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4
(03)
이건 꿈이었다.
유예성은 발밑으로 펼쳐진 작은 풍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는 화사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진 성의 실내였다.
소파와 테이블, 과시할만한 인테리어를 보면 응접실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 같았다.
아마 주인 부부인 듯한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앉아있었고, 고용인이 절제된 손놀림으로 차를 따랐다.
구석 바닥에서는 아렌하이트가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누가 보면 아주 완벽한 가족이 누리는 일과를 찍어놓은 듯했다.
그림을 그리는 아렌하이트가 5살배기가 아니라 적어도 청소년이라고 보여지는 점을 제외한다면.
-이번에도 실패인 건 분명해.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못 찾은 곳이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돈을 쏟아붓기만 하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중년의 남성이 괴로워했다.
그 앞에는 중년의 남성보다 조금 더 젊은 여성이 앉아서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급할 것은 없어요. 우리가 찾지 못한다는 건, 남들도 찾지 못한다는 거니까.
-나는…….
-느껴져요. 아직 아무도 찾지 못한 채 어디선가 잠들어있을 ‘그것’이. 아직 시기가 안 됐을 뿐이에요. 별이 올바른 자리에 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그것?’
유예성은 곰곰이 생각했다.
아렌하이트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면 전 공작 부부겠으나, 그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소설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에서는 부부가 죽어있었으니까.
-나는 포기하지 않아요. 하르트만의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돈 따위는 하찮고 우스운 것이죠.
-시간이 지날수록 아렌하이트가 힘들어질 수 있어.
-감히 이 나의 배를 빌려 태어난 아이예요. 힘들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여자는 손을 까딱했다.
마치 동물을 부르는 투였다.
가볍기 짝이 없는 행동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툴게 그림을 그리던 아렌하이트는 그 손길에 후다닥 달려왔다.
굵은 진주와 에메랄드 반지를 낀 손이 창백하고 하얀, 보드라운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말해보렴, 아렌하이트. 어미가 널 힘들게 하니?
-아뇨, 어머니.
즉답.
일 초도 망설이지 않는 아렌하이트는 비정상적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따라 미소 짓는 여자는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렇다면 무리한 걸 시킨 적이 있었니?
-아뇨, 어머니. 착한 아이가 되려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렇지. 너는 장차 커서 위대한 계획의 일부가 될 거야. 어쩌면 이 어미가 알려준 것보다 더, 더 위대해질지도 모르지.
-착한 아이가 되면요?
-그럼, 착한 아이가 되면. 자, 저기 굴러다니는 종이는 다 집어넣으렴. 오늘은 손님이 많이 오실 거란다.
-손님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지?
아렌하이트는 옅은 갈색 눈을 도르륵 굴렸다.
-어떤 손님이에요? ‘나쁜 손님’인가요, 아니면 ‘착한 손님’인가요?
유예성은 순간 꺼림칙함을 느꼈다.
-나쁜 손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벌레예요! 벌레는 알을 치기 전에 없애요!
-착한 손님이라면?
-착하게 굴어요, 웃어줘요!
-잘 알고 있구나. 거기, 너. 이리 와서 소공작을 데려가 단장시켜라.
하녀가 달려와 공작부인에게 예를 표했다.
아렌하이트는 하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지만, 아이처럼 그녀의 앞치마를 잡고 따라갔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유예성은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
다 큰 애를 아기 취급하는 건 정상적인 부모가 아니다.
그리고 아이가 나이에 맞지 못한 행동을 보이는 것 역시 올바른 성장 단계가 아니었다.
하르트만은 무슨 가문이었지?
시야가 마치 카메라처럼 움직였다.
허름한 오두막의 안에 있는 세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른트는 아렌하이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도련님, 제발 한 입만 드셔보세요. 네?
-어머니께 가야 해.
-지금은 갈 수 없어요. 나중에 꼭 데려다드릴게요.
-어머니께 가야 해.
-도련님!
고장 난 인형처럼 중얼거리는 아렌하이트.
한눈에 봐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아렌하이트의 시선이 방 안을 정처 없이 훑다가 스윽 레안드로스에게 옮겨갔다.
-레안드로스. 당신은 알고 있잖아.
-…….
-데려다줘.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왜?
-그게 바로 공작부인께서 내리신 명령이었습니다.
아렌하이트의 넋 빠진 표정과 레안드로스의 꽉 쥔 주먹이 겹쳐졌다.
유예성은 본 적 없는 장면에 당황했다.
어째서 이런 게 보이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약탈. 강탈. 기억. 내 몸. 소유. 전능. 기회. 미래. 세상. 어머니. 별. 궤도. 나. 내 몸. 권리. 상실. 패배. 무력. 잔인함. 희망.】
내 것이 아닌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몰아쳤다.
폭풍우가 치는 망망대해 속의 작은 조각배.
그게 지금 나의 심정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생각에 휩쓸리기 직전에, 누군가가 속삭였다.
“내 몸을 감당할 거라면, 내 운명도 감당해야지.”
누구?
의문과 함께 유리창이 깨진 것처럼 파편적인 장면이 부스러져 내렸다.
그중 가장 큰 파편이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커다란 촛대.
날카로운 쇳덩이의 비명.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남자.
괜찮다는 위로와 함께 내밀어지는 손.
유예성은 놀라서 크게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 * *
“도련님!”
“공작님이 맞는 단어다, 아른트.”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눈을 깜박이자 온화하게 밝아진 천장과 두 사람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안뜰에서 쓰러지셔서 걱정했습니다. 들고 계시던 것 때문에 다치실 뻔했습니다.”
“내가 그랬어?”
“아마 최근 무리하셨던 게 화근이 아닐까요. 왕성에서도 몸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아아.”
아렌하이트는 짧게 머물던 왕성에서도 시름시름 앓았다고 들었다.
어쩐지 별 이상한 꿈을 꿨더라.
곰팡내가 나는 침대에 몸을 묻자 아른트가 기다렸다는 듯 식사를 가져왔다.
낡고 투박한 그릇에 담긴 불린 고기 수프였다.
“아른트.”
“네, 공작님.”
“그게…….”
이런 걸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그냥 개꿈일 뿐인데.
결국 하려던 말을 삼키고 그릇을 받아들었다.
“잘 먹을게.”
아른트의 뿌듯한 미소가 스푼 뒤로 따라왔다.
그래, 이러면 된 거지 뭐.
아른트와 레안드로스의 조언을 수용해 당분간 외출은 자제하기로 했다.
이 몸의 체력이 엄청나게 떨어진 상태일 수도 있었다.
결국 사냥은 레안드로스에게 일임하고, 아른트와 나는 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보수와 유지를 실행했다.
유지보수하고 해봤자 아른트와 함께 돌아다니며 나의 조언을 구하는 것밖에 없었다.
실질적인 노동은 전부 아른트가 했기 때문에 나는 한가했다.
그렇게 레안드로스가 두 번째 사냥을 나간 날.
아른트와 나는 공작저의 연회장을 보수하고 있었다.
“홀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앞으로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입니다.”
“부서진 것을 치우는 정도는 괜찮겠지.”
아른트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홀을 쭉 둘러봤다.
홀 역시 텅텅 빈 상태로, 용도를 알 수 없는 테이블이 몇 개 쓰러져 있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끝이 다 이런 거겠지 싶지만.
‘젠장. 돈 될 게 하나도 없잖아.’
문제는 비어도 너무 비었다.
성이니까 뭔가 내다 팔 수 있는 거 하나라도 있었겠지 싶었는데 다 착각이었다.
사람이 고기만 뜯고 살 수는 없다.
사용하고 소비해야 하는 필수품만 해도 몇 개야?
그런데 그걸 마련할 1차적인 방안이 와장창 무너진 거지.
“아, 두야…….”
“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이를 어쩐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아른트는 착실하게 움직이며 먼지나 나뭇조각, 떨어진 돌 파편 등을 치우고 있었다.
연회장이 넓어서 혼자 치우기에는 벅찰 텐데도 저렇게 성실한 움직임이란.
어차피 다 무너진 성인데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고 말할까.
이참에 다른 곳을 둘러보려 발길을 돌리던 순간이었다.
기묘한 기시감.
발목을 꽉 붙드는 힘에 나는 다시 아른트를 쳐다봤다.
아른트는 으스러진 창틀의 먼지와 파편을 걷어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이상할 게 없었지만, 내 시선은 아른트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촛대.
벽에 위태하게 매달린 촛대.
홀의 벽과 기둥마다 빼곡하게 박힌 촛대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왜 갑자기 꿈이 떠올랐을까.
왜 꿈속의 남자가 아른트라고 생각했을까?
“아른트!”
“네, 공작님.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 연회홀은 너무 넓은 것 같으니까 더 작은 방부터 할까.”
“하지만 아까는 넓은 장소를 먼저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생각이 바뀌었어.”
아른트는 내 변덕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였다.
아른트는 결국 내 고집에 못 이기고 나와 홀의 문을 다시 잠그기 시작했다.
“홀에는 별 게 없으니 안 잠가도 될 것 같네요.”
제 딴에는 너스레를 떨려고 한 소리였다.
하지만 그 순간.
쨍!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른트가 놀라서 문을 열어젖히자 홀 바닥에는 촛대가 데구루루 굴러다녔다.
한눈에 봐도 묵직한 촛대는 날카롭게 깎아 세공한 덕분에 찔리면 큰일이 날 듯했다.
아른트는 침입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른트가 서 있던 자리 바로 위에 있던 촛대다.
아른트의 머리에 맞았더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큰일은 아니군요. 보수를 할 때 촛대도 더 단단하게 고정시켜야겠습니다.”
“…….”
“공작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찢어질 뻔했습니다. 운이 좋았어요.”
“……아냐.”
“예?”
“운이 아냐. 어디선가 봤어.”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아른트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어디서 보셨단 말씀이십니까, 공작님?”
“꿈에서.”
대체 그 꿈은 뭐지?
이제는 흐려진 꿈의 내용이었지만 소름 끼치고 놀랐던 감정만큼은 선명하게 남았다.
누가 들으면 정말로 미쳤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을 소리였다.
나는.
꿈에서 뭘 봤던 거지?
“공작님.”
가볍게 떨리는 음성이었다.
아른트는 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울긋불긋한 감정이 함께 도색되어 있었다.
두려움.
경외.
의혹.
경계.
추측.
아른트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의 목소리가 잠겨서 나왔다.
“처음으로, 계시를 꿈꾸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