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15
(14)
아른트는 묘하게 개운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약간 늦잠을 잔 것 같은데.
산에서 해는 늦게 뜨고 빨리 지니까 당연한 건가.
그는 딱딱한 바닥에서 뒹굴기 싫어 벌떡 일어났다. 이쯤이면 공작님을 깨우고, 세숫물 시중을 들어야…….
“공작님?”
……하는데, 아렌하이트가 자던 자리가 텅 비어있었다.
망토는 곱게 깔려 있는 걸 보니 스스로 이동한 것 같은데. 대체 어딜 가셨담? 혼자 볼일을 보러 가셨나.
아른트는 느리게 자리를 정리하고 불을 새로 붙였다. 레안드로스 경도 깨웠다.
공작님이 오면 바로 길을 떠날 셈이었다.
하지만 공작님은 계속 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이쯤이면 볼일을 보려고 간 게 아니었다.
레안드로스 역시 사태를 눈치 챘는지 모닥불을 흙으로 덮고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공작님께서 어디를 가셨든 여기를 빙글빙글 돌고 계실 테니까요.”
그래, 진짜 그나마 다행이다.
아른트와 레안드로스는 외길을 따라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길이 낯설어졌다. 분명 어제 봤던 익숙한 길은 아니었다.
레안드로스와 아른트의 발길이 조금씩 빨라졌다.
길은 똑바르게 나 있었고, 길 양쪽에서 자라던 수풀과 나무도 어제와는 전부 달랐다.
마침내 그들이 달리다시피 해서 길을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떡하니 서서 그들을 반기고 있는 낡은 나무 표지판과 마주했다.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간 마을에서 대뜸 아른트가 소리 질렀다.
“공작님! 여기 계십니까? 공작님!”
뭔가 이상하다.
마을은 소름끼치게 조용했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는데도 길가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
레안드로스가 무작정 여관을 방문했지만, 제법 넓은 식당에는 손님은커녕 주인까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른트는 돌아다니면서 민가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민가도 상가도 죄다 문을 닫아놓은 채 반응이 없었다.
이래서야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통째로 버려두고 도망간 것 같지 않나?
마을을 한 바퀴 돈 레안드로스와 아른트는 광장에서 마주쳤다.
“사람은?”
“없었습니다. 개미 새끼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그쪽은요?”
“마찬가지군.”
덧창의 틈 사이로 들여다본 집 안은 평범했다.
식기와 가구가 있었고, 어떤 집은 꽃을 장식해두기도 했다.
급하게 도망갔다거나 하는 조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자기 전에 정리를 깨끗이 해둔 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집에 사람이 없을 수 있지?
심지어 여관은 그냥 열려 있었다.
레안드로스와 아른트는 정리되지 않는 찝찝함과 불쾌함, 불안감을 느꼈다.
우르릉.
하늘에서 희미한 천둥소리가 울렸다.
아른트가 올려다봤지만 먹구름은 없었다.
마른하늘에 비가 내리나? 그가 고개를 기울였을 때, 레안드로스가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으아악!! 저기요!!”
미친 거 아니야!
비명과 함께 땅바닥을 나뒹군 아른트는 벌떡 일어나서 무도한 기사를 노려봤다.
하지만 흙투성이가 된 아른트를 두고 레안드로스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하늘이었다.
아른트도 함께 따라서 고개를 들자 눈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대기가 울렁거리며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바닥이 움푹 파인 채 알 수 없는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이게…….”
“뭔가 있군.”
레안드로스는 검을 뽑아들려다 말고 아른트를 냅다 짊어지고 달렸다.
“으아! 아! 아!”
아른트는 레안드로스에게 덥썩 들린 채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레안드로스가 아무리 재빠르다고 해도 멀쩡한 성인 남성 하나를 짊어진 채로 뛰어다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알 수 없는 폭발이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매섭게 추격해왔다.
“뭐가 자꾸 따라와요! 따라온다고!”
“조용히 좀 해. 잘 알고 있으니까.”
레안드로스는 빼들은 검을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계속 달려야 했다.
당연했다.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베든 말든 하지!
레안드로스는 하늘을 노려보다가 문득 가장 가까운 민가로 뛰어갔다.
발길질 몇 번에 문이 덜렁거리며 열렸다.
안으로 몸을 던지자, 아슬아슬하게 문간에서 퍼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패인 것을 마지막으로 고요해졌다.
“저, 저건 뭡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자꾸…… 제가 이상한 겁니까?”
아른트가 얼이 빠져서 더듬거렸다.
레안드로스는 말없이 얼굴을 구겼다. 아른트의 말처럼 제 눈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티팩트를 사용한 마법인가? 그것도 아니면 사술?
모습을 숨긴 원거리 공격은 익숙했지만, 이런 식으로 광범위하게 쫓아오는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인기척도 발소리도 없이, 백주대낮의 마을 내부 전체를 겨냥할 수 있는 공격이라.
“잠시 여기 있으면서 동태를 살피는 걸로 하지.”
“여, 여기는 안전한가요?”
“적어도 지금 당장은.”
천장을 뚫고 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레안드로스는 아른트에게 없는 걱정을 만들어 떠안길 생각은 없었다.
아렌하이트는 여기에 없고, 가까스로 찾아낸 마을은 텅 빈데다가, 정체불명의 습격까지.
나가면 바로 공격당할까?
레안드로스는 잠시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고보면 자신이 아른트를 옮겼을 때는 자신을 겨냥하고 따라왔었지.
그럼…….
“여기서 갈라져야겠군.”
“네? 경, 제정신이십니까? 방금까지 있던 일은 다 잊어버리셨습니까? 갈라지긴 뭘 갈라집니까? 저희는 죽어도 하나예요!”
레안드로스는 어쩐지 불쾌해졌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공격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일 거다. 그러니 내가 미끼가 되도록 하지.”
“어떻게 그걸 아시는 겁니까?”
“설명을 해야 하나?”
만일 공격을 하는 사람이 둘이었다면 아른트는 진작에 주검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라면?
아른트를 들고 움직이고 있던 자신을 노릴 수밖에 없었겠지.
레안드로스는 겨우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난 아른트에게 바깥을 가리켰다.
“우선 여기를 벗어나. 마을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내가 붙들고 있도록 하지.”
“가능한가요?”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하나뿐. 다시 돌아올 때는 이정표를 확인하도록 해. 만일 이정표가 없다면…….”
불현듯 어젯밤 태연하게 불을 피우고 잠자리 위에 누워 있던 아렌하이트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태연했을까?
그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없다면 큰일이겠지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십니까!”
“빨리 가는 게 좋겠군. 공작님이 근처에 계시기라도 한다면 재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아른트는 뭘 상상했는지 몰라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안드로스는 한 걸음 앞에서 주변을 살폈다.
허공에 이글이글한 아지랑이가 소용돌이치는 건 여전했다.
저건 무슨 징조일까.
밖으로 뛰어드는 레안드로스의 망토가 부풀자 동시에 공중에서는 희미하게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고였다.
아른트는 눈을 딱 감고 제발 이 환장할 동부에서 공작님만큼은 무사하시기를 빌었다.
* * *
수도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왕의 길.
잘 정비된 길을 막 벗어난 마차의 황금색 바퀴가 덜컹거렸다.
돌부리와 잡초가 드문드문 나 있는 길에 마부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산길을 내달리는 마차는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호위대나 병사가 뒤에 따라붙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마차의 주인이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금과 적색이 찬연히 빛나는 마차는 얼마간 달리다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마침내 마차가 갈림길 앞에서 멈춰 섰다.
갈림길 사이에 낡은 이정표가 덩그라니 세워져 있었다.
왼쪽에 쓰여 있는 글씨는 문대지고 흐려져서 읽기 어려웠다.
그래서인지 오른쪽에 쓰여 있는 ‘마을 이름’이 눈에 잘 들어왔다.
마부가 그 표시를 의뭉스럽게 보는 동안, 마차 문이 덜컥하고 열리더니 한 사내가 뛰어내렸다.
긴 금발을 소탈하게 하나로 묶고, 손에는 검은 장갑을 낀 훤칠한 청년이었다.
얼굴은 묘하게 창백했지만 눈만은 생기로 가득 차 붉게 빛났다.
“도착했군. 수고했네. 돌아가면 휴가라도 줘야겠어.”
“황송합니다, 전하.”
마부는 지나치게 공손하게 말하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포갰다.
“여기서부터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말안장을 얹게.”
마차를 끌던 말 중 흑마가 끌려나왔다.
금과 황금빛 술로 이루어진 굴레와 안장을 단단히 채비시킨 마부는 고삐를 ‘전하’라고 부르던 이에게 건넸다.
“이르신 대로 대기하겠습니다.”
“수도로 돌아가도 좋네.”
“전하를 보필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좋도록 해.”
흑마에 가볍게 올라탄 이는 미미한 웃음과 함께 왼쪽 갈림길의 왼쪽으로 달려 나갔다.
뒤로 튀기는 흙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라진 그를 보던 마부는 다시 옷을 단정히 했다.
마부석에 올라가 있으면 앉을 수라도 있겠지만, 돌아온 왕세자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서 있는 게 나았다.
마부는 왕세자가 언제 귀환하는지도 모르면서 무한정 대기하기 시작했다.
충직한 마부를 뒤로 한 유릭 왕세자는 굽이치는 길을 달렸다.
마을로 향하는 길이 어느 정도 닦인 것과 상반되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말도, 유릭도 이 편을 더 좋아했다.
사람 발길이 제대로 닿지 않아 모든 게 우거지고 무성한 야생의 길.
흑마는 승마를 즐기는 주인의 기분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크게 울었다.
유릭이 먼 수도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동부 황무지 개발에 대한 감찰의 건.
왕성부터 크고 작은 상단까지 골고루 투자한 대규모 채굴은 모두의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구덩이에서 쏟아지는 마수 덕분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동부의 골칫덩이로 전락할 뻔 한 구덩이였다. 하지만 그것의 가치를 새롭게 확인한 것은 누구도 아닌 유릭 왕세자였다.
저 아래에서 마수가 쉼 없이 솟구쳐 나온다면, 그 수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을 경우 어마어마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싼 마수의 심장과 가공 혈액에 혹한 사람들은 앞다투어 돈을 쏟아 부었다.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은둔한 마탑에서 실력 있는 마법사를 초빙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렇게 돈을 부은 만큼 개발은 잘 진행되는 듯 했다.
구덩이를 둘러싼 건축물을 만들고, 그를 통해 나오는 마수를 조절하고, 체계적인 사냥을 통해 마수의 부산물을 정제한다.
결과물이 하나씩 나오자, 그걸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인력과 돈을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동부 황무지로 보내며 투자를 거듭했다.
황무지는 구덩이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아니, 번성하고 있었다.
‘좀 더 유예시간을 줄 걸 그랬나.’
유릭 역시 세간에 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은근히 그와 접촉해 구덩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상단주들이 몇인데, 유릭이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유릭은 자신의 집무실에 산처럼 쌓인 편지를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이번 ‘감찰’이 끝나고 나면 그것들을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전부 불쏘시개로 쓰는 게 유일한 사용처겠지.
길의 끝, 초록색 장막이 걷히자 기묘한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유릭은 저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검은 땅과 반쯤 건축하다 만 구조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저건 뭐지.”
유릭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삐그덕거렸다.
이 풍경은 그가 예상하던 것과 약간, 아주 약간 달랐다.
구덩이에서 검은 진흙이 느릿느릿 흘러넘치며 벌판을 새까맣게 덮고 있었다.
하지만 구덩이의 입구에서부터 봉긋하게 부푼 검은 알은…….
다음 순간, 유릭은 말을 달려 가파른 경사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