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pporting characters in horror novels want to live as human beings RAW novel - Chapter 99
(98)
당황하지 마, 침착해야 한다.
이번 회차의 유릭은 내가 아렌하이트인줄로만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빙의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단순히 자신을 귀찮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선택한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소설의 주인공은 레안드로스다.
나 따위가 그 자리에 낄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북부에서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레안드로스 뿐이라고 생각했네. 그를 내가 데려가지 않았다면 나도 공작이 아닌 레안드로스가 죽였다고 생각했을 거야.”
“제 호위 기사인 나빌로프 경이 큰 공헌을 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제가 죽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빌로프 경 혼자 그것을 죽일 수 있었을까? 공작은 공작의 호위 기사가 변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군.”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이라도 혼자서 그런 눈은 얻지 못해. 분명 공작이 이끌어준 거겠지.”
이 미친 새끼가 지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네.
“저는 왕세자 전하와 대적하지 않을 겁니다.”
“이상하군. 나는 그대가 신전의 힘을 빌리길래 신전과 손을 잡고 나를 끌어내리려는 줄 알았어.”
“아닙니다. 제가 신전과 접선했던 이유는 오히려 귀족과 왕가, 그리고 신전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전하, 저는 저와 제 사람들의 안위 말고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었다.
주인공이니 뭐니 하는 자리는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이 소설의 엔딩만을 제대로 이루게 도와준 후로는 소리 없이 묻혀서 살고 싶었다.
그도 그럴게 조연들의 생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없으니까.
소설의 말미, 에필로그에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한 줄만 나오는 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주인공은 무슨 주인공이야.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들은 유릭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일렁이는 촛불이 그의 얼굴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럼, 그대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험해지기 시작하면 신경을 쓴다는 말이군?”
“왜 말이 그렇게 됩니까!”
“그대 역시 사람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두도록 하지. 팔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는 건 좋은 일이지.”
유릭의 맨손 검지가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은접시 위의 핏빛 젤리가 미묘하게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우리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지만.”
그는 정말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왠지 기분이 묘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유릭이 옛날에 만났던 친구나, 혹은 죽은 가족을 떠올린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아주 오래전에 그림을 딱 하나 남겨뒀거든.”
“그걸 상상하기만 해도 미쳐버린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아.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18년이 걸렸고, 그 사이에 실력이 있는 화가 187명이 광증에 걸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고작 그 그림 한 점 때문에.”
“그래서 그 그림이 어쨌다는 겁니까? 저한테 붓을 쥐게 시키겠다는 것도 아닌데.”
“내기를 하자, 공작.”
내기?
그렇게 말하는 유릭의 눈이 교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일은 성체축일 행사의 마지막 날이잖나. 그때 왕실에서 유명한 화가에게 의뢰한 종교화를 공개하기로 되어 있다네.”
“그런 소리 못 들었습니다.”
“공작에게까지 하나하나 흘러 들어갈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내일 인간 성자 성모 성녀, 예쁘장한 천사 그림 대신 진정한 창조주의 모습이 드러나면 제법 재미있게 되겠지?”
“당신 미쳤군.”
“아까 말했잖아, 진작 미쳐 있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냐?”
“내가 왜? 왕국 내의 국민 전체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잖나. 고작 귀족 백 명 정도일 뿐인데. 그리고 그 귀족들은 공작의 사람들도 아니고.”
“내 사람은 아니라도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중은 가지고 있어.”
“그렇다면 잘못된 쪽은 나겠군. 하지만 어쩌겠나, 내기를 제안할 수 있는 사람도 나인데.”
불현듯 레안드로스가 그리워졌다.
레안드로스가 주인공이었을 때는 그를 믿고 마음껏 깝칠 수 있었는데.
당장 내 손에 100명의 목숨이 달렸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온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그 그림을 공개하겠다고? 나는 그 그림이 드러나는 걸 막고?”
“잘 이해하는군.”
“내기에 응해서 내가 얻는 게 뭐지?”
“물론 시간이지.”
유릭이 넓적한 집게로 푸들푸들거리는 젤리를 집어다가 앞 접시로 옮겼다.
포크와 나이프로 우아하게 젤리를 자르는 폼이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
“자네가 이기면 유예기간을 주지. 이제야 막 현실을 깨달았는데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필요할 게 아닌가. 내가 자네 주변을 망치는 걸 멍하니 구경할 게 아니라면 대비를 해둬.”
“내가 지면?”
“100명의 사람들이 미치는 꼴을 봐야겠지. 딱히 달라지는 건 없다네. 다만 성체축일이 끝나면 자네를 괴롭힐 거야.”
이 씨발 놈.
품위 있는 식사 자리 앞에서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유릭의 ‘괴롭힌다’는 말은 이제까지처럼 살살 봐주면서 거슬리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를 본인의 대적자로 인정했으니 전심전력으로 숨통을 끊으려 들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수준에서 유릭이 작정하고 돌진한다면, 하르트만은 바로 무너질 게 뻔했다.
하다못해 시간이라도.
레안드로스와 루셀, 아멜리아, 아른트를 다른 곳에 보낼 수 있는 시간이라도 있다면.
“내기를 받아들이지. 방금 한 말을 어기지 않도록 주의해.”
“그러도록 하지, 공작. 나는 한 번 뱉은 말은 다 기억하거든.”
유릭은 냅킨으로 입가를 눌러 닦고 장갑을 꼈다.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손길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 미친놈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며 웃는 모습 따위, 보고 싶지 않았으므로.
* * *
루셀은 제 주인이 걱정되었다.
어제 아렌하이트는 왕세자와의 성찬례 독대가 끝난 후 혼자 돌아왔다.
분명 가기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돌아왔을 때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사람처럼.
괜찮으시냐 몇 번을 물어도 괜찮다는 답만 올 뿐이었다.
그리고 성체축일의 마지막 날인 오늘.
모두가 왕성 내의 신전 대강당에 앉아있었다.
햇빛을 받은 색유리가 아름답게 빛나며 유리 속에 모자이크 기법으로 그려진 성자들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했다.
백색의 돌로 조각한 천사들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모두가 우러러볼 수 있도록 앞쪽의 계단 위에는 초라하고 낡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섬기는 신을 상징하는 의자였다.
저절로 경건해지는 광경에 모든 이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예의 바르게 속삭였다.
어떤 이들은 벌써 두 손을 모으고 성심껏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루셀의 옆에 앉은 아렌하이트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기만 했다.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공작님.”
“응.”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타운하우스까지 빠르게 가는 길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아렌하이트가 중얼거렸다.
그는 제 손톱 거스러미를 뜯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깊게 패인 상처에서 피가 스물스물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공작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루셀은 다시금 공작을 설득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공작님. 지금.”
“괜찮아.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나는 그냥 여기 있고 싶어. 아무것도 말하지 마. 제발.”
결국 루셀은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레안드로스 때문인가? 레안드로스 경이 공작을 먼저 밀어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찬례 전 금식도 몸소 실천하고, 성찬례 전 미사도 졸거나 하는 기색 없이 잘 듣는 아렌하이트를 보고 루셀은 감동을 받았었다.
역시 신께서는 돌아온 양을 품어주시는구나.
루셀은 이대로 가기만 하면 아렌하이트가 귀족으로서는 몹시 드물게 신실한 신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유릭 왕세자 전하를 뵙고 돌아온 공작은 하루종일 멍하니 앉아있었다.
왕가 역시 신전과 좋은 관계는 아니라 들었는데, 유릭 왕세자가 공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말을 한 걸까.
산 넘어 강이라더니 레안드로스 다음엔 왕실이었나.
루셀은 그 사실이 분했지만 스스로 꾹 참고 마음을 다스렸다.
양이 무리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목양견이 양을 물어 죽이는 법은 없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면 공작은 서서히 믿음을 얻게 되리라.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이 중요했다.
루셀이 그렇게 생각하며 성호를 그었다.
그때 신전의 문이 열리며 사제와 신관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그들의 가장 앞에 대신관과 유릭 왕세자가 있었으며, 그들 뒤로 사제 대여섯 명이 끙끙거리며 무언가를 운반하고 있었다.
하얀 천으로 가려놓은 네모난 것.
얇기나 모양을 봐서 그림인 것 같았다.
다만 신전의 저 뒤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 볼 수 있을 것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사제들은 그림을 계단 위까지 옮겨놓았다.
커다란 그림은 그 크기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유릭 왕세자는 대신관과 무어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그림 앞에 섰다.
“성체축일의 마지막 날, 모든 이들이 신의 은총 안에서 숨 쉬며 그분의 자애와 자비를 찬송하는 날이니. 행사를 주관하신 대신관님을 비롯해 사제님과 신관님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대신관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고, 사제와 신관들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유릭은 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귀족들의 면면을 확인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본래는 참회 기도가 이어져야겠지만, 오늘은 그에 앞서 왕실이 신전과 신께 바치는 헌물을 공개하겠다. 왕실이 신전에게 보이는 깊은 믿음과 협력의 증거이니, 대신관께서는 기꺼이 축복해주시오.”
“왕가에서 신께 바치는 찬양일진대 그 누가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이리로, 왕세자 전하.”
늙은 대신관의 고루한 축복문이 이어졌다.
왕세자는 눈을 감고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은 대신관의 말을 경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가의 안녕과 왕세자를 비롯한 모든 이들의 건강을 빌자, 왕세자는 한 걸음 물러나 짧게 인사를 건넸다.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길.”
그리고 품계가 낮은 사제들이 하나씩 계단을 올라갔다.
그림을 드디어 공개하려는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기대에 찬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루셀은 아렌하이트에게도 속삭였다.
“저거 보세요, 공작님. 그림이 엄청나게 큽니다. 저는 저런 크기의 그림은 벽화에서밖에 보지 못 했…… 공작님?”
아렌하이트가 딱딱하게 굳은 채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그림에 충격적인 거라도 그려져 있는 줄 알겠다.
루셀은 공작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공작님.”
얼어붙어 있던 아렌하이트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루셀, 나,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작님. 여기 좀 보세요.”
“미안, 진짜 미안한데, 너도 이해하지? 내가 아니면 안 되잖아, 이거. 나밖에 막을 사람이 없는 거잖아. 전부 여기서 죽을 수는 없잖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아렌하이트는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돌발 상황에 사방에서 작은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아렌하이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더니, 당황한 사제들과 신관들을 밀쳐내고 그림 앞까지 달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아렌하이트는 헌금함 앞에서 타오르던 촛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부우우욱!
그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초를 꽂기 위해 뾰족하게 만든 부분이 천 너머 그림에 박혔다.
아렌하이트 공작은 그대로 그림을 내려그었고, 천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몇 번씩이나 촛대를 휘둘렀다.
신전은 경악에 가득 찼다.
모든 게 끝난 후, 아렌하이트는 비틀거리며 촛대를 떨어뜨렸다.
“다 끝났어.”
땡그랑, 바닥을 구르는 금속음과 함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유릭이 외쳤다.
“경비병! 뭣들 하고 있나! 여기 당장 이 무도한 자, 하르트만 공작을 무릎 꿇려라! 대신관을 보호하라!”
쩌렁쩌렁 울리는 힘 있는 목소리에 모든 이들이 마취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아렌하이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포박되어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좌중석에서 루셀이 일어나며 공작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어린 공작은 그대로 유릭만 올려다봤다.
아렌하이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이제 끝났어. 네 빌어먹을 그림은 아무도 보지 못해. 이제 됐겠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공작, 그대의 선조들이 앓던 광증을 그대로 물려받은 건가? 어찌 이렇게 중한 날에 이런 기행을 벌이는 건가?”
“모르는 척하기인가? 이제와서? 저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네가 말했잖아! 저주받은 그림이라고, 보면 모두 미쳐버리는 그림이라고!”
아렌하이트의 외침에 신전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저주받은 그림을 신성한 행사에 등장시켰다니.
하지만 유릭은 차갑게 대꾸했다.
“저주받은 그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동안 염려했던 일이 기어이 일어났군. 공작이 미쳤어.”
유릭은 경멸 어린 시선을 아렌하이트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는 사제와 신관들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천을 벗겨라.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터.”
허둥대는 이들이 그림을 가린 천을 벗겼다.
무참하게 난도질 된 그림은,
“-그런, 나는, 그런.”
……신과 천사, 그리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간 성자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일 뿐이었다.
유릭은 완전히 사색이 된 아렌하이트에게 차갑게 대꾸했다.
“왕가에서 신전에게 보낸 존중의 선물을 그대가 완전히 망가뜨렸다. 그뿐인가? 그대는 나와 대신관도 함께 위협했지. 이 중죄는 확실히 문책하겠다. 끌고 가!”
아냐, 이럴 리가 없는데, 아냐!
아른하이트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누구도 그 비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완전히 망가진 그림과 놀라서 비틀거리는 대신관에게 이목이 쏠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유릭이 속삭였다.
“내가 한 말을 기억한다고만 했지, 거짓말하지 않겠다고는 한 적 없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