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84
(83)
이게 무슨 소리야.
“레안드로스 경.”
레안드로스를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러자 그는 뭔가에서 깨어난 듯 멈칫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실언했습니다. 북부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로가 쌓였나봅니다.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어? 어, 그래.”
레안드로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돌아섰다.
뭐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레안드로스가 사라진 텅 빈 복도에서 잠시 생각했다.
평소에 이성적이라면 유릭 둘째가라 할 정도로 냉정한 녀석이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만큼 힘든 일이 있었나?
북부에 다녀와서 피곤하기만 한 탓인가?
북부에서는 거의 하루걸러 사흘 내내 레안드로스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죽었다 깨어난 지 한참 지나서 서술이라고는 쥐똥만큼도 안 보였다.
뭐가 문제일까, 북부에서 뭔가 달라진 건 없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
레안드로스 머리 위에 떠 있던 붉은 숫자.
그 수치가 북부에서 보냈던 두 달 내내 줄어들고 있던 게 기억이 났다.
숫자가 줄어들수록 레안드로스도 말수가 적어지거나 우울해지곤 했지.
그 숫자는 인물의 기분이나 감정을 의미하는 건가?
그렇다고 해서 더 올라간 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레안드로스에게 조만간 진짜 휴가라도 내줘야겠다.
그러면 기분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레안드로스를 보내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유릭은 여전히 싱글벙글한 채였다.
이 자식, 왜 이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대.
“그 사이에 퍽 재미있는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아니, 자네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아서. 공작이 이리 돌아온 걸 보면 그다지 영양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나 보지?”
“글쎄요. 저희끼리는 영양가 있는 합의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원래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앉자 유릭은 자세를 고쳤다.
그는 차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를 넘기면 우선권을 주겠다고 했어. 그게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까요?”
“생각해보게. 원래 북부 자치권은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보장받던 권리일세. 그리고 대대로 북부 변경백에게 통치자의 권리와 함께 내려지던 것이었지.”
“다시 말해서, 공작인 저는 북부 광산에 대한 권한이 없다?”
“잘 이해하는군. 북부 권한 임시 양도는 미스릴 광산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만능 증서가 아니라는 뜻이야.”
유릭은 6살 난 아이에게 설명해주듯 조곤조곤 짚어나갔다.
하지만 그 기저에는 비웃음이 슬쩍 깔려 있었다.
“게다가 미스릴 광산은 북부 변경백 가문의 소유니, 그가 후사도 없이 사망했다면 당연히 국가 귀속이지.”
“변경백 가문 소유이긴 하나 광산 채굴은 왕성과 함께 해 오던 일이 아닙니까?”
“그래도 여전히 광맥 자체를 비롯한 토지 소유권은 변경백 가문에 있으니.”
오호라.
“그럼, 후사가 중요한 부분입니까?”
“내가 알기로 후작은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사생아도 하나 없었다네. 게다가 변경백의 성에서도 사람의 흔적 하나 찾을 수 없다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 말대로입니다.”
“그러니 곧 국가로 귀속될 광산인데, 공작이 아무리 연치가 어리다 해도 아무 대가로 치르지 않고 광산을 달라 떼를 쓰면 안 되지.”
떼?
이게 떼로 보이나?
유릭은 내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뭔가 오해하는 게 있으십니다. 제가 언제 떼를 썼다고 그러십니까?”
“그게 억지, 떼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면 뭐겠나.”
“왕세자 전하. 이건 하르트만 공작으로서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
근거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내가 북부에서 두 달 넘게 처박혀있으면서 이런 것 하나 대비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오만해서 한 대 패버리고 싶은 얼굴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북부 변경백에게 북부를 부탁받았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가 죽기 직전에 저를 양자로 들이겠다 했으며 저는 거기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호오. 증인은?”
“그 자리에 있던 레안드로스 경과 루셀 경, 그리고 아멜리아 양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의 사람들은 전부 사망했기 때문에.”
구두계약은 서면으로 계약을 입증하지 않아도 상호간의 합의가 있다면 이루어진다.
이 원칙이 여기서도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잡아떼면 그만이다.
죽은 사람을 불러내서 물어볼 수도 없고,
게다가 증인이라면 이쪽에서 얼마든지 날조할 수 있다.
자고로 이런 시대에는 사기 선동 날조를 선빵 치는 놈이 이기는 거다.
“변경백이 그대에게 양자 입적을 입증할 만한 물품을 맡기기라도 했는가?”
“왕세자 전하, 그게 아니라면 제가 대체 어떻게 북부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되었겠습니까?”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덮었더니 제법 그럴듯해졌다.
유릭은 찻잔 안을 들여다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고, 나는 북부에서 가지고 온 물건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진실되게 사기를 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윽고 유릭이 말했다.
“좋아. 그런 걸로 하지. 물론 광산을 그냥 내어줄 순 없어. 개발권에 대해서는 왕실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네.”
“하실 겁니까?”
“아니. 하지만 자네도 나도 원하는 게 분명하니 서로 양보하기로 하지.”
“양보라면?”
“레안드로스 경을 왕성에 임대기사로 파견시켜주게.”
임대기사賃貸騎士.
대가를 받고 전력을 빌려주는 소속기사.
과거에는 병력이 부족한 영지에서 대가를 치르고 타 영지의 기사를 빌려오기도 했었다.
물론 용병업이 부흥한 지금에 이르러서 많이 사라진 풍습이었지만, 영주끼리 친분이 있는 경우에는 서로에 대한 친교의 의미로 기사를 빌려주기도 한다.
북부 변경백과 양자결연을 맺기로 한 건 문제 삼지 않기로 했나?
그것보다 레안드로스를 홀랑 가져갈 것처럼 굴더니.
잠깐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거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릭이 제시한 조건은 제법 받아들일 만했다.
레안드로스는 하르트만 공작가 소속으로 왕성에 힘을 보태주는 형식을 취할 테니.
물론 그가 실수하면 공작가에서 보상해야 하고, 공을 세운다면 왕성의 것이 되겠지만.
그건 지금 사소한 문제고.
“기간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년은 어떤가?”
“그 사이에 레안드로스 경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자네가 상상하는 그대로라네.”
적당한 시련, 적절한 보상.
레안드로스를 오랫동안 왕성에 둘 수는 없었다.
유릭 옮으면 큰일 난다.
“제가 선택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저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니까요.”
“그럼 레안드로스 경이 승낙하기만 하면 협상은 이루어지는 건가?”
“예, 그가 그러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레안드로스가 미쳤다고 왕성에 가겠냐.
사실 우리 성에서는 유릭과 같이 동행하느니 바퀴벌레를 갈아 마시겠다고 할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답을 내놓게. 경은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공작이 가서 물어보도록 해. 그게 더 공평하지 않겠나?”
“왜요? 제가 가지 말라고 협박할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아니지. 공작은 미스릴이 필요하잖아. 그리고 내가 가면…….”
“……전하께서 가시면?”
유릭이 턱을 괴고 있다가 씩 웃었다.
“설득하다가 욱하는 마음에 레안드로스 경을 망가뜨릴 수도 있잖나. 나도 그건 싫다네.”
그래, 미친놈 성질 어디 안 간다더니 그럴 줄 알았다.
유릭이 내 표정을 보고는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 * *
유릭은 북부로 향하기 전에 공작저에 잠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옷과 묘하게 허물없는 태도 덕분에 공작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손님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아른트는 혼자서 비상이 걸렸다.
“대체 왜 여기 계신대요? 언제까지 계시는 겁니까? 하루? 이틀? 사흘나흘닷새엿새이레?”
“내가 레안드로스와 이야기해보고 결과를 말해주는 즉시 돌아가겠지.”
“그럼 언제쯤 말씀하실 겁니까?”
“……보고.”
내 잠자리를 정리하는 아른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진짜로 이건 좀 두고 봐야하는 문제다.
레안드로스가 피곤하다며 혼자 들어간 이후로 또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예 날 마주치지 않으려고 작정했다는 티가 풀풀 났다.
그러니 나도 섣불리 대뜸 찾아갈 수가 없었다.
가서 무슨 문전박대를 당하려고.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속 시원하게 가서 말씀 하세요. 공작님이 뭐 꿀릴 게 있습니까? 공작님이신데.”
“그야 무력으로 꿀리지……. 경은 통나무를 맨손으로 찢어.”
“아…….”
“어쨌든 그게 문제는 아니야. 사실 찾아가려면 얼마든지 찾아갈 순 있거든. 근데 무슨 소리를 들을지 무섭다고 해야 하나.”
아직도 레안드로스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다른 사람이 다 사라지면 내가 죽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말.
레안드로스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찝찝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
아른트는 베개를 힘 있게 두드려 부풀리고 나서 허리를 폈다.
“하지만 부딪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는 거잖아요. 마음 단단히 먹고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런가?”
“누가 압니까, 사실 레안드로스 경도 공작님과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을지.”
“오. 그런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본인도 그 때 뱉은 말에 스스로 당황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나는 그의 상사이자 고용주이자 하르트만의 가장 비슷한 거니까.
“지금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내 침실 경호 서기 전에 말이야.”
“글쎄요, 연무장에 있지 않을까요? 전에 루셀 경이 시험을 봤던 거기 말입니다. 하녀들이 아까 지나가면서 이야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좋아. 자기 전에 잠시 들러서 남자끼리 대화좀 해봐야지.
야외 연무장으로 가는 길에는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쓰는 사람도 둘 뿐인데, 그 중 하나가 지금 다른 곳에 있으니 당연한가.
혼자서 숨어있기에는 딱 좋은 장소.
분명 혼자서 수련하고 있을 레안드로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걸면 좋을까,
그 날의 이상한 말은 뭐라고 하고 넘기면 좋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도 하는 거잖나.”
“전하께서…… 일은 아닌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레안드로스의 목소리.
나도 모르게 기둥 뒤에 숨어 바깥을 내다봤다.
저쪽,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텅 빈 연무장에는 레안드로스와 유릭이 단 둘이 있었다.
유릭은 연무장을 둥글게 둘러싼 나무 울타리에 걸터앉은 상태였고, 레안드로스는 상의만 벗은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있은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귀를 기울였지만 거리가 상당해서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다.
주로 유릭만 떠드는 것 같았는데, 레안드로스는 가끔씩만 대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레안드로스의 검이 멈췄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유릭을 바라봤다.
유릭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건넸다.
레안드로스는 한참이나 멀거니 서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릭은 내가 있는 곳과 반대로 나갔다.
결국 레안드로스만 남게 되었는데, 어쩐지 선뜻 가기가 뭣해서 망설이던 중이었다.
레안드로스의 머리가 이쪽을 향했다.
“거기서 계속 계실 겁니까?”
“아니.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기척을 숨기는 방법도 모르시잖습니까.”
이게 모처럼 보자마자 꼽을 주네.
땅을 발로 퍽퍽 차며 나가자 레안드로스는 검을 갈무리했다.
“왕세자를 보셨습니까.”
“처음부터는 아니지만 마지막까지 보기는 했지. 무슨 대화를 나눴는데?”
“중요한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대답이 조금 빨랐다.
내가 멀뚱멀뚱 서있자 레안드로스는 유릭이 간 방향을 흘긋 보다가 말했다.
“공작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맞아. 유릭 왕세자가 널 왕성으로 보내달라고 하던데. 그런데 크게 신경 안 써도 될 것같아. 가봤자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잖아. 분명 좋은 결과는 못 얻을 거라고. 넌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가겠습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벌써 환청을 들을 나이던가?
아니면 설마 실수로 말한 거?
하지만 레안드로스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선언했다.
“유릭 왕세자를 따라 왕성으로 가겠습니다, 공작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