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7
(16)
내가 기절했다가 깼다는 걸 인식한 건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아니, 세 번째였던가?
두 번이든 세 번이든 상관없었다.
심한 몸살을 앓은 듯 온 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열감도 있는 걸 봐서 컨디션이 바닥을 기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을 받치고 있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침대가 있는 걸 보면 아마 하르트만 성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자 뻑뻑한 각막에 흐린 불이 눈부시게 번졌다.
‘이렇게 살다가 진짜 죽겠다.’
아른트는 어디 있는 거지. 일으켜달라고 불러야하는데.
입술이 한겨울 낙엽같이 바삭바삭 말라서 입을 여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림자가 하나 불쑥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은…… 제정신으로 깬 것 같군.”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의원? 우리 의원을 부를 돈이 있었어?
보르미 이빨은 어떻게 된 거고? 그건 다 판 거야?
아니, 그 전에 무슨 일이 하나 있었지 않았나? 동부 황무지에 가려다가 길을 잃어서…….
구덩이.
검은 진흙.
뛰어내리는 사람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났다.
어쩐지 번쩍거리고 깨끗하고 화려한 방, 푸근하게 몸에 딱 맞는 침대와 코끝을 맴도는 묘한 향기.
침대 옆에는 사람이 너덧 명 서 있었다.
대부분 놀라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기세가 좋아. 의원은 안 불러도 되겠는데. 정신이 좀 드나?”
누구신지……?
남자는 첫눈에 보자마자 ‘잘 생겼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외모였다.
검은색에 가깝게 어두운 셔츠는 소매가 넉넉했고, 실용성에 중심을 둔 간단한 옷차림이었다.
손에는 검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살이 전혀 보이지 않는 레이스제였다.
남자가 끼기에는 좀 화사한 디자인이었지만 그에게는 썩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색이 짙지도, 연하지도 않은 긴 금발은 하나로 묶어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그래도 뺨이나 이마 위로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몇 올 있었는데, 남자의 분위기 때문인지 흐트러졌다는 감상은 전혀 없었다.
색이 진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옷에 먹혀버릴 것 같은 참에 보기 좋게 시선을 끄는 붉은 눈동자.
레안드로스와는 또 다른 타입.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내 손에는 화려한 잔이 쥐여줬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음식이 날라졌다.
“그렇게 황송해하지 않아도 괜찮네. 내가 그대를 우연히 보고 구한 것이니.”
“구했다고요?”
“그래. 동부의 황무지에 쓰러져 있더군.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어, 이 참에 구조했지.”
그냥 황무지에 있었다고?
내가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건? 철벅거리는 소리들은?
문득 그게 환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길을 잃어버리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처럼, 나 역시도 나쁜 꿈을 꾼 게 아닐까.
……광기가 있는 세상에서는 어느 게 꿈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네.
무릎 위에 놓여 있는 하얀 그릇이 묵직하고 뜨거웠다.
음식을 날라다 준 사람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하인은 움찔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르는 사람이 본대도 명백히 겁을 먹은 투였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지? 우리 처음 보지 않나?
나는 하인을 보다가 금발의 남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안절부절 못하는 중 혼자서만 평화로운 자세.
비딱하게 딛은 자세와 가볍게 뒷짐을 진 그를 응시하다가 문득 머리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인이 괜히 겁을 먹었을 리는 없고.
혹시.
설마.
황자는 굳은 날 보더니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왕성의 요리사가 간 크게 독을 넣었을 리 없지. 들게. 아니면, 왕세자인 나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인가?”
유릭 덴 메나디아.
현왕을 제외하면 가장 권력이 막강하다던 왕세자.
어쩌면 왕보다도 더 세력이 클지도 모르는 의뭉스러운 인물.
그리고
원작의 메인 빌런 되시겠다.
여기는 왕세자궁.
내게는 사자의 굴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좆됐다…….
* * *
원작에서 황자는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주연과 조연이 겪는 모든 사건의 뒤에는 황자가 있었고, 황자는 늘 음험한 속내를 가지고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등장인물이 고통 받는다? 황자의 계략이다.
등장인물이 사건에 휘말린다? 황자의 계획이다.
황자는 어쩌면 나쁜 의미의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아닌가 싶을 만큼 동생이 공들이던 인물이었다.
단순 독자인 나로서는 무슨 의도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유릭은 절대 선한 캐릭터가 아니라는 거다.
아니어야 하는데…….
“혹시 입에 맞지 않는가?”
“그런 건 아닙니다. 입 안이 이상하게 텁텁할 뿐입니다. 오래 자서 그런가봅니다.”
“그럼 요리사를 끌고 오는 게 좋은가?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으니 벌을 내릴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요리사는 그냥 일하게 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유릭은 좀 다른 놈인가?
그는 가장 먼저 사람들을 죄다 물렸다.
방에 나와 유릭만 남았는데, 그는 침대 옆에 굳이 앉아서 내가 음식을 다 먹길 강요했다.
일단 식사는 맛있었다. 깔끔하고 속이 편해지는 맛.
솔직히 황자만 없었다면, 그리고 이상하게 불러오는 배만 아니라면 솥 째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유릭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잘 먹었습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사를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감사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네.”
“어…… 그렇군요.”
아이고, 그러십니까.
나는 유릭과 아렌하이트의 관계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맹렬하게 회전시켰다.
유릭과 아렌하이트는 사이가 좋지 않지만, 유릭은 왕세자였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렌하이트를 복권시켜준 사람이기도 하고.
아렌하이트로서는 부모님의 철천지원수로 볼 수 밖에 없겠지.
예의는 차리되 좀 싸늘하게 대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얼마나 싸늘하게?
예의는 얼마나? 굽신거리지는 않도록 보여야 하는 거 아냐?
신분제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따지려니 막연했다.
아른트는 내 시종이지만 그리 엄격하게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레안드로스는 말이 간결하고 태도가 군더더기 없었지만 그가 예의가 바르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내가 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차리기로 결정했다.
“제가 전하께 입은 은혜를 보답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공작이 하르트만 성에 있는 걸로 그 역할을 다한 셈이지. 그래서 그런가? 공작을 동부에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어.”
어. 원래 성에 있어야 했나?
핑핑 돌아가는 머리가 즉석에서 핑계를 꾸며냈다.
“성의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가재도구를 챙겨 팔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다른 목적은 없었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성의 물건까지 내다팔다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군. 그대의 재기를 위해 왕실에서 줄 수 있는 도움을 알아봐야겠어.”
“네?”
“명색이 공작가인데, 그렇게 함부로 팔다가 남들 입에 오르내리면 어쩌나.”
유릭의 표정은 진심으로 가슴이 아픈 것처럼 보였다.
어라, 따지고 보면 네가 한 거 아니냐?
이거 뻔뻔하기 짝이 없네?
“소문이야 쉽게 퍼지고 사라지는 거니까요. 지금 당장은 제가 챙길 수 있는 사람부터 챙겨야죠.”
“그 마음 변치 않길 바라네. 그대와 함께 있는 이들 이름이 레안드로스와 아른트라고 했던가?”
유릭이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른트는 그대의 가문에서 기르던 아이니 그렇다고 해도, 자유기사를 주장하던 레안드로스 경이 스스로 하르트만으로 숙이고 들어간 이야기는 유명하지. 여태껏 충정을 바치고 있다니.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군.”
그랬어?
“인상이 깊은 사연이기는 합니다.”
“그래, 나까지 기억하고 있으니. 당시 나라가 떠들썩했는데, 정말 놀라웠어. 공작은 내가 레안드로스 경을 왕실 기사단에 복속시키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아는가?”
그랬다고?
캐릭터가 이야기하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종류였다.
원작에서 안 나왔던 주제인 걸까.
“미처 몰랐습니다.”
“당시 경의 나이를 고려해도 지나친 겸양이었어. 하지만 그가 공작부인의 호위를 자청하고 나섰을 때 내가 무슨 기분이었는지 알겠나?”
“많이 안 좋으셨겠군요.”
나라도 네 밑에서 일 안 한다.
내가 속으로 중얼거린 걸 모르는 유릭은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후로 공작저에서 칩거하는 경의 무용담을 들을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네. 참으로 인재였지.”
“앞으로도 잘 해줘야겠군요.”
“그래. 그래야지. 내가 원하던 걸 그대는 아무 어려움 없이 물려받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잘 대해주게.”
아, 이제야 좀 알겠다.
유릭은 아직까지 레안드로스를 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그와 함께 있는 나에게 와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레안드로스가 나서서 유릭의 밑에서 일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걸 유릭에게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서 답했다.
“네, 제가 최선을 다해서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제가 어머니 덕분에 얻게 된 인재이니 대우를 섭섭지 않게 해주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시겠지요. 전하의 말씀 덕분에 새삼 깨달은 것 같군요.”
“호오. 과연 그런가?”
“지금은 곤궁하지만 곧 나아지리라 믿습니다. 하르트만 성 연회홀 벽에 붙은 금박을 떼어 팔아서라도 그렇게 만들어야지요.”
“그대를 공작에 봉하기를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저 역시 전하의 진심어린 충고에 그저 황송할 뿐입니다.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하하하.”
“하하하.”
유릭과 마주보며 웃는 건 누가 봐도 화목한 광경이었다.
저를 복권해준 왕세자를 띄워주는 공작과 그런 공작의 아부를 기분 좋게 넘기는 왕세자.
하지만 당사자들만 알고 있는 불편한 기류.
유릭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그대가 인재를 대우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그러면 슬슬 레안드로스 경의 입궁을 허가해도 되겠나? 서로 얼굴을 봐야 안심할 것 같아서 말이야.”
“예?”
입궁? 뭔 입궁?
레안드로스가 왜 입궁을 해. 혹시 레안드로스가 왕성에 와 있다는 이야기인가?
유릭은 벙찐 내게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대를 구조한 지 두 주가 지났네. 레안드로스 경과 공작의 시종은 입궁 허가를 기다린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났어.”
“네?”
“굳이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냄새를 맡고 온 건지. 참 충직하다니까.”
두 주.
14일.
그동안 내가 실종 상태였다고……?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유릭은 활짝 웃었다.
“아, 그렇군. 하나 더 잊어버린 게 있어.”
“네?”
“생각해보니 아까 의원을 부르려고 할 때, 그대가 깨어난 것 같아서 얼결에 레안드로스 경의 입궁 허가를 내려버린 것 같아. 나이가 들면 중대한 일에 정신이 팔려 사소한 일을 자꾸 잊어버린단 말이지.”
잊을 게 따로 있지, 이 미친놈아!
유릭은 반짝반짝한 얼굴로 손수 침실 문 앞까지 가서 활짝 열어젖혔다.
왕세자의 호탕한 목소리가 침실을 울렸다.
“어서 오게, 레안드로스 경. 이렇게 보니 참 반갑지 아니한가. 나는 앞으로 일이 바빠서 빠지겠네. 이해해주겠지? 그대들은 느긋하게 해후를 즐기시게.”
하하, 요새 들어서 일만 많아지더군. 사람 좋게 웃던 왕세자가 사라지자 그 뒤로 심상치 않은 기세의 레안드로스가 드러났다.
과장 약간 보태서 온 몸에서 분노가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레안드로스의 뒤에 엄청난 속도로 창백한 서술이 쓰여졌다.
【레안드로스는 분노는 잘 참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이 망아지가 왕성까지 뛰어 들어가?
레안드로스는 공작부인이 살아있었다면 지금이라도 부탁을 거두어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안 움직이는 안면 근육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 사이에 눈빛으로 사람 죽이는 기술을 익혔나보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그의 목울대에 핏줄이 울컥 돋았다.
젠장. 농담하지 말걸.
나는 눈을 꽉 감았다.
“하르트만 공작 각하-!”
그 날 레안드로스가 내지른 사자후가 왕세자궁의 하인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는 건 먼 훗날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