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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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축일에는 다양한 식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개방되는 왕실 신전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이 중 핵심이 되는 행사가 바로 성찬례입니다.”
슈첸페스트와 다르게 성체축일은 귀족가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나, 유예성.
무교, 무신론자, 상대의 종교는 존중해주는 편, 하지만 본질적으로 믿음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자.
종교의 채색이 짙은 행사에 참가하는 건 처음이라 아른트에게 속성 특강을 받는 중이었다.
“성찬례가 뭐야?”
“신이 살과 피로 만물을 빚으셨다고 했잖아요? 신의 살을 상징하는 것과 신의 피를 상징하는 음식들을 먹는 식사 자리랍니다.”
“성찬례는 다른 귀족들과 다 함께 하나?”
“보통은 그렇습니다. 티파티 형식으로 야외에서 다 함께 즐긴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큰일이군.”
어떻게 들키지 않고 음식을 꾸역꾸역 넘긴다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는 내게 아른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찬례 전야제 연회도 열리니까 거기도 가셔야 할 텐데요.”
“젠장! 빠지면 안 되겠지.”
“이번 연회에서 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지 않으셨습니까?”
“맞아. 이제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가능하면 중심을 잘 잡고 싶거든.”
왕실, 귀족, 신전.
왕실의 대척점에 한 번 섰으니, 신전과 너무 친하게 지낸다는 이미지는 주지 말아야 했다.
동시에 귀족들의 수장에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고.
게다가…….
“참, 혹시 레안드로스에 대한 소식은?”
“딱히 없습니다. 이번에 성에 들어가게 되면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물론 레안드로스가 살갑게 편지를 보낼 성격은 아니지만, 수도에 무사히 도착했는지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물론 혼자서 어련히 잘 갔겠느냐마는.
그래도 안부 연락 정도는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사람 사는 건 다 정이라 그랬는데 이놈은 정도 없이 살아왔나 보다.
그런데 이 세계에도 정이라는 개념이 있나.
“성체축일 연회에서 만날 수 있겠지.”
그래, 연회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유릭의 곁에 기사로 붙어있을 걸 생각하니 속이 다 뒤틀리기는 한다만.
얼굴이라도 건강한 거 보면 됐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연회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대망의 성체축일 전야재.
왕성의 연회홀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에서 레안드로스는 머리털 끝도 찾아볼 수 없었다.
* * *
유릭은 최근 들어 상당히 무료했다.
그토록 고대하던 일이 이루어졌는데도 그랬다.
미스릴 폐광산 개발권과 레안드로스의 파견을 건 거래는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아렌하이트가 사실 이 순간을 위해서 레안드로스를 내내 쥐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레안드로스가 자신에게 허리를 숙였을 때는 고양감과 희열을 분명 느꼈었다.
오랜 시간 바라 마지않았던 숙원이 이루어진 기분이 들었는데.
지금은, 어째서.
유릭은 국왕을 대리해 높은 좌석에 앉아있으면서도 내내 삐딱한 자세였다.
아래에서 춤추거나 먹고 마시며 떠들썩하게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비어버린 중앙 귀족 자리를 치고 올라오는 신흥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붉은색 머리가 유독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의 옆을 쫓아다니는 황금색 머리의 호위 기사도.
이름이 나빌, 뭐라고 했더라.
자신이 준 훈장을 감격에 차서 내내 들여다보던 얼굴은 선명한데.
이름은 좀 우스꽝스러운 것 같다는 감상 말고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수도에 와서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할 줄 알았더니,
수련을 한다며 기사단 숙소와 연무장에 틀어박힌 레안드로스보다는 저쪽을 건드리는 게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유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로 향했다.
그가 일어나자 지나가는 길마다 사람들이 예를 갖춘 인사를 올렸다.
받아주는 것도 피곤할 법하지만, 유릭은 웃으며 자애롭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국의 왕세자라는 자리를 한두 해 한 것도 아니니까.
그가 아렌하이트 공작과 금발의 호위 기사의 앞에 이르자 공작의 얼굴이 팍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무엄하기도 하지.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우리 사이에 과한 예의를 갖추는군, 공작. 건강은 좀 나아졌나?”
“예에. 염려해주신 덕분에.”
예의 바른 말과는 달리 공작의 얼굴은 이미 ‘너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뚫린 지 오래다 개새끼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릭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너그럽게 처신해주기로 했다.
“염려 안 해줬다면 공작이 병상에 누운 모습을 볼 수 있었겠군. 그것참 아쉽다네.”
“그러실 것 같아서 저도 오늘 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제가 파견한 기사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아서.”
“레안드로스 경 말이지? 매일 수련에 열심이더군. 공작가에서 수련할 시간이 부족했나 봐.”
“아, 레안드로스 경은 수련을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죠. 하지만 왕성에서 그리 변했다니, 딱히 왕성에서 지내는 게 흥미진진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귀엽게 봐주시지요.”
“어느 영지에서 왔는지, 참 주인의 성정을 닮았단 말이야.”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대화에 좀 껴보려 슬금슬금 다가오던 귀족들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을 엿듣고 알아서 물러났다.
그걸 알아차린 아렌하이트 공작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억지로 산뜻한 표정을 만들었다.
“어쨌든, 전하께서 여러모로 제 편의를 봐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미스릴 광산에 대한 건도 그렇고.”
“흐음?”
“들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북부에서 신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이번 돌아오는 봉헌식에서는 공식적으로 신전을 기부하고 왕실의 안녕을 빌겠습니다.”
유릭은 아렌하이트가 왜 갑자기 입 속의 혀처럼 구는지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쪽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신흥 귀족들을 보고 바로 납득했다.
아렌하이트는 귀찮은 일들을 도맡기 싫은 것이다.
귀족 세력의 수장이든, 신전 세력의 앞잡이든 아렌하이트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을 사방팔방에 알리고 다니는 것과 반대로 진짜 감투는 쓰기 싫은 건가.
어째서?
“그건 그렇다 치고. 공작의 호위 기사는 일전에 면식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유릭은 아렌하이트 뒤에서 고개를 드는 호위 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전과는 좀 달라진 것 같은데?”
전에는 인상도 흐릿했는데,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외양이 아니라, 그 눈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허허 웃기만 했던 파란 눈이 어느새 짙푸르게 변해서 단단해져 있었다.
레안드로스가 냉담한 얼음이라면 이쪽은 깊은 바다 같았다.
잔잔하게 너울대다가도 물 위의 것을 죄다 쓸어버릴 수 있는 격정이 함께 담긴 눈이었다.
그 새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걸까.
아렌하이트 공작이 그에게 무슨 세뇌라도 걸었나.
유릭은 레안드로스에게 흥미를 잃은 상황에서 그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좋은 눈이군.”
“제 호위 기사한테 눈독 좀 그만 들이시겠습니까?”
“칭찬 한 번 한 것뿐인데. 예민하게 굴지 말게나. 어쩌다가 사람이 이렇게 변한 거지? 북부에서 무슨 일이라도.”
북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유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 있었군?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게.”
“제가 왕세자 전하 앞에서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이루어진 일이라 미처 말씀을 못 드렸던 것뿐이죠.”
“그대는 또 내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는군. 몇이었지?”
“글쎄요, 잘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보시면 기뻐서 고함을 지르실지도 모르겠군요.”
아렌하이트가 태연하게 말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성체축일이 코앞인데 그런 것들이 북부를 돌아다녀서야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대신 치워드렸습니다.”
“후회하게 될 걸세, 하르트만 공작.”
“제가요? 전혀.”
그래, 레안드로스 없이 혼자서도 뭐든 해낼 수 있다는 말이지.
배알이 꼴리던 유릭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난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성체축일이 나왔으니 묻는데. 공작은 신전을 방문한 적이 있나?”
“……? 아뇨, 없습니다. 어릴 때는 몸이 약해 바깥출입이 적었죠.”
“그럼 신의 초상이나 조각상도 본 적이 없나?”
아렌하이트가 호위 기사를 돌아보자 금발의 호위 기사가 속삭였다.
“보통 신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할 때는 빈 의자나 구름, 광휘로 표현합니다. 위대하신 신의 초상을 피조물인 인간이 함부로 담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요.”
루셀의 설명에 아렌하이트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릭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공작의 호위 기사는 잘 알고 있군. 공작이 이제까지 신전 출입을 해보지 못한 채로 성체축일을 기린다는 게 안쓰러워서 말이야.”
유릭은 눈썹을 살짝 늘어뜨렸다.
반대로 아렌하이트의 눈썹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십니까.”
“그럼 내 이렇게 하지. 이번 성체축일에는 공작과 내가 성찬례를 함께 하는 게 어떻겠나?”
“왕세자 전하의 귀중한 시간을 감히 뺏지 않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아니, 아닐세. 일국의 공작을 홀대할 순 없지. 게다가…….”
성찬례를 독대로 한다.
유릭의 말을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단어만 띄엄띄엄 들은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다가 유릭이 미소를 지었다.
“공작이 나보다 더 환영받는 존재이니, 다른 이들에 대한 생각을 그대에게서도 들어보고 싶어서.”
도망치는 사람을 붙들어다가 앉혀놓는 건 유릭의 특기였다.
아렌하이트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한참이나 답하지 못하던 아렌하이트는 적당한 핑계를 꾸미지 못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황송할 따름입니다. 전하.”
아렌하이트의 입은 공손하게 말하고 있지만, 눈은 이미 유릭을 매섭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너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그렇게 묻는 듯한 공작의 얼굴을 들여다본 유릭은 속으로만 낄낄 웃었다.
재미없는 레안드로스가 주던 불쾌감은 싹 날아가 버린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