 스토리는 독주하게 둔 거였어.”
앨리스가 코웃음을 치면서 그를 지적했다. 그녀는 주머니 안에 구겨 넣었던 넥타이를 꺼내 흔들었다. 엉망으로 구겨져 있던 넥타이가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 쭉 펴져서 빳빳해졌다. 앨리스는 목에 넥타이를 두르면서 계속해서 말했다.
“진전이 잘 되지 않으니 아예 스토리 추가라는 형식으로 황혼을 공개하기는 했지만. 공개 안 했을 때에도 황혼은 활동하고 있었다고. 거기에 히든 스토리로 두었던 검은 날개가 개방되었다고 해서 놀라는 것이 웃긴단 말이야.”
“뭐.. 임원들마다 생각은 다른 것 아니겠어요?”
“뭐 그야 그럴 지도 모르지만. 근데 너, 계속 그 꼴로 있을 거야?”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면서 거울에 비춰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남자가 그런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앨리스는 혀를 차면서 머리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그게 뭐 어때서요?”
“네가 남자나 여자나 뭐, 상관없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야. 그래도 여자 화장실인데 매너는 좀 챙기지?”
“선배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난 여자 아냐?”
“뭘 새삼스레..”
남자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앨리스의 말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의 얼굴이 일렁거리며 변했다. 변한 얼굴은 사람이 아닌 앙증맞은 토끼의 얼굴이었다. 새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토끼. 토끼는 위로 솟은 귀를 쫑긋거리면서 품에 안고 있던 자켓을 앨리스에게 건넸다.
“오랜만에 그 모습 보니까 좋네. 난 네가 그 모습으로 있는 것이 좋아. 귀엽거든.”
“귀엽기는 무슨.. 그리고 난 이제 이 모습 싫어요. 말하기도 불편하고, 입 다물 때도 불편해서.”
토끼는 투덜거리면서 보란 듯이 입을 벌렸다. 커다란 앞니가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앨리스는 그런 토끼를 보고서 낮게 웃으면서 자켓을 몸에 걸쳤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임원 회의에서 가짜 모습으로 있을 것도 아니면서.”
“어..? 저도 임원 회의 참가해요?”
“너도 임원이잖아. 낙하산이기는 하지만.”
“으아.. 나 거기 들어가는거 좀 그런데..”
“좀 그렇기는 뭐가 좀 그래?”
“들어가면 내가 막내잖아요. 막 심부름하고 그러는 것 아니에요?”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애초에 다 바쁜 놈들이라서 제대로 모이지도 않을 테니까. 지금 몇 시야?”
앨리스의 질문에 토끼가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전 11시 50분이요.”
“그럼 슬슬 갈까.”
앨리스의 말에 토끼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토끼의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화장실을 나오고서, 앨리스는 토끼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넓은 복도에는 둘을 제외하고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느릿하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도중에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널따란 방. 새하얀 원탁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앨리스는 빈 의자 중 하나를 끌어다가 앉았다. 아니, 앉으려고 했다.
“거긴 내 자리야.”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새하얀 구체가 공중에 떠있었다. 앨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래? 몰랐어.”
“네가 가장 늦었어. 뭐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갑작스러운 소집이었잖아. 여자에게는 준비가 필요한 법이야.”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원탁을 빙 두른 의자의 위에 색이 다른 구체들이 떠있었다. 저들이 있는 공간에는 앨리스도 구체가 되어 떠있을 것이다.
“회의의 내용은?”
앨리스는 빈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토끼는 머뭇거리다가 앨리스의 옆에 앉았다. 그런 토끼를 보면서 한 구체가 이죽거렸다.
“시종도 데리고 오고. 아주 잘나셨군.”
“시종이라니? 쟤도 엄연한 임원이야. 모두 동의했을 텐데?”
앨리스의 대답에 토끼가 주눅이 들어 머리를 푹 숙였다. 앨리스는 축 처진 토끼의 귀를 보면서 쿡쿡 웃었다.
“정 불만이면 마스코트라고 생각해. 귀엽잖아?”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자고. 왜 부른 거야?”
구체 중 하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투덜거렸다.
“히든 스토리가 개방되었어. 검은 날개 말이야.”
다른 구체가 말했다.
“그것이 임원 회의를 소집할 정도로 중대한 사안인가?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히든 스토리잖아.”
“시나리오가 어긋나잖아. 수정해야하지 않을까?”
“수정? 무슨 수정? 봉인에 풀려 난 악희를 다시 처박아 놓자고?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시나리오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악희가 황혼과 접촉했기 때문이야. 시나리오가 어긋났다면, 그래. 뭐부터 수정해야 할까? 황혼을 아예 삭제해?”
“이미 공개한 스토리를 삭제하는 것은 귀찮은 작업이야.”
“그러면 악희를 삭제해?”
“이미 개방된 스토리를 수정할 필요가 있을까? 시나리오가 가속되기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악희나 황혼은 아직 크게 날뛰지 않을 거야.”
“그건 모르는 거지. 악희나 황혼 쪽에 정신 제재를 가할까?”
이야기가 오갔다. 앨리스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자를 삐걱거렸다. 토끼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며 이곳에 없는 임원들의 회의에 귀를 기울였다.
“당장의 플레이어는 악희와 결탁한 황혼을 막을 수 없어.”
“그것은 황혼 퀘스트 자체가 그렇지. 퀘스트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 블랙 벨트도 해금되지 않았고.”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명확한 목적을 주지 않는다면 블랙 벨트의 해금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목적을 주었다고 해봤자 현재 알라베스 산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플레이어는 열이 채 안 된다고. 그들이 활발하게 정보 교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건..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지.”
임원 중 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현재 발할라 내에서 황혼 퀘스트와 접촉한 플레이어는 9명이다. 라덴과 가람 뿐만이 아니라 다른 플레이어들도, 다른 형태로 황혼 퀘스트와 접촉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황혼과 접촉한 플레이어들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을 넘은 플레이어들이지. 일단 기다려 보자고. 그들이 알라베스 산을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악희와 황혼은? 제재할 텐가?”
“다수결로 하지. 나는 NO. 결탁만 했을 뿐 아직 움직임은 없어. 제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앨리스와 토끼를 제외한 구체 다섯이 모두 NO를 말했다. 토끼는 앨리스 쪽을 힐긋 보았다.
“나도 NO. 그냥 두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아.”
“저.. 저도 NO.”
토끼가 머뭇거리며 의견을 말했다. 결국 전원이 NO였다.
“좋아. 악희와 황혼은 그대로 두는 것으로. 그렇다면, 그 다음은 플레이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볼까.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있거든.”
“누군데?”
“라덴. 알아? 판타지아 시절에 투왕이라고 불리던 꼬마인데.”
“아아.. 알고 있어. 그 아이를 영업한 것이 앨리스, 너였지?”
임원들의 시선이 앨리스에게 주목되었다. 그래봤자 지금의 그들에게는 눈이 없었지만 말이다. 토끼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앨리스를 보았지만, 앨리스는 태연한 얼굴로 웃기만 했다.
“맞아. 내가 직접 영입했지. 왜?”
“그 꼬마가 이번 일의 주역이었으니 말이야. 은둔자 퀘스트와 황혼 퀘스트. 두 개를 동시에 수행하던 중이었거든. 페이크로 두었던 은둔자 퀘스트는 악희가 깨어나는 것으로 사라졌지만, 아직 황혼 퀘스트는 남아 있어.”
“그게 뭐 문제라도 돼? 플레이어가 무슨 퀘스트를 수행하는지, 그것에도 간섭할 생각이야?”
“아니, 간섭할 생각은 없어. 발할라 안에서의 플레이어에게 개입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 말에 토끼는 꿀꺽 침을 삼켰다. 임원의 말이 마치 지적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라덴이 튜토리얼을 수행하던 때, 토끼는 앨리스의 명령으로 라덴의 튜토리얼을 살짝 바꿨기 때문이다.
“은둔자에 황혼, 그리고 발레르 패밀리까지. 덕분에 그 꼬마는 많은 것에 엮이게 되었지. 흑성과도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모양이고.”
“그래서?”
“그냥 그렇다는 거야. 발할라가 오픈하고서 2년이 다 되어가지만, 발할라 안에 두었던 다섯 괴물과 접촉하고 친분을 쌓은 것은 그 꼬마가 처음이니까.”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말한 거야?”
“아니.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꼬마 자체야.”
“뭔데?”
“동조율.”
토끼가 히끅하고 딸꾹질을 삼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앨리스는 토끼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서 임원을 바라보았다.
“동조율.. 동조율이 뭐?”
“그 꼬마. 평균 동조율이 굉장히 높던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새하얀 창이 나타났다. 앨리스는 아무 것도 떠있지 않은 창을 무표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하얀 창에 동조율을 기록한 수치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현재 발할라의 플레이어 중에서 가장 높은 동조율을 보였던 것은 랭킹 4위인 불칸의 루카스. 최대 동조율은 18%고, 평균적으로는 15%의 동조율을 보이고 있어. 그 다음은 불독의 카란. 랭킹 2위지. 카란의 최대 동조율은 16%에 평균 동조율은 12%. 랭킹 1위인 파라곤의 레이크는 최대 동조율이 14%에 평균은 13%밖에 안 돼.”
“라덴은?”
“여기 기록되어 있군. 카할을 혼자서 잡았을 때, 라덴의 동조율은 무려 21%를 기록했어. 평균 동조율도 굉장히 준수하지. 18%. 루카스의 최대 동조율을 평균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거야.”
이것은 플레이어들에게는 공개된 내용이 아니다. 동조율. 쉽게 말하자면 플레이어의 정신이 아바타의 능력와 얼마나 동조하는가. 시스템이 부여하고 플레이어가 계승한 ‘이름’과 플레이어 본인이 얼마나 동조하는가.
“우리는 모든 플레이어에게 적절한 이름이 계승되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100위 이내의 최상위 랭커의 평균 동조율은 11% 정도야. 거의 2년 동안 게임을 하면서 아바타에 익숙해진 랭커의 동조율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그런데 게임을 시작한지 3개월도 안 된 꼬마가 그 기록을 갈아 치워 버렸어.”
“그게 문제될 일이야?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그렇기는 해. 하지만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지. 우리들로서도 주목할 인재라고 보는데.. 넌 어떻지? 앨리스. 저 꼬마를 직접 영입해 온 것은 너잖아.”
“주목할만한 인재라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우리가 직접 나서서 그에게 특혜를 줄 필요까지는 없지 않아?”
“동감.”
다른 임원들이 앨리스의 말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말에 라덴을 언급했던 임원은 옆에 띄워 놓은 창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멘탈 케어는 필요하다고 봐. 이런 인재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드랍률 조정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건 너무 특혜인데.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그는 혼자서 잘 하고 있어.”
“흐음.. 그렇다면 일단은 지켜보는 식으로 가지.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무척 흥미로워. 카할과 싸울 때에 최대 동조율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평균적으로 18%를 기록하는 동조율이 가장 솟구치는 빈도는.. PVP나 PK를 할 때더군.”
“어.. 그러면 더 잘된 것 아닌가요?”
토끼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다른 임원들이 토끼를 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토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잠깐 헛기침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는 말했다.
“지금 라덴은 투기장에 가있거든요.”
*
끝
ⓒ 목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