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83
(82)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라 안에서 마수나 괴물이 날뛰고 있는데 정작 그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부재중이다.
게다가 지금 나에게 임시 명령권이 있으니까.
당연히 그걸 뺏으러 오고 싶겠지.
하지만 왕세자가 혼자 오는 건 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간만이네, 공작. 늘 그렇듯이 겉치레에 너무 치중하는 게 아닌가?”
그는 늘 타고 다니던 검은 말이 아니라 평범한 밤색 말을 타고 왔다.
평범한 여행객으로 위장하기 위해서인지, 칙칙한 색의 망토와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귀티가 줄줄 흘러내렸지만.
“허례허식이라도 좀 제대로 해야 흠을 잡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못 본 사이에 말에 가시가 박혔군.”
옛날, 몇 번째로 회귀했던 때였더라?
아른트가 억울하게 아멜리아를 죽였다고 오해받았을 때 이후로 공작저에 유릭을 들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때는 허름한 홀에 들여서 촛대로 암살 기도를 시도한 적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예의를 차린다고 응접실 대신 내 집무실로 이동했다.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었고, 하인을 전부 물리자 집무실에는 단둘만 남았다.
유릭이 제집처럼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공작, 북부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네. 내가 보낸 필립 경이 나에게 그딴 소식을 들고 올 줄은 몰랐어.”
“어떤 소식 말씀이십니까?”
“모르는 체하지 말지. 변경백이 죽기 전에 자네에게 북부의 권한을 양도했다니, 누가 들으면 웃겠어.”
“죽기 직전의 사람이 얼마나 간절하면 제게 무려 북부를 맡겼을까요.”
“변경백은 결코 그런 감상적인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을 텐데.”
“누가 들으면 꼭 왕세자 전하께서 변경백을 만나보신 줄 알겠습니다. 북부는 선왕 이전부터 자치령의 권한을 유지하고 있었고, 왕가와 북부는 딱히 교류도 없지 않았습니까?”
내 지적에 유릭은 허, 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서 눈에 뻔히 보이는 그대의 거짓말을 넘어가 줬다네. 이제 놀이는 끝났어. 이제는 얌전히 공작저에 틀어박혀 있게나.”
“그 말씀을 하시려고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내가 공작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왔겠나?”
“그건 좀.”
소름 끼치는 말을 하네.
하지만 유릭의 애매한 답변에도 딱히 여기까지 온 이유가 궁금해지지는 않았다.
대충 이다음의 일은 짐작이 되니까.
“이다음에는 북부로 가실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왕세자 전하라면 그랬을 것 같습니다.”
“자네가, 나라면?”
뚝뚝 끊기는 말에는 네까짓 놈이 감히, 라는 은근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아니라면 혼자 오셨을 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북부로 가실 것을 알았으니 무엇 때문에 가시는지 맞혀 볼까요?”
“내 앞에서 감히 재롱을 떠는군.”
“원래 그런 거 잘합니다. 어디 보자, 북부 변경백을 제가 죽인 건 아닌지 확인하러 가십니까? 그게 아니면 직접 북부의 시찰을 가시려고 하는 걸 수도 있죠. 루셀 경의 말은 못 믿으실 수도 있으니. 아, 아니면 혹시.”
“공작.”
“북부에 해두신 일을 제가 망치지 않았을까 싶어서 보러 가시는 겁니까?”
정적이 흘렀다.
유릭은 화내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희미한 불쾌감만이 어렴풋이 서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왕세자 전하께는 다행스럽게도 제가 힘이 없질 뭡니까.”
“변경백을 봤나?”
“그가 변하는 것까지 전부 봤습니다.”
“그런데도 용케 안 미쳤군.”
“미쳐야 합니까?”
“보통은 그런 걸 보면 미쳐버리지. 정신을 놓아버리고,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북부 설원을 떠돌아다니다가 죽어야지.”
창백하고 긴 손가락이 찻잔 손잡이를 매만졌다.
유릭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뱉었다.
“그대가 미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저는…….”
“왜 안 미쳤지?”
“예?”
“왜 그 광경을 보고서 미치지 않았느냐는 말이야. 그대는 보통 사람이 아닌가? 그것도 부모를 잃고,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어서 마음이 위태로운.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꽤 상황을 많이 호전시켰어.”
널찍한 집무실, 향긋하게 퍼지는 뜨거운 차 향기.
잘 정리된 집무실과 먼지 없이 깨끗한 의자와 책상.
이 모든 것을 둘러보던 붉은 시선의 종착지는 나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왜일까.”
내 나와 바리에 온 유릭을 협박하려고 했더니.
졸지에 이쪽이 협박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설마, 내가 아렌하이트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게 중요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죠. 왕세자 전하께서 그 괴물과 연관이 있다는 걸 제가 알아냈다는 것.”
“오? 변경백이 무슨 기록이라도 남겼나?”
“글쎄요. 여기서 말씀드리면 다음 날 제가 죽고 증거물도 사라질 것 같아서요.”
사실 증거물 같은 건 없다.
내가 읽은 원작이 증거다, 이 새끼야.
유릭은 애매모호한 대답에 눈을 휘었다.
“그걸 빌미로 하고 싶은 게 있나 보군.”
“맞습니다.”
“말해보게나. 내일 혀가 잘려도 오늘 당장은 재잘재잘 자유롭게 떠들어야지.”
“미스릴 광산을 발견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북부에 독점 권리가 있었으니 이제는 왕가에서 광산을 관리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럼 하르트만에게 거래 우선권을 주십시오.”
내가 줄곧 노리던 것.
북부를 두 달간 돌아다닐 때 우연히 발견한 광산.
북부에 미스릴 말고 유명한 게 또 뭐가 있겠나.
성에 있던 미스릴 광석은 진작 옮겼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순도 높은 미스릴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미스릴 광석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아무리 많아 봤자 사업을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미스릴 조달을 위해서 광산을 노리는 수밖에.
“우선권이라 함은?”
“하르트만이 미스릴 거래 물량의 일부를 선점하고 싶습니다. 이번 사업에 필요한 자재라.”
“그거면 되나?”
“네. 그게 전부입니다.”
해주나? 해주는가 봐!
한 여덟 번 정도 더 어르고 협박해야 겨우 합의할 줄 알았는데!
그냥 해주나 봐! 로또 맞았다!
내가 환하게 웃자 유릭이 거기다 대고 뱉었다.
“싫다네.”
이 새끼가?
* * *
유릭이 이미 집무실로 들어섰다는 걸 뒤늦게 들은 레안드로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웬만하면 다른 이에게 맡기고 싶었다.
하지만 성에 있는 사람은 아른트와 자신뿐이었다.
호신용 단검을 두고 공작님 몰래 ‘과일 잘라 먹으면 경을 치시겠지’ 같은 발언을 한 놈보다는 자신이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집무실 앞까지 다가갔을 때.
방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런 조건에 누가 응합니까? 제발 생각부터 좀 해보시지요!”
이 어린 목소리는 아렌하이트였다.
그렇다면 함께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는, 아마도.
“나는 충분히 생각을 했네만.”
“거래 우선권으로 제 기사를 내놓으라니, 차라리 농담으로 듣겠습니다.”
“내가 그 외에는 필요 없다고 한다면?”
“제가 광산을 포기하지요. 하지만 북부에서 있었던 일을 그냥 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협박이군. 협상 결렬인가?”
“예, 협박입니다! 누가 자신의 사람을 넙죽 내놓습니까?”
언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차라리 제가 죽고 말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레안드로스의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북부에서 일어난 일들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문득 치고 올라올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말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자네가 죽는다고 광산이 자네의 것이 되진 않아. 내가 바라는 건 하나뿐이고, 자네가 그걸 줄 수 없다면 이야기는 할 수 없네.”
“왕세자 전하께서 북부에 불러낸 다섯이, 동부의 구덩이에 있는 존재와 비슷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잠시 이어진 침묵.
“에이슬링 상단을 빼낸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군. 하르트만의 예지인가?”
“예지, 미래시, 뭐로 불러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건 따로 있다고요.”
“그래서? 북부에서 활보하는 그 존재를, ‘옛것’을 그대가 죽일 수 있기라도 하나?”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레안드로스는 아렌하이트의 방식을 지나치게 많이 알아버렸다.
누운 채로 꼼짝도 못 하던 그는 자신이 쓸모가 없어지자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유감없이 버렸다.
사람의 육신은 얼마나 약한가.
또 얼마나 역겨운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레안드로스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온통 제 것이 아닌 피가 튀어 시야를 가려버린 느낌이었다.
레안드로스는 문 앞에서 한 발짝 물러났다.
“자네가 그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공작? 왕실에서 노예처럼 부리는 것도 아닌데. 더군다나 그와 같은 유망한 기사를.”
“때에 맞는 시련과 때에 맞는 보상, 그리고 적합한 영광을 주시겠죠. 전부 전하의 안배 덕분일 겁니다.”
“잘 알고 있군.”
“그렇게 되면 가장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전하께서 깔아주신 길의 가장 끝에는 무엇이 남는지. 제가 정말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아렌하이트가 못을 박았다.
“보내지 않겠습니다. 없던 일로 하시지요.”
“매를 새장에 가두고 키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네, 공작.”
“하늘을 나는 순간 화살이 날개를 꿰뚫을 운명이라면, 영원히 새장에서 사는 게 낫습니다!”
“그런가? 그럼 당사자도 그렇게 생각할까?”
문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은 분명 앉아있었다.
레안드로스도 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본 유릭은 웃고 있었다.
“내 벗이여. 내 오랜 친구, 레안드로스. 경의 생각은 어떤가? 아까부터 다 듣고 있던 것 같기에.”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던 거지?
레안드로스는 말없이 방글거리는 유릭을 쳐다봤다.
아렌하이트는 마땅한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레안드로스를 끌고 집무실을 아예 나왔다.
레안드로스는 잠자코 끌려가기만 했다.
아렌하이트가 뭐라고 구시렁거리며 유릭을 욕하든 상관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귓가에 맴돌았던 그 말이.
“공작님께서는.”
“하여간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응?”
“공작님께서는, 저를 지켜주려 하십니까?”
발걸음이 멈췄다.
하인도 오가지 않는 조용한 복도에서 레안드로스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렌하이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를 돌아봤다.
“넌 내 호위 기사니까.”
“아른트나 루셀 경, 아멜리아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들 전부 하르트만에 온 사람들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전부 보호해야 하는 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해 ……아까 다 들었어?”
“예.”
“아우 씨.”
머리를 벅벅 긁던 아렌하이트는 굳게 약속했다.
“아까 들은 건 다 잊어버려. 광산이랑 널 바꾸지 않을 거야. 왕세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니까,”
“공작님께서는 모두를 지켜주시려고 하십니다.”
“응?”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곁에 두시면 그들 전부의 안위를 보장해주려 하시고요.”
레안드로스는 자신의 말이 어물어물하게 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와서야 말이 또렷하든 흐리든 무슨 상관인가.
아렌하이트는, 그리고 북부에서 본 그는.
“저는 공작부인께, 공작님을 부탁받았는데도.”
몇 번이나 스스로 죽어버렸는데.
호위 기사가 적을 옮기는 건 세상이 뒤집어진 듯 굴면서, 자신이 한 번 죽는 것 정도는 괜찮다는 것처럼.
아렌하이트의 얼굴 위로 당황이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레안드로스 경.”
“제가 있다면 공작님께서는 몇 번이고 저를 지켜주려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냐,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리고 저 말고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지 않겠습니까.”
“경.”
레안드로스는 열일곱 번이나 죽은 아렌하이트를 바라봤다.
여기 서있는 건 온전한 아렌하이트일까, 아니면 한 번씩 죽을 때마다 열화된 아렌하이트일까.
이 아렌하이트를 최초의 아렌하이트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나.
그럼 그가 지켜야 하는 아렌하이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공작님의 곁에 아무도 없다면, 공작님께서는 더 이상 죽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레안드로스는 정말이지, 원래의 아렌하이트가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