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0)
◈ 110화. 판천라마
단자룡 일행이 떠난 뒤, 사천의 지도를 펼친 진무립의 처소에 단려화가 찾아왔다.
“오라버니와 무슨 얘길 하셨나요?”
“별 얘기는 없었다.”
“흐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단려화는 진무립을 빤히 쳐다봤다.
진무립의 한쪽 눈썹이 씰룩거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설마 네 동생이 사천에서 광녀 소리 듣고 있다거나 그런 얘길 한 건 아니겠죠?”
“내가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거라 생각하는 거야?”
순간 단려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다고요?”
“농담이야.”
“이 사람이 정말.”
그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자 진무립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치듯 사라졌다.
“동생을 잘 부탁한다더군. 좋은 오라비다.”
* * *
공위맹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빠르게 천하로 퍼져 나갔다.
큰 기대 없이 소문을 확인하고자 결맹식에 왔던 이들은 좀처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개방과 상천에 화령까지 축하 사절을 보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들과 초평천의 밀약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었으나 좀처럼 보기 어려운 무인까지 보게 된 것은 그들에게 크나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광룡(狂龍) 진무립이었다.
위기에 빠진 군중들을 구하고 호공 소유붕을 죽인 젊은 고수.
수려한 외모에 대중을 사로잡는 엄청난 신위는 모두의 뇌리에 강렬한 기억으로 새겨졌다.
진무립은 비단 사천만이 아니라, 당금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젊은 무인이 되었다.
이주에서 서쪽으로 나흘 거리.
거대한 절벽을 등진 청천현(靑川縣)은 가장 먼저 소문이 퍼진 곳 중 하나였다.
저녁노을의 어스름한 빛이 절벽 너머로 사라질 무렵,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은 일과를 마친 일꾼들로 떠들썩했다.
“개방과 상천에 화령까지 사절을 보낸 걸 보면 초대협의 명성이 아직 죽지 않았나 봐.”
“물론 그분의 명성도 명성이지만 그간 사천맹이 워낙 폐쇄적이질 않았는가? 공위맹이 잘되면 사천과 교류할 수 있을 테니 미리 선을 대어 나쁠 건 없지.”
며칠째 반복되는 주제가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다.
객잔 문이 열리며 죽립을 눌러쓴 사내가 들어왔으나 이야기에 빠져든 그들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죽립인이 한쪽 구석에 자리 잡자 점소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주, 주문하시겠어요?”
마을에선 본 적 없는 낯선 인물의 장대한 체구가 무서웠던 것이다.
“화주. 소면.”
짧고 간결한 주문과 함께 탁자 위로 철전 다섯 개가 올려진다.
안도한 점소이는 돈을 챙기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금방 대령하겠습니다.”
점소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죽립인은 조용히 물을 마시며 사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결맹식에서 사로잡힌 혈교의 세작은 어떻게 되었다고 하는가?”
“내 생각에 그들은 세작이 아니었던 것 같네. 서장의 늙은 여우라고 불리던 소유붕이 고작 세작질을 하려고 사천까지 와서 죽었겠는가?”
“그렇지. 죽고 잡힌 무인의 숫자가 열 명이 넘는다던데 그만한 숫자라면 다른 노림수가 있었을 것 같네.”
“다른 노림수라면?”
“공위맹의 결맹식을 훼방 놓는다던가…….”
“서장에서 활약한 광룡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그 젊은 나이에 그만한 능력을 가진 무인이라면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르고 싶었을 수도 있겠어.”
다양한 추측이 오가는 가운데 점소이가 부엌에서 나왔다.
“화주와 소면……. 어?”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리에 있어야 할 죽립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 잃은 소면이 차갑게 식어갈 무렵, 마을을 벗어난 죽립인은 어느새 절벽 위에 올라선 상태였다.
살짝 들어 올린 죽립 아래로, 각진 턱선에 불가의 사천왕을 연상케 하는 부리부리한 눈매가 드러났다.
“호공이…… 죽었다고?”
커다란 동공에 비친 마을이 옅은 떨림을 보인다.
잠시 고민하던 중년인, 포달랍궁의 환혼사자(還魂士子) 완사계는 즉시 몸을 돌렸다.
‘서둘러 알려야 한다.’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한 그는 일다경 뒤, 입구가 가려진 작은 동굴에 도착했다.
사람 한 명이 가까스로 지나갈 만큼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삼 장 남짓한 폭의 공동이 나타났다.
어둠이 가득한 공동의 끝, 벽에 기대앉은 이가 눈을 뜨자 번뜩이는 묵광(墨光)이 공동을 비추고 사라졌다.
“사계.”
목소리의 나직한 울림이 메아리치듯 공동에 맴돈다.
완사계의 표정이 사뭇 밝아졌다.
목소리에 깃든 힘에서 주군 판천라마가 순조롭게 회복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공손히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불존(佛尊). 호공이 죽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
“얼마 전 서장을 들쑤시고 간 광룡이라는 아이에 대해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아이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진무립?”
“그렇습니다. 불존. 최근 사천맹에서 갈라져 나온 자들이 공위맹을 세웠다고 합니다.”
완사계는 사천에 떠도는 소문과 공위맹이 세워진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추격자들이 공위맹에서 당한 것을 보면, 무령사자(武令士子)가 적을 유인해간 방향이 공교롭게도 그쪽인 듯합니다.”
“야탁에게서 온 연락은?”
“아직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공동에 짙은 정적이 감돈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완사계는 매우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존. 사천 무림과 손을 잡아 후일을 도모하심이 어떠실는지요.”
“손을 잡는다?”
“예. 비록 서장의 본 궁이 무너졌다곤 하나 흩어진 제자들을 모으면 적지 않은 전력이 될 테니 저들도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후후후.”
어둠 속에서 자조 섞인 조소가 들려왔다.
“사계야.”
“예. 불존.”
“너는 사천맹이 둘로 갈라졌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하나였다면 우리와 손을 잡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둘로 갈라진 지금, 우리와 손을 잡는 쪽은 혈교의 최우선 목표가 될 터인데 누가 먼저 나서서 매를 맞으려 하겠느냐?”
사천까지 추격대를 보내온 혈교다.
혈교가 사천 침공을 미루고 있는 것도 전쟁이 벌어진 사이 판천라마가 흩어진 제자들을 모을까 우려하기 때문이었다.
만일 판천라마의 위치가 확인된다면, 혈교는 후환을 뿌리 뽑기 위해 그곳부터 공격할 게 분명했다.
완사계는 낙심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혈교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인가.’
사천으로 피한 뒤, 은신처에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리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판천라마의 입이 작게 열렸다.
“안달하지 마라. 분명 때는 올 것이다.”
“예. 불존.”
* * *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평야.
동쪽의 작은 시냇물 너머로 나직한 야산에 무인들의 기합성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하압!”
진무립의 화공단 소속 네 개의 부대는 강유월의 호천단을 상대로 모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우측이 뚫린다!”
“시선은 반드시 두 명이 끌라고 하지 않았나!”
화공단 무인들의 목청이 점점 커진다.
지금 호천단의 노련한 고수들은 개방에서 알려준 무혼광인의 특징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화공단의 무인들은 제법 형식을 갖춰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나 기본적인 무위에서 차이가 나는 탓에 좀처럼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높은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린 하종보가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껄껄 웃었다.
“이보시게들. 대추혈을 찌르려면 뒤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손발이 너무 안 맞네그려.”
그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로운 경풍이 일더니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렇게 하면 되겠죠?”
“이런!”
다급하게 돌아선 하종보는 단려화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회피했다.
“아!”
내지른 목검이 목표를 잃고 빗나가자 그녀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종보는 산비탈을 바쁘게 미끄러지며 웃었다.
“자네가 있다는 걸 깜빡했군.”
요 며칠간 상대하며 느낀 것이지만 그녀의 무위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높은 나무 위에서 전황을 살피던 진무립이 목청을 키웠다.
“전야대(電惹隊)는 무경대(武警隊)와 교대한다!”
“예!”
중년을 앞둔 구릿빛 피부의 사내, 전야대주 종석연은 아쉬움을 삼키며 물러났다.
이어서 그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홀쭉한 체형의 사내가 산비탈을 뛰어올랐다.
“삼 인이 일조다. 기본만 지키면 된다!”
무경대주 강금척의 외침에 무인들이 일제히 화답했다.
“예!”
화공단의 대주들은 당소소를 제외하곤 모두 불혹이 넘은 고수들.
그럼에도 진무립의 명령에 누구 하나 군소리하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진무립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전장을 주시하며 보완점을 찾아가는 진무립의 곁으로 단려화가 다가왔다.
“나도 좀 쉬어야겠어요.”
“수고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움직임이 많이 나아진 것 같아요. 노사님들도 이따금 뒤를 잡히시더라구요.”
개방이 알려준 무혼광인의 약점 중 하나가 바로 대추혈이다.
진무립은 이들에게 두 명이 시선을 끌고 한 명이 후방을 노리는 기초적인 전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
“욕심이 너무 많다니까.”
단려화가 혀를 내두를 때 산 밑에서 누군가가 빠르게 올라왔다.
“두 분 단주님께서는 대전으로 급히 가보셔야겠습니다.”
목소리를 들었는지 능선 위에 있던 강유월이 빠르게 내려온다.
“진단주. 이곳은 이들에게 맡기고 다녀오세나.”
“예.”
돌아선 진무립이 단려화에게 말했다.
“이곳을 부탁한다.”
싱긋 웃은 그녀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다녀와요.”
산을 내려온 두 사람이 대전에 들어섰을 땐, 이미 네 명의 각주들이 도착한 상태였다.
“조금 늦었습니다.”
진무립을 향한 수뇌들의 눈빛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따스했다.
만인이 모인 자리에서 공위맹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입증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사천맹의 소천당주에서, 공위맹의 무성각주가 된 검명문 출신 장환이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우리도 이제 막 도착한 참이오.”
“어서 앉으시구려.”
연배로 따지면 그들이 한참은 위였으나 누구도 진무립을 쉽게 대하는 이가 없었다.
사천맹에서부터 오늘까지, 진무립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증명해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맹주 초평천과 비사각주 적모개가 들어왔다.
앉아있던 수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초평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앉으시오.”
상석의 구분이 없는 원형 탁자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겠다는 초평천의 의지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적모개가 입을 열었다.
“급하게 모셔서 죄송합니다. 생포한 혈교도가 조금 전 입을 열었습니다.”
각주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게 정말이오?”
“그렇습니다.”
강유월이 미간을 좁힌 채 나직이 물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무엇이었소이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적모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혈교에 패한 포달랍궁의 수장. 판천라마가 이곳 사천으로 피신한 모양입니다. 호공 소유붕과 혈교도들은 판천라마를 뒤쫓아 이곳까지 왔다고 합니다.”
각주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비록 혈마에게 패했다곤 하나 천수경장(千手勁掌) 판천라마는 서장을 양분하던 거물.
그런 인물이 사천에 들어왔다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적모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혈교도들은 그들의 흔적을 쫓아 이곳까지 왔답니다.”
순간 장내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판천라마라니…….”
초평천이 가볍게 탁자를 두드려 분위기를 환기했다.
“지금 비사각에서 각지의 정보원에게 지령을 하달했소. 당장은 그들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오.”
북천도문 출신, 은현각주 조야명이 물었다.
“그들과 접촉할 생각이십니까?”
“변수가 될 만한 것은 사전에 파악해두려고 하오.”
상명보 출신으로 금상각을 맡고 있는 중년인, 곽담이 긴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사천 땅에 들어온 이상 파악해두어야겠지요. 그러나, 행여 그들이 손을 잡길 원한다면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자칫 혈교의 공격이 집중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진무립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초평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진무립은 모두를 둘러보며 차분히 말했다.
“그들을 끌어들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