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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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 사라지자 북부에 대한 걱정 절반은 사라진 기분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꽃’과 ‘얼음을 뿌리는 애벌레’, 그리고 ‘여름의 노인’이 아직 북부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꺼지지 않는 불꽃인 아품 자는 불의 형태를 한 채 한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애벌레와 여름 노인의 우화도 마찬가지였다.
겨울 나비와 마찬가지로, 신을 찾아온 방문객이 피해를 보는 이야기.
이걸 봤을 때 사람들이 굳이 이 존재들을 찾아내지 않는 이상 화를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현재 있을 법한 곳을 특정해서, 접근 금지 구역으로 처리해둘 필요가 있겠군.
“할 일이 많네.”
무심코 내뱉은 소리에 옆에 있던 루셀이 불쑥 끼어들었다.
“도와드릴까요? 그럼 더 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뭘 할 줄 알고?”
“뭘 하시든 그 역시 신의 뜻이겠지요.”
루셀이 성호를 긋고 경건하게 기도했다.
어이가 없으니 그냥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우리는 요나스의 시신을 어떻게 할까 고민이 많았다.
본래대로라면 소속된 용병단에 보고하고 그쪽에서 시신을 수습하도록 해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어린 요나스의 목에 있는 물어뜯긴 상처와, 행방불명된 막스를 보고 용병단에서 무슨 생각을 할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내 이기심일지도 몰랐지만 최소한 남들에게 기억되는 막스의 모습은 인간이었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악령에게 붙들려 거인이 되어버린 막스가 너무나도 가엾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막스가 죽었던 곳에 요나스를 함께 묻어주기로 했다.
눈이 워낙 많이 내린 데다가 위쪽에서 쏟아진 눈까지 추가되어 땅이 아니라 거의 눈 속에 파묻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봉분도 봉긋하게 다져주고, 위에는 초라하나마 작은 나뭇가지로 십자가까지 만들어 꽂아주었다.
그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한 나와 루셀은 묻혀버린 것들은 그대로 두고 떠났다.
어차피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기에.
변경백의 성을 들르고 다시 공작저로 향하는 내내 루셀은 이상할 정도로 공손하고 적극적이었다.
혹시 편집증의 연장선인가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과다한 충성심과 신앙심 외에는 언행에 이상한 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걸 보면…… 루셀에게는 여러 의문점이 있었다.
무릎이 꺾여 움직이지도 못했던 나와 달리, 루셀이 거인의 강림을 목격하고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뭔지.
어째서 이전에 신을 처음 목격했을 때와 다른지.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관련해서 루셀에게 은근슬쩍 물어보려고 하면,
“전부 신의 은총입니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자빠져있었기 때문에 딱히 가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역시 미친놈이야.
그래도 공작저에 가기만 하면 다 나아질 거로 생각했다.
천천히, 여유롭게 숙고할 수 있는 시간도 생길뿐더러 전 공작부인이 남겨준 책에 ‘편집증’에 대한 단서는 없는지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환상은 공작저에 도착하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아른트? 옆에는 누구지?”
“무사히 귀환하셨군요, 공작님.”
아른트는 정확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16배는 더 피곤해 보였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 아래로 보이는 다크써클 하며, 이리저리 뻗쳐 있는 푸석푸석한 머리카락 하며…….
그런 아른트의 옆에 아마도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인물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뭐, 뭘 그렇게 보세요? 저는 이미 마, 마음을 준 사람이 있는데요.”
“난 네 고용주야, 아멜리아. 널 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어.”
“하, 하지만 다른 나, 남자들의 시선은 좀 그래요! 제, 제게 마, 마, 마음을 품을지도 모르니까……!”
“품겠냐? 품겠냐고?”
아른트의 팔을 꽉 끌어안은 채 나를 경계하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팩 돌렸다.
내가 자신의 연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새침하게 구는 아멜리아 때문에 진짜 환장할 것 같았다.
그걸 보던 루셀이 조용하고 나긋하게 말했다.
“벨까요?”
“넌 레안드로스 따라 하지 마!”
“레안드로스 형제, 아니, 선배님이 여기서 왜 나오시는데요? 저는 순수하게 공작님을 걱정해서.”
“거기서 그만. 아멜리아, 조금 있다가 네가 잡고있는 팔의 어깨가 탈골될 것 같거든. 아른트 좀 놔줘.”
“하, 하지만 고, 공작님께서 아른트 님과 절 멀리 떨어뜨려 노, 놓으셨잖아요!”
“공작님, 들어보세요. 이 여자 제정신이 아닙니다. 성에 와서 갑자기 저한테 뽀뽀 세례를 퍼붓더라니까요. 그러고는 엄청나게 횡설수설하면서…….”
“어, 어쩔 수 없어요! 이제까지 가, 같이 있지 못했으니까! 고, 공작님이 북부의 일만 마치면 성에서 아른트 님과 같이 이, 있으라고 그러셨단 말예요!”
“절 팔아넘기셨어요, 공작님?!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빠르게 시정할 테니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와글와글. 시끌벅적. 듣다가 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은 데시벨이었다.
내 표정을 본 루셀이 또다시 말했다.
“역시 벨까요?”
“아냐! 다들 조용히 해!”
조용히 해, 해, 해, 해, 해애애…….
공작저의 안마당에 작은 메아리가 이어졌다.
루셀, 아른트는 물론이고 아멜리아까지 합죽이가 되어서 눈을 굴리고 있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군.
숨을 고른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한 사람씩 눈을 맞추며 말했다.
“루셀, 북부에서는 고생 많았다. 당장은 할 일이 없으니 돌아가서 쉬도록 해. 며칠 후 수도로 가야 하니까. 나는 오늘은 아른트와 함께 있을 테니 호위는 걱정하지 마.”
“네, 공작님.”
루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은 아른트였다.
“아른트, 내가 없는 동안 신관님들에게 적당한 환대를 해주었으리라 믿는다.”
“예, 공작님. 모자람도 넘침도 없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연회홀에서 만찬을 가질까 해. 그리고 그중 큰 도시에서 오신 분들은 따로 각별하게 대접해드리면 좋을 것 같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멜리아.”
아멜리아가 움찔했다.
그녀의 눈은 ‘날 아른트에게서 떨어지라고 할 거지. 다 알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나운데다가 공격적인 그녀를 보고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내 집무실로. 지금 당장.”
* * *
“기분은 어때?”
“이, 이런 거 물으시려고, 그, 그래서 절 꼬시려고 지, 지, 집무실에?”
“그런 거 아냐. 네 기분은 나한테도 중요하거든.”
아멜리아는 머뭇거리다가 작게 말했다.
“아, 아른트 님이 보고 시, 싶어요.”
“아른트는 바쁘니까 조금 있다가. 일단 그 전에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줘.”
“아, 그, 그거라면.”
아멜리아는 손님용 의자에 앉아 두리번거리다가 테이블 위의 종이와 목탄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무언가를 그려나갔다.
“이, 일단 왕궁으로 들어가, 갈 수 있는 길은 대부분 통제를 받고 이, 있어요. 궁인들이 드, 드나들 수 있는 뒷문도 출입에는 한계가 있고요. 그래서 이, 일단은 성벽 역할을 하는 조경용 나무와 진짜 성벽을 같이 뛰어넘는 방법이 제일 빨랐어요.”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겠군. 다른 건?”
“그, 그리고 왕세자궁의 위치는 여기 안쪽으로 보였는데 확실하진 않고요. 여기가 왕실기사단의 연무장, 그리고 여기가 본성, 여, 여기는 연회를 목적으로 사용되는 별궁, 더 올라가서 구석에는 쓰지 않는 별관이 있어요.”
종이 위에 그려지던 선들이 구체적인 윤곽을 가지고 흐릿하게 떠올랐다.
루셀과 아멜리아에게 일을 시켰을 때, 나는 아멜리아에게는 공작저에 들르지 말라고 했다.
-네가 할 일은 다른 거야. 너는 루셀보다 먼저 수도로 가. 왕성에 대한 정보를 모아둬. 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경비병은 몇 명인지, 자주 보이는 궁인은 누구인지, 손님은 얼마나 드나드는지 같은 것들.
-그, 그거면 돼요?
-특히 유릭 왕세자를 주의 깊게 살펴봐.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는 말고. 최대한 거리를 둬. 들키는 순간 공작저로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아멜리아는 내가 필립을 보낼 때까지 충실하게 그 역할을 완수했다.
나는 아멜리아가 그린 왕궁의 대략적인 조감도를 받아들였다.
“유릭의 동선은 어떻게 되지?”
“대, 대부분 본성과 왕세자 궁만 오가는 것 같아요. 가끔씩 대, 대신들을 끌고 다니긴 하는데 특별한 건 없는 것 같고…….”
“그렇군.”
아멜리아가 보고한 것처럼 유릭이 얌전했을 리가 없었다.
북부에 다녀온 것처럼 동부도 가서 손 봐야 하고 남부에도 떡밥도 쳐 놔야 할 텐데.
공사다망하시어 잠잘 시간도 없을 것 같은 유릭이 얌전히 성에 있는다?
분명 어딘가에서 아멜리아가 유릭을 놓친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것까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고생했네. 이거 그릴 수 있을 때까지 성 구경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 아른트 님이 제 고생을 알아주기만 한다면 아무래도 조, 좋아요.”
“왜 굳이 아른트가 알아줘야 하지? 시킨 사람은 나거든?”
안 그래도 아른트가 며칠은 시달린 몰골이 된 게 신경 쓰여 죽겠는데.
아른트가 너한테 돈을 주냐, 아니면 밥을 주냐고 물어보려 했다가 가까스로 참았다.
아무리 편집증적인 정신 이상 상태가 있다고 해도 아멜리아가 아른트를 사랑하는 감정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니까.
단지 지금은 좀…… 심각하게 증폭된 것뿐이잖아.
“이제 가도 돼. 아른트가 싫다고 하면 좀 떨어지고, 남들 시선도 좀 생각해보면서 달라붙어. 보기 흉해.”
“흉하다뇨! 그, 그건 다 애인이 없는 사람들의 비, 비겁한 변명일 뿐이에요.”
아니, 지금 너도 아른트를 애인으로 둔 건 아니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미쳤나!
“은근히 열받게 하지 말고 빨리 나가.”
아멜리아는 바로 일어나 팔랑팔랑 문으로 뛰어갔다.
북부에 가기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녀가 변한 건, 아마도 그때 별을 본 순간부터.
그 모습을 보다가 무심코 물었다.
“아멜리아.”
“네, 네?”
“너는 지금 네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해?”
문고리를 잡은 아멜리아가 나를 돌아봤다.
그녀는 마른 얼굴에 처음 보는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제가 정상이 아니라면 저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전부 비정상인 거겠죠. 저는 지금 저 자신이 어느 때보다도 정상이라고 느껴요!”
그리고 문이 닫혔다.
자신은 정상이고, 다른 사람들은 비정상.
다른 사람들이 정상이라면 자신은 비정상.
참 나.
“졸지에 비정상이 됐네.”
나는 손에 들린 그림을 내려다봤다.
아멜리아에게 왕성에 대한 정보를 얻어오라고 시킨 이유는 단순히 유릭의 행동 루틴을 살펴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왕성 부지 내부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정확한 루트.
이것만 가지고 뭘 할 수 있느냐고?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10개가 넘는데.
‘역시 쓰는 사람 나름이겠지.’
나는 조감도를 보다가 자리에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 * *
그날 이른 저녁.
하르트만 공작저의 연회홀이 모처럼 활짝 열렸다.
새롭게 정비한 연회홀은 이제까지 쓰이지 못했던 시기 따위는 없다는 듯 고전적이고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금박이 씐 창틀과 창문틀, 새것같이 빛나는 촛대, 호사스럽고 기름진데다 달고 부드럽기만 한 요리.
거기에 신관 예순다섯 명을 초대한 성대한 만찬이 시작 신관 예순다섯 명을 위한 만찬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사치스러웠다.
연회가 무르익어갈 무렵, 홀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은근슬쩍 자취를 감췄다.
그중에는 아렌하이트 공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라진 이들은 조용히 아렌하이트 공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총 여섯 명의 신관이 도착하자 문이 닫혔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아렌하이트가 먼저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헌데, 공작님. 어째서 만찬 중에 자리를 따로 만드셨는지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신관님들과 함께 논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에 부득이하게 초청드렸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신관들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위의 제목을 읽는 순간, 신관들의 눈은 놀람으로 커졌다.
“아니, 공작님. 이건…….”
“그렇습니다.”
아렌하이트가 빙긋 웃었다.
“북부 대신전 재건축 계획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