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orage member of the mandol has returned RAW novel - Chapter (20)
20화 어서 가요
새벽 3시, 퀭한 얼굴로 숙소 앞 24시 편의점을 찾았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손에 쥐고서, 터덜터덜 걸어 7인승 승합차로 향한다.
승합차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은 뒤,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쫍 빨아들였다.
“구에에엑, 이건 커피가 아니라 쓸개즙이잖아.”
“아, 한선우 개더러워!”
아메리카노가 그대로 역류하자, 문지호는 그런 나를 오물 보듯 바라봤다.
열아홉의 몸으로 처음 맛본 아메리카노는 혀가 아릴 정도로 씁쓸했다.
“형, 그러게 나처럼 커피 우유를 샀어야지. 내 거 줄게.”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병철이가 반쯤 마신 커피 우유를 건넸다.
군말 없이 커피 우유를 들이켜다가,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어 다급히 입술을 떼어 냈다.
“속 쓰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힐끔 쳐다본 지호의 얼굴은 피로감이 느껴지기는커녕 되레 평소보다 개운해 보였다.
“문지호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역시 메인 보컬은 다르다 이건가.”
이틀 전, 《더스테이지》 제작진 측에서 소속사로 연락을 취했다.
사전 녹화로 예정되어 있었던 스페셜 스테이지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겠다는 통보가 날아왔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건 스페셜 스테이지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최소 두 달간 《더스테이지》의 모든 무대는 MR을 사용한 생방송으로 방영될 것이다.
“들었어? 소문으론 메테오 때문이라던데.”
3대 기획사 소속, 2년 전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탄생한 6인조 보이 그룹 메테오.
시작부터 우월했던 메테오의 인기는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기에 심취한 메테오 멤버들이 이따금 선 넘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룹 특유의 자유분방한 컨셉으로 포장되곤 했다.
다만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던 걸까. 지난주, 메테오 모 멤버의 태도 논란으로 커뮤니티가 떠들썩했다.
“Live AR을 사용한 게 잘못은 아니지만, 좀 심하긴 했지.”
Live AR이란, 일반 음원과는 달리 무대에서 쓸 용도로 반주와 노래를 따로 녹음한 것을 뜻하는데.
Live AR을 깔고, 마이크를 열어 약간의 숨소리와 애드립이 더해지면 마치 직접 라이브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조금이 아니라, X나 심했지.”
창밖을 주시하던 지호가 비아냥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사람이 아니라 금붕어인 줄 알았다.”
춤은 설렁설렁. 입술은 뻐끔뻐끔. 메테오 막내 이든이 엇박자로 입을 움직이는 참사가 일어나고야 말았다.
방영 직후 커뮤니티는 뜨겁게 들끓었고, 일부 메테오 팬들은 명백한 음향 문제라며 과실을 《더스테이지》 제작진에게 떠넘겼다.
쏟아지는 비난에 신물이 난 제작진은 앞으로 두 달간 MR 사용, 그것도 오직 생방송으로만 공개 방송을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주어가 적혀 있진 않았지만, 메테오와 그 팬덤을 향한 저격이나 다름없었다.
“다 좋은데, 왜 하필 오늘부터냐고. 얌전히 있던 우리는 무슨 죄야.”
운도 지지리도 없지.
시리우스의 데뷔곡을 커버하는 날에 이 사달이 일어나다니.
“윈 파트를 부르다가, 삑사리라도 나면…….”
무대 중앙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냅다 3단 삑사리를 내지르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숨을 푹 내쉬자, 지호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내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벌써부터 초 치지 마. 여차하면 화음 넣어 줄 테니까.”
“구에에에엑…….”
“뭐야, 진짜 토하냐? 더러워.”
양말을 입에 물고서 괴로워하자, 매니저 형과 멤버들이 악마처럼 즐거워했다.
유일하게 반응이 없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하준이였다.
같은 차 안에 있지만,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것만 같다.
공원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날 밤 이후, 하준이는 줄곧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구에에엑…….”
틀어진 관계를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케이블 음악 방송 《더스테이지》 대기실.
본방송을 겨우 10분 앞둔 지금, 나는 평정심을 잃고야 말았다.
그러자 같은 대기실을 쓰게 된 시리우스 멤버들이 칸막이 너머로 내 얼굴을 곁눈질했다.
“선우 군, 왜 저래?”
“리허설 때 세 번이나 혀 씹었대요.”
“세 번이나 씹었으면, 잘려 나간 거 아니야?”
8년 차 베테랑 수납멤버 한선우, 난생처음으로 센터가 됐다.
그 영광스러운 순간을 무려 라이브로 송출하게 된 것이다.
긴장감이 한계치에 달해서, 리허설 때 연달아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숨이 닿는 순간 톡톡 아파서’ 그 짧은 파트가 뭐가 그리 어렵다고.
– 숨이 닿는 순간 톡톡 아빠……!
급기야 카메라 감독님을 두 번째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거듭되는 실수에 나는 특단의 조치로 능력치 강화 카드를 사용했다.
메인 퀘스트 ‘저랑 사궈 주실래요~~?’의 완료 보상으로 능력치를 소폭 상승시킬 수 있었다.
카드 덕분에 가창 등급이 ‘F’에서 ‘D’로 올라서 어찌어찌 리허설을 끝마치긴 했지만…….
‘이거론 부족해.’
생방송 무대를 성공적으로 끝마치려면, 스페셜 카드를 사용하여 춤 등급을 대폭 상승시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고뇌에 빠져 대기실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자, 시리우스 메인 댄서 윈이 기척 없이 다가왔다.
“리허설 때 실수한 것 때문에 그래? 아직 부딪쳐 보지도 않았잖아.”
“…….”
“싸우기도 전에 절망할 만큼 준비가 허술한 것도 아니었어.”
난폭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뱉는 말은 참 다정하게 들렸다.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윈을 올려다봤다.
“윈 씨…….”
“그래, 맞아. 뒤지몬 어드벤처 237화에 나오는 명대사야.”
뭐야, 내 감동 돌려줘요.
돌려 달라고 한 감동 대신, 윈은 껌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바로 뒤지몬 풍선껌이었다.
물론 판박이 스티커는 없었지만…….
“새벽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며.”
“속이 좀 쓰려서요.”
“그럴수록 더 먹어야지.”
“……풍선껌을요?”
마지못해 풍선껌을 입에 넣었다.
단 음식을 그다지 즐겨 먹진 않지만, 쓸개즙 맛이 나는 커피보단 훨씬 나았다.
“하준이 말이야. 화장실 간 지 얼마나 됐지? 좀 늦는데.”
곧 생방송이 시작한다고 해도 블랙시즌이 호명될 때까지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적어도 그때까진 대기실로 돌아오겠거니 싶었는데.
그 순간,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하준이의 휴대 전화를 발견했다.
뭔가 이상하다. 휴대 전화를 분신처럼 여기는 녀석인데.
“형, 제가 가서 확인할게요. 저도 마침 화장실 가려고 했어요.”
“괜찮겠어? 같이 갈까?”
“괜찮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그럼 매니저 형하고 나는 이 근방 위주로 둘러볼게.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네, 형.”
나는 대기실에서 뛰쳐나와 한걸음에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을 벌컥 열자, 손을 씻던 남자 아이돌이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꾸벅 허리를 숙이며 양변기 칸으로 다가갔다.
화장실 내부를 구석구석 살폈지만, 하준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딜 간 거야.’
혹여나 엇갈린 게 아닐까 싶어서, 서둘러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곧게 뻗은 복도를 지나치던 중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와, 방금 김 피디 눈빛 봤어요? 누가 보면 국장이라도 된 줄 알겠네.”
“너도 저번엔 선 넘었어. 신곡 홍보하러 나왔으니까,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지.”
“에이, 형. 폐급 신인만 모아 둔 방송에서 뭔 성의를 보여요.”
메테오의 리더 잭슨과 막내 이든.
《더스테이지》 출연진을 모조리 라이브하게 만든 주범이었다.
“여기도 폐급 신인, 저기도 폐급 신인. 오줌보 터질 것 같은데 화장실에서 말을 걸질 않나.”
“후배 놀려 먹는 것도 적당히 하고. 네 뒤치다꺼리하고 다니는 매니저를 생각해.”
“아, 억울해. 이번에는 손 안 올리고 겁만 줬다고요.”
“스튜디오 B동에 데려다 놓은 거 아니야?”
“진짜 털끝 하나 안 건드렸어요. 갑자기 혼자 질질 짰다니까요? 망돌 종특인가…….”
일순 이든과 시선이 얽혔다.
이든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내 얼굴을 보고는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X나 재밌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나는 곧장 두 사람을 지나쳐 스튜디오 B동으로 향했다.
스튜디오 B동은 《백 선생의 손맛》 촬영장으로 오늘은 촬영이 없는 날이었다.
“하준아!”
이름을 부르면서도 손에 쥔 휴대 전화를 놓지 않았다.
도겸이 형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리려던 참이었다.
[경고! 돌발 이벤트 발생!] [지금 당장 전투태세를 갖추십시오.]사이렌 소리가 사납게 울려 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 팔을 추켜올렸다.
“어쭈, 막아?”
복도에서 마주쳤던 이든이었다. 나를 뒤쫓아 온 모양이다.
“선배님, 이런 짓이 재미있으세요? 전 재미없어요. 정말로.”
“이 씹……!”
이든은 손을 올렸고, 나는 다시금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든은 주먹질 대신, 돌연 내 몸을 소품 보관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 X나 재밌어. 너 같은 폐급 신인이 살려고 발악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해체하는 거 보는 게 내 유일한 취미야.”
“…….”
“또 뭣 같은 눈으로 꼬나보네. 문지호도 너도,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X발…….”
이든은 신경질적으로 소품 보관실 문을 걷어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굳게 닫혔다.
그 후 곧바로 문손잡이를 돌렸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문손잡이가 고장 난 건가?’
하준이가 이곳에 없는 게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허망함과 안도감이 한데 뒤섞여 미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침착하자. 분명 휴대 전화를 들고 왔을 텐데.
보관실 바닥을 샅샅이 살펴봐도 휴대 전화가 보이지 않는다.
설마 이든과 실랑이를 벌이면서 문밖에 떨어뜨렸나? 골치 아픈 일이었다.
“밖에 누구 없어요? 안에 사람 있어요!”
목청껏 소리치며 오른팔로 문을 두들겼다.
텅, 텅, 텅.
아무렴 따로 떨어져 있다 해도 같은 스튜디오인데, 적어도 한두 명쯤은 지나가지 않을까.
기약 없는 기다림이 계속될수록 오른팔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디버프! ‘약간 긁힌 걸 가지고’ 발동, 오른팔 부상으로 인해 움직임이 저하됩니다.(지속 시간 1시간)] [디버프! ‘약간 긁혀? 너의 팔이 날아갔다’ 발동, 통증 때문에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됩니다.(지속 시간 10분)]“……시스템, 나 좀 도와줘.”
도움을 요청했지만, 디버프 지속 시간이 표시될 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방관하는 거야?”
스페셜 스테이지에 오르는 단 1분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쪼개 가며 연습에 몰두했다.
이대로라면 멤버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오른팔을 부여잡고 숨을 쌕쌕 내쉬던 중, 잊고 지내던 정보가 불현듯 떠올랐다.
“……랜덤 카드 말이야. 상위 카드를 뽑으면, 하위 카드랑 교환할 수 있다고 했지?”
하위 카드를 보여 줘.
그러자 두 장의 카드가 눈앞에 펼쳐졌다.
[버프 카드! ‘무선 호출기’, 특정 멤버에게 신호를 보내 위치를 알릴 수 있습니다.] [버프 카드! ‘자양강장제’, 피로감이 소폭 회복됩니다.]“무선 호출기…….”
내가 가진 스페셜 카드와 버프 카드를 맞바꾸면, 멤버들에게 위치를 알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능력치를 대폭 상승시킬 기회는 물 건너간다.
나는 짧은 망설임 끝에 결론을 내렸다.
“교환할게.”
멤버들의 프로필이 펼쳐졌고, 주저하던 손끝은 어느덧 하준이의 이름을 더듬고 있었다.
[메인 댄서 최하준에게 신호를 보내 플레이어의 위치를 알립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품 보관실 문밖으로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하준아?”
이름을 부르자, 발소리가 우뚝 멎는다.
“선우 형? 거기 있어요?”
“하준아, 아무 데도 안 다친 거지?”
“다치긴 뭘 다쳐요!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촬영장으로 돌아가요! 이러다 생방송 펑크 나겠어요!”
긴장이 풀려 문 앞에 털썩 주저앉자, 하준이가 조급한 목소리로 일렀다.
“밖에서 문이 안 열리는데요? 안에서 안 잠근 거 맞죠?”
“하준아, 형이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팔자 좋게 그런 거 들어주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제가 가서 어른 불러올게요. 아니, 그것보다 매니저 형한테 전화를 먼저…….”
“스페셜 스테이지 센터, 너한테 맡기고 싶어.”
본심을 말하자면, 최하준의 자리를 빼앗고 싶던 게 아니었다.
물론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센터 자리를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돋보이는 멤버가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멤버도 있는 거겠지. 머리로는 이해가 가.”
“…….”
“대표님 의견에 반박할 생각 없어. 난 그냥, 우리끼리 있을 때조차 급을 나누는 게 싫었어. 그뿐이야.”
잠깐의 정적 후, 문밖으로 굉음이 잇달아 울려 퍼졌다.
텅, 텅, 텅.
하준이가 문손잡이를 내리치고 있는 듯했다.
“최하준,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텅, 텅, 텅.
“무리해서 열 필요 없어! 어차피 팔에 힘이 안 들어가서 춤도 제대로 못 춘다고!”
텅, 텅, 텅.
“최하준 미친놈아! 너 당장 안 그만둬?”
저 자식, 이러다 정말 골절이라도 입는 거 아니야?
나 없이도 충분히 스페셜 스테이지를 진행할 수 있지만, 하준이가 없는 무대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만두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문밖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와르르 허물어졌다.
최하준의 무모한 행동을 어떻게든 막아야만 한다.
그거다. 스탯 포인트를 쓸 테니까.
[스탯 포인트를 사용하시겠습니까? Y/N]“당장 멈춰!”
[스탯 포인트 사용 완료!] [메인 댄서 최하준의 갱생 가능성이 소폭 상승합니다.] [갱생 가능성: ●○○○○]이제 됐어.
갱생 가능성이 올라갔으니, 최하준도 남병철처럼 조금은 고분고분해지겠지.
그때였다.
텅!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예상은 빗나갔고, 나의 간절한 바람은 무참히 짓밟혔다.
“어서 가요.”
마주 바라본 그곳엔 양손이 발갛게 부어오른 하준이가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