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ortstop hits a home run too well RAW novel - Chapter 106
106. 우리 결혼할래?
후다닥.
아주 빠른 속도로 침대에서 벗어난 유행운이 지갑을 챙겨 방을 탈출했고 혼자 남은 백유정은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뭐지?”
기름을 끼얹은 듯 활활 타오르던 불은 어느새 꺼졌다.
허탈해진 백유정이 몸을 일으켰고 침대에 앉아 잠시 생각했다.
“내가 별론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
연애를 시작하고 이런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시험 기간이 끝나고 대전에 놀러 온 백유정은 자연스럽게 함께 밤을 지새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유행운은 남달랐다.
다른 남자와는 달랐다. 친구들에게 들었던 남자라는 종자와는 확연히 다른 유형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브랜드 호텔을 잡아 주었고 쉬라며 굿바이 키스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도 생각했다.
저 새끼는 혹시 고자인 건 아닐까?
“……하아.”
한숨을 쉰다.
시즌 중간 휴식기에 여행을 가자는 말에 얼마나 들떴는지 모른다. 옛날 사람도 아니고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다.
특히 백유정에게는 남다른 의미였다.
인기에 비해 남자에게는 그리 관심이 없었고 제대로 된 남자친구를 만든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환상을 갖게 되었던 백유정이었고 그렇기에 이번 여행을 유독 기대했었다.
“방이 두 개였다고?”
그 순간, 백유정은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참지 못하고 방이 두 개가 맞는지 확인했고 그마저도 여자로서는 사실 자존심이 상했다. 물론 유행운이 남자로서 여자친구를 보호하려고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지금 이건 여행이다.
그것도 첫 여행.
미성년자 신분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내가 매력이 없나?’
상상의 방향은 점점 악화된다.
혹시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
삐빅!
상상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퍼질 즈음, 객실 도어락이 풀리며 문이 벌컥 열렸다.
빠르긴 하다.
KBO 최고의 발을 가진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유행운답게 아주 빠르게 편의점에 다녀왔다.
“누나!”
유행운의 청바지 주머니가 울룩불룩하다.
그리고 양손에는 작은 상자가 가득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후두둑.
손에 들린 작은 상자가 바닥에 떨어진다. 유행운이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주워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도 형형색색의 작은 색상의 상자를 꺼내 침대에 늘어놓았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그냥 다 샀어!”
어이가 없다.
백유정은 산처럼 쌓인 작은 상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 잘했지?”
순간, 백유정은 해맑게 웃는 유행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친놈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유행운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는다.
그 속에서 드러난 근육이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열심히 만든 잔근육이 백유정의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오해할 뻔했어.”
“응?”
“자기가 혹시 고자인 줄 알고…….”
“뭐?”
순간 침묵이 흐른다.
유행운은 지금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백유정이 한 말이 뜻하는 의미는 명확했지만, 너무 당황해서 바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뒤늦게 그 속뜻을 파악한 유행운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누나.”
“…….”
“지금 확인해 볼래?”
* * *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유행운이 눈을 떴다.
이제 막 잠에서 깼지만, 그 얼굴이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무엇보다 아직 시간이 이르다. 새벽이었고 조금 더 잘 시간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얼굴에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자신의 팔을 베고 잠든 백유정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짓는다.
뭐랄까, 오랜만에 느끼는 최고의 밤이었다.
지난 1회차 인생에서는 이런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본업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에게 연애 따위가 가당키나 한가.
유행운도 야구를 빼고 말하면 평범한 남자에 불과하다.
사랑을 하고 싶고 연애를 하고 싶으며 결혼도 하고 싶다. 귀여운 자식을 낳고 싶고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싶다.
그건 남자에게 부여된 기본적인 욕구였다.
“좋다.”
옆에 세상 모르고 잠든 백유정의 머리칼을 정리해 준다.
바닥에는 작은 상자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지난밤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드러난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추고 미소를 짓는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자는 백유정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잠시 눈을 감고 선잠을 자며 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으음…….”
백유정은 피곤했는지 생각보다 늦게 일어났다.
유행운은 여전히 백유정을 끌어안고 있었고 눈이 마주치자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
“응.”
“몸은?”
“……죽을 것 같아.”
그럴 만하다.
어제 유행운은 쉽게 백유정을 놓아주지 않았다. 맹수처럼 달려들었으니 당연히 여자 입장에서는 몸이 축날 만했다.
“오늘은 계속 호텔에 있을까?”
“아쉬운데…….”
“아쉬울 게 뭐 있어.”
백유정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입술을 가볍게 맞춘 유행운이 웃었다.
“누나, 이런 거 원하잖아.”
“하…….”
“그치? 응?”
쪽쪽쪽.
부쩍 스킨십이 늘었다.
유행운이 퍼붓는 키스에 백유정이 혀를 차며 그 얼굴을 밀어 냈다. 이제 보니, 착각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솔직히 꿈에도 몰랐다.
운동선수의 스태미나가 이렇게 넘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 몸이 이렇게 힘들 줄도 몰랐다.
쉽게 말하자면 감당하기 벅차다.
“배고파.”
일단 백유정은 화제를 바꾸었다.
이대로 계속 침대에 있으면 안 된다는 위험 신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룸서비스 시킬까?”
“…….”
“누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
“나 먹고 싶으면 그래도 돼.”
“…….”
백유정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아니라 맹수를 만난 것 같다고.
* * *
순천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예상과 달리 거의 호텔에만 있었지만, 유행운에게는 최고의 휴가였다. 그의 얼굴은 제대로 휴식을 취한 얼굴이었다. 때깔도 좋았고 입가에 번진 미소는 여유를 느끼게 했다.
반대로 백유정은 힘들다.
유행운이 쉬라며 욕조에 뜨거운 물도 받아 주고 입욕제도 사다 넣어 줬지만, 피로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아니.
피로가 풀릴 리가 있나.
“여행 정말 재밌었다. 그치, 누나?”
물론 좋기는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첫 여행이었으니 당연히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오래 얼굴을 본 것도 처음이었기에 좋았지만, 힘들었다.
“다음에는 어디 가지 말고 그냥 특급 호텔에서 쉴까? 응?”
“…….”
“누나, 왜 말이 없어?”
“행운아.”
“응?”
“내가 미안해.”
“뭐가?”
“고자라고 오해했던 거.”
“괜찮아. 그런 건 증명할 수 있으니까.”
큭큭큭큭.
유행운이 웃으며 시동을 걸었다.
여수에 들러서 바다를 보고 가볍게 밥을 먹은 후에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회 먹을까?”
“다 좋아.”
“딱 일주일만 더 쉬고 싶다.”
이틀 후에 다시 시즌이 시작된다.
이제 본격적인 시즌 후반기 시작이었다. 지금 유행운은 슈퍼 루키 이상의 활약을 하고 있었다.
후반기 성적이 바닥을 치지 않는 한 리그 최고의 선수에게 가는 MVP는 유행운의 것이었다. 해서, 유행운은 후반기에 더욱 타격감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나 집에 안 데려다줘도 돼. 피곤하잖아.”
“그래도 데려다줘야지.”
“서울 갔다가 언제 대전 가려고?”
“그럼 누나, 우리 집에 자고 갈래?”
“됐어. 그냥 데려다줘.”
아주 음흉하기 짝이 없다.
유행운이 웃음을 터트리고 운전에 집중한다. 꿈같았던 휴식도 끝났고 이제 이틀 후면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여수.
여수에 관련된 노래가 유행을 하며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받은 곳. 유행운은 주차를 하고 푸른 바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누나.”
고개를 돌려 백유정을 바라본다.
“우리 결혼할래?”
* * *
2028 시즌 KBO 리그 후반기의 문이 열렸다.
그 어느 때보다 순위 경쟁이 치열한 지금, 1위를 유지하려 하는 대전 호크스와 2위를 벗어나 1위를 넘보는 서울 썬더스의 맞대결이 시작된다.
아주 흥미로운 대진표였다.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주중 3연전이었고 그 외에도 탈꼴찌를 바라는 대구 드래곤즈와 다시 연패를 벗어나 반등하려는 부산 마린즈가 맞붙는다.
[현재 유행운 선수가 리그 최상위 타자의 성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현재 홈런이 24개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고요. 이대로라면 오랜만에 40홈런을 달성한 대형 유격수가 탄생할 듯합니다.] [대단하죠. 유행운 선수의 성적도 정말 대단하지만, 대전 호크스가 지금까지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도 무척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전이 이렇게 선전할 수 있었던 건, 공격적인 FA 영입과 더불어 문혁준 선수를 영입하며 전력 보강에 성공했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올해 신인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네, 새로운 대전의 클로저 백유진 선수도 좋은 흐름을 이어 갈 수 있는 요인 중에 하나죠.] [오늘 경기 후반기 시작부터 빅매치입니다. 시즌 1위를 지키고 우승을 향해 도전하려 하는 대전 호크스와 호시탐탐 1위를 넘보고 있는 서울 썬더스의 맞대결! 이 두 팀의 승차는 겨우 2.5경기입니다.]유행운은 견과류를 먹으며 경기에 나설 준비를 끝냈다.
여행을 마치고 어제 하루는 푹 쉬었다. 사실 여자친구와 여행을 하면서 호텔에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거의 나흘을 집에서 쉬기만 한 셈이었다.
덕분에 몸은 아주 가볍다.
선수들은 푹 쉬고 개별적으로 훈련을 하며 후반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코칭스태프와 감독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쁜 하루를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최정환 감독은 휴식기 내내 후반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중에 하나가 이정우였다. 이정우는 타자 전향에 성공했다. 아직 비록 2군에서의 기록밖에 없었지만, 단기간에 서산 호크스의 중심이 되며 현재는 4번 타자로 출전하고 있었다.
최정환은 그 쉬는 동안 이정우에 대한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금 최정환은 대전 호크스의 공격력을 더욱 강화시킬 생각이었다. 어쨌든 문혁준은 장기 계약 여부와 상관없이 올 시즌 함께한다. 타선은 한층 더 강해졌지만, 한 방 있는 타자가 벤치에 있다면 팀은 더 강해진다.
그 자원으로 이정우를 선택했고 면밀히 확인한 결과, 이제 콜업하여 1군에서 써 볼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적응을 잘한다면 비어 있는 지명타자 자리를 줄 수도 있었고 그 성과에 따라 내년 시즌, 1루수와 외야수 전향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잘 쉬었나?”
“네, 구단에서 배려해 주셔서 잘 쉬었습니다.”
“뭘. 선수가 따로 훈련하고 싶다는데 당연히 도와야지.”
이정우는 후반기 시작부터 1군에 합류했다.
슈퍼 루키라고 불렸던 신인 때 이후로는 아주 오랜만의 1군이었다. 부상을 회복하고도 가끔 1군에 올라갔지만, 늘 마운드 위에서 죽을 쒔고 점차 기회를 박탈당했었다.
“오늘 선발 출장, 준비해.”
“네?”
“지명타자.”
“아, 네.”
“타순은 7번.”
“네, 감사합니다.”
심장이 세차게 뛴다.
이제 끝날 듯했던 선수 생활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감독실에서 나온 이정우는 얼떨떨한 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물을 마시고 있던 유행운과 눈이 마주쳤고.
“정우 형.”
두 사람은 생각보다 가까워졌다.
유행운이 자주 도와주었고 흔들릴 때마다 조언도 해 주었다. 투수로서는 경험이 있지만 타자로서는 경험이 없었기에, 이정우는 유행운을 단순한 후배가 아니라 선배처럼 생각했다.
자존심 따위는 버릴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을 부리면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었다.
“축하해요. 1군 복귀.”
라인업지가 벽에 붙어 있다.
유행운의 타순은 여전히 강한 2번. 그리고 이정우의 타순은 미리 들었던 것처럼 7번이었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 시작이었음에도 그는 1군 선발 라인업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는 그 사실에 감명 받았다.
“행운아. 정말 고맙다…….”
유행운이 씩 웃고 그의 등을 위로하듯 툭 쳤다.
“아시잖아요. 이제 시작인 거.”
“그렇지…….”
“우는 건, 그다음에 하세요.”
“안 울었어.”
“눈물 맺혔는데.”
“아니야.”
“네, 뭐. 그렇다고 해 드릴게요.”
선발 출장.
1군 복귀와 함께 선발 기회를 받은 이정우는 이제 증명을 해야 하는 단계에 와 있다. 유행운은 달랐다. 이미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했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