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6
(15)
말 한 필이 검은 진흙 위를 날듯이 달려갔다.
한 번도 허우적거리지 않는 말은 굽이 빠지지도 않고 눈에서 붉은 불똥을 흘리며 진흙을 박찼다.
유릭은 말고삐를 바투 쥔 채로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다.
왠지 감이 좋지 않았다.
이제까지 조심스럽게 쌓아온 탑이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의 요사스러운 준마는 주인이 향하는 곳을 바로 알고 있었다.
동부의 구덩이.
황무지를 아예 덮어버릴 듯이 흘러내리는 미끈거리는 흙.
잔뜩 더러워진 거대한 축조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옅은 안개 같은 목소리가 더욱 선명히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그의 머릿속에서.
[자유…… 우리는 자유…… 별을 떠나…… 이 말라붙은 땅을 떠나…… 성간을 비행하는……우리의 신이여……]환희에 차 있을 법도 한데, 목소리는 여전히 궁상맞군.
유릭은 조소를 뱉었다.
구덩이를 둘러싼 가파른 벽의 아래에 도착한 말은 우뚝 멈춰 섰다.
마음 같아서는 구덩이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소매를 걷어 올린 그는 천천히 진흙으로 도배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장갑을 낀 손이라지만 더러워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기가 벽이 아니라면 포복이라는 단어가 어울렸을 것이다.
유릭은 그만큼 신중하게 벽을 타고 올랐다.
그가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 앞에는 무엇이든 잡아먹을 듯이 푹 꺼진 공동 대신 강철처럼 매끄럽게 빛나며 진득한 액으로 젖어있는 봉긋한 동산이 있었다.
유릭은 그것의 표면을 발로 꾹꾹 눌렀다.
진흙이 묻은 신발 밑창으로 미약한 맥박이 전해져왔다.
잉태.
새로운 부활.
유릭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한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날카로운 단도를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거리낌 없이 몇 번이고 요동치는 그것에게 찔러 넣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비명, 애원, 위협, 절망.
온갖 아우성이 유릭의 뇌 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몇 번이고 단도를 단단한 껍질과 살덩이 속으로 찔러 넣었다.
살아있는 것은 죽일 수 있다.
그것이 그가 살면서 깨우친 단 하나의 교훈이었다.
유릭은 계속해서 거대한 알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알 속에서 반쯤 녹은 채 꿈을 꾸고 있는조연을 만날 때까지.
그것을 보던 유릭은 기꺼이 조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무덤덤한 마부는 그의 주인이 벌써 귀환한 것을 보고 맞이하러 몇 걸음을 뗐다.
그러나 그는 멀리서부터 오는 주인의 모습에 멈칫했다.
온몸을 뒤덮은 악취 나는 진흙은 그렇다 치고, 옆구리에 끼고 있는 저건 대체 뭐지?
유릭 왕세자는 흐물거리며 심지 없이 늘어진 해면체 같은 걸 끌고 오고 있었다.
불쾌하게도 그것에게는 얼굴이 달려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동그란 부분이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전하, 그게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이거.”
그는 옆구리에 낀 것을 내려다봤다.
초라하게 쪼그라든 팔다리와 흐려진 이목구비는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을 법도 했다.
유릭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볍게 답했다.
“아는 거.”
본래라면 아는 사람이라고 해야겠지만, 지금은 사람의 수준이라고도 봐줄 수 없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유릭은 ‘그것’을 마부에게 휙 던졌다.
“왕성으로 돌아가자. 그건 적당히 마차 뒤의 함에다가 넣어두던지 해.”
“동부 황무지의 감찰은…….”
“다 끝났어. 피곤했지. 머리가 다 울리네.”
가져가지 말라고 앵앵 울부짖는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럽던지.
차라리 고막을 뜯어내고 싶었지만 별걸음쟁이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바로 울리는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유릭이 말에서 뛰어내려 마차로 향하자 끈적하고 이상한 생물체를 떠맡은 마부는 찝찝하게 물었다.
“그럼 다 끝나신 겁니까?”
“어느 정도는. 나머지는 돌아가서 해야겠군.”
유릭은 알아볼 게 많았다.
별걸음쟁이가 갑자기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던 원인이나, 변수를 찾고 싶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마부는 못내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고 있던 것을 명령대로 처리했다.
함에 자물쇠까지 달았으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밖으로 나올 수는 없으리라.
마부는 다시금 말에게 굴레를 씌우고 마부석에 올라타며 고개를 기웃했다.
방금 들어가시면서 뭐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는 좁은 산길을 벗어났다.
바퀴가 덜걱거리며 흙길을 달려 나갔고 주변은 원래 아무도 없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그러자 수풀 뒤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아른트였다.
동부 황무지 감찰? 황자가 직접? 그가 부리는 사람과 단 둘이?
수상하게 화려한 마차를 보고 본능적으로 숨은 게 다행이었다.
그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마차 바퀴 근처 수풀 뒤에서 납작 엎드려있던 아른트는 얼핏 들었다.
‘공작은 참 재미있네.’
유릭이 마차에 올라타면서 한 혼잣말이었다.
왕세자가 공작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아른트의 불길한 예감은 아렌하이트를 거쳐, 하르트만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렌하이트만 살아남은 것도 이상했다.
그가 간신히 공작위를 이어받은 것도 이상했다.
어떤 자비를 베풀더라도 아렌하이트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어야만 했다.
그게 하르트만 가문 전체가 받아야 했던 벌이었으니까.
늘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거기에 의문을 제기할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아렌하이트가 살아 있으니까.
이따금씩 광증이 도져 난폭해지고 말도 어눌한 도련님이었지만 어쨌든 살아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최근에는 심하게 아팠던 것만 빼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가고 있었으니 모든 게 신이 보살피신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천운이 아니라면.
현실에 집중해서 배경에 눈을 돌린 대가가 이런 거라면.
아른트는 자신이 왔던 길로 뛰어갔다.
지금은 자신이 아니라 레안드로스가 필요했다.
이를 악물고 달리던 아른트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는지!”
* * *
왕의 길은 왕족이나 왕족의 인가를 보유한 전령이 아니고서야 달릴 수 없는 길이었다.
샛길도 지름길도 없는 길은 곧바로 각 지역의 중심부와 이어져 있었다.
평범하게 가면 여드레, 왕의 길로 가면 사흘.
올곧게 앞을 향한 길을 이틀째 달리던 차에 마차가 드디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말이 거품을 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왕의 길에는 일정 거리마다 말을 교환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왕성에서 파견한 관리자가 말을 돌보고 방문자가 탄 말의 교환을 돕는 제도였다.
마부는 낯익은 건물 앞에 마차를 세우고, 관리인에게 증서를 내밀었다.
“왼쪽의 갈색 말만 바꾸도록 하지.”
“네, 여기서 잘 보살피도록 하지요. 저 검은 말은 바꾸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일 없소.”
“그럼 잠시 편자만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잠시만, 자암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관리인은 일꾼 몇을 데리고 왔다. 일부는 기력이 다한 말을 끌고, 남은 이들은 마차에 묻은 흙을 닦기 시작했다.
“기사님, 잠시 이 뒤에 붙은 짐을 떼야 할 듯합니다. 흙과 돌이 이음매까지 들어간 것 같습니다.”
마차의 뒤에는 짐이 여럿 붙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마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 애지중지하는 것이라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
마부는 손을 들어 일꾼들의 행동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갔다.
빠른 청소를 위해 최소한의 짐만 덜어내기 위함이었다.
달그락.
그러나 그가 짐더미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희미한 소음이 들렸다.
기사는 일꾼들을 돌아봤다.
“잠시.”
……일꾼들은 숨을 멈췄다. 사방은 조용했다.
잘못 들은 건가?
하지만 의심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들릴듯 말 듯 끼익끼익, 달각달각하는 소리.
이 상자 속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나보지.
싸늘한 눈으로 각양각색의 상자를 훑어보던 마부는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었다.
일꾼들은 새파랗게 질려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상자를 하나하나 살피던 마부가 일순 손을 치켜들었다.
콰직!
빠르고 간결한 몸짓이었다.
흑색 상자의 뚜껑을 부순 검은 바닥까지 뚫고 들어갔다.
바닥 밑으로 튀어나온 검의 끝에서 천천히 붉은 액체가 아롱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일꾼들과, 어느새 온 관리자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마부의 일을 떠맡은 냉혹한 기사는 힘도 들이지 않고 검을 뽑아냈다.
검신을 타고 달라붙은 점액과 피가 함께 끈적하게 늘어졌다.
“상자를 열어라.”
“네, 네…….”
무감정한 목소리에 졸지에 봉변을 당한 일꾼은 주춤거리며 상자로 다가갔다.
이 상자를 열면 어떤 끔찍한 광경이 드러날지 모른다.
하지만 당장 피투성이 검을 들고 있는 저 기사가 더 무서웠다.
결국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손을 덜덜 떨며 상자의 잠금쇠와 걸쇠를 열었다.
철컥, 철컥하는 소리가 들리고, 상자의 뚜껑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열렸다.
“이건……!”
상자를 둘러싼 이들 사이로 침묵이 찾아왔다.
갑자기 조용해진 바깥이 궁금했는지, 유릭 왕세자가 마차 문을 열고 내려왔다.
유릭이 땅을 딛자마자 본 건 얼어붙어서 새파랗게 질린 열 쌍의 눈이었다.
“음?”
“……전하, 이쪽으로…… 와보셔야 할 듯합니다.”
“내가?”
유릭은 자신의 측근은 담대한 이들로만 꾸려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태평하게 걸어가 열린 상자를 확인했다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피와 점성이 가득 엉긴 상자 안.
얼굴도 없던 끈적한 애벌레 대신 한 사람이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그의 배에 뚫린 구멍에서는 쉼 없이 혈액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구멍은 천천히 아물었다.
마치 살끼리 서로 찾아가기라도 하듯 느리지만 확실하게 흡착했다.
이윽고 사라진 상처는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죽음 같은 침묵.
상자 안의 사람은 느리게 눈을 떴다.
벌꿀색의 혼탁한 눈이 초점을 잃었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목격한 이들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이것은 괴물인가, 사람인가?
내가 본 게 맞나?
내가 미친 건 아닌가?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유릭 왕세자였다.
그는 끈적한 상자에서 제대로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 이를 들어올렸다.
더러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손수 마차 실내에 앉혀준 유릭은 함께 마차에 타려다가 그의 마부를 돌아봤다.
“망토를 하나 가져오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아무도 이 일을 모르면 좋겠는데.”
“……명 받들겠습니다.”
마차가 흔들리며 문이 닫혔다.
마부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뒤에서는 이제 막 충격에서 벗어난 일꾼과 관리자들이 웅성거렸다.
“기, 기사님. 방금 저희가 본 건 대체.”
“…….”
“아, 걱정, 걱정 마십시오. 무덤까지 함구하겠습니다. 여기 다 입이 무거운 자들이니.”
관리자의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들 중 서넛은 은밀히 소문을 퍼뜨릴 것이며, 그 중 둘은 그 ‘괴물’이 왕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말없이 검을 쥔 채로 일꾼과 관리자에게 돌아섰다.
약 반 시간이 지난 후.
마차는 사람이 사라진 핏빛 마구간을 뒤로 하고 다시금 왕의 길을 달려 나갔다.
저 너머 낮은 산 위로, 지독하게 높은 왕성 첨탑의 꼭대기가 흐리게 보이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