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5)
◈ 115화. 목불인견의 참상
안가를 떠난 진무립과 단려화는 며칠째 지평선이 보이는 들판을 쉴 새 없이 달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주변 풍광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내력과 체력만큼은 자신 있던 단려화도 쏟아지는 빗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강행군에 가쁜 숨을 내쉴 지경이었다.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고 가는 거 맞죠?”
뒤를 힐끔 돌아본 진무립은 조금 속도를 늦췄다.
“비봉이 뚫렸으니 적은 분명 청성이나 아미로 갈 것이다. 실혼인이 있다곤 하나 소수로 사천맹과 가까운 당가를 치기엔 부담스럽지.”
“만일 성동격서라면요? 그쪽을 노리는 척 북쪽을 뚫고 공위맹을 칠 수도 있잖아요.”
“그쪽은 비사각과 상천의 무인들이 이중으로 경계하고 있다.”
“경계가 돌파당한다면요?”
“백채륜이 지금쯤 공위맹 근처에 도착했을 거다. 그 녀석이 있다면 안심할 수 있다.”
“백소협이 당할 수도 있잖아요.”
진무립은 실소를 머금었다.
“상대의 무위가 그 정도라면 이 전쟁은 해봐야 소용없는 거 아닐까?”
“…….”
하늘과 주변 지형을 둘러본 진무립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렸다.
“조금만 더 가면 평야의 끝이야. 힘들겠지만 지금은 참아줬으면 좋겠군.”
단려화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다섯 번째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두 번 정도 더 할 예정이다.”
“…….”
* * *
부슬비가 내려앉는 어스름한 저녁.
청성파의 산문에 수백 명의 무인이 모여들었다.
소식을 듣고 뛰쳐나온 장문인 고중선이 흰 수염을 매만지며 물었다.
“혈교의 선발대가 이곳 청성으로 오고 있다?”
선이 굵은 얼굴의 여승, 은천대주 여자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확실하진 않으나 발견된 흔적을 보면 그렇습니다.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고중선의 주름진 눈매가 가늘어졌다.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대략 이백여 명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백이라.”
“문제는 보이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에게 실혼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혼광인과 혈야광인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다.
“알겠네. 철저히 준비토록 하지.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게.”
“감사합니다. 장문인.”
* * *
천하 불교의 영산.
며칠째 아미산에 쏟아지는 빗줄기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모른다.
산을 타고 장강의 지류로 흘러내리는 빗물은 마치 폭포수처럼 웅장하게 물보라를 일으켰다.
먹구름 사이로 한낮의 태양이 잠시 몸을 드러낼 무렵, 햇살이 비추는 절벽 위에 우의를 걸친 여승이 올라섰다.
“후우.”
잠시 숨을 고르고 남쪽으로 내달린 그녀 앞에 절벽 사이로 세워진 웅장한 목조 전각이 나타났다.
그것은 절벽에 조각된 거대한 불상, 낙산대불(樂山大佛)의 지붕이 되어주는 대불상각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은은하게 어우러지는 목탁 소리가 들려온다.
좁은 복도를 따라 걸어간 그녀는 수십 장 높이의 거대한 불상 앞에 앉은 나이 든 여승과 만날 수 있었다.
“스승님. 적의 선발대가 청성으로 향하는 모양입니다.”
아미의 장문인, 자소는 천천히 목탁을 내려두고 일어났다.
“시작이로구나.”
대불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깃들었다.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 것인고.”
자소의 대제자 정화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자들을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이상, 상대를 직접 경험해본다면 차후의 전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불상을 응시하는 자소는 무슨 일인지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스승님.”
“왠지 느낌이 좋지 않구나.”
스승의 예감은 틀리는 경우가 드물다.
정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청성이 당할 것이란 말씀입니까?”
제자의 불안한 눈초리에 자소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아니다. 네 뜻대로 제자들을 보내거라.”
“알겠습니다.”
본산으로 돌아온 정화는 즉시 제자들을 소집했다.
비 내리는 금정봉(金頂峰)의 복호전(伏虎殿) 앞에 수백에 달하는 여승이 집결했다.
계단 위에 선 정화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혈교의 선발대가 청성으로 향하는 모양입니다. 정경당(政鏡黨)은 청성을 도와 혈교로부터 사천의 평화를 지켜주세요.”
정경당주 정인이 앞으로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정화는 정중히 합장하는 정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일대제자 중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고강한 무공을 가진 정인이라면 믿을 만하다.
정화는 작게 끄덕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다녀오시게.”
돌아선 정인을 이백여 명의 여승이 뒤따랐다.
제자들과 함께 아미의 산문을 벗어난 정인은 큰길에 올라서기 직전 잠시 발을 멈췄다.
곁을 따르던 보허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비에 젖은 숲속을 쳐다봤다.
“사숙?”
가만히 숲속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가자꾸나.”
* * *
먹구름에 가린 서천의 노을이 검붉게 흩어져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밥 짓는 연기가 치솟아야 할 시간임에도 비에 젖은 마을은 싸늘하며 음산한 공기로 가득했다.
연신 뒤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신법을 전개한 흑의인은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지독한 혈향을 감지했다.
‘벌써…….’
흙탕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디니 사방에 깔린 참혹한 주검이 눈에 들어온다.
두 번째 발을 내디디는 순간, 지독한 사기를 동반한 오싹한 예기가 목에 차디찬 감촉을 드리웠다.
“누구냐?”
흑의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비영대 사천지회 소속 칠호입니다. 사천맹의 움직임을 전하고자 왔습니다.”
검을 들이밀었던 적의인은 사내의 품을 뒤져 비영대의 신분패를 확인했다.
“따라와라.”
그를 따라 마을에서 가장 큰 집에 도착하자 부서진 방문 안에서 여인의 참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주세요.”
피로 물든 여인의 간절한 눈동자가 광기에 젖은 무초걸의 얼굴을 담는다.
히죽 웃은 무초걸의 손톱이 서서히 여인의 왼쪽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아악…….”
무초걸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야? 이런 산골에서 뒈질 때까지 썩는 것보다야 본교의 대업에 밑거름이 되는 편이 백 배는 낫지 않아?”
광기와 함께 눈에 떠오른 의문은 진심이었다.
“제, 제발…….”
“제발이고 나발이고 그런 표정 짓지 말라니까. 사람 신경질 나게.”
푹!
무초걸이 미간에 새겨진 짙은 주름으로 시뻘건 피가 튀었다.
“컥!”
단말마의 비명을 남긴 여인이 축 늘어졌다.
이어진 그의 행동은 곁을 지키는 부하들조차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잠시 후, 문밖에서 대기하던 칠호는 무초걸의 부름을 받고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비영대의 칠호가 소교주를 뵙습니다.”
고개 숙인 그의 눈에 혈흔으로 낭자한 방 안의 참상이 비친다.
‘광증…….’
무초걸의 광증은 비단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대 교주들이 대성을 이뤄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짧고 간결하게 보고를 마쳤다.
“사천맹에서 청성으로 무인을 파견했단 말이지?”
“예. 은천대와 현무대가 하루 전 산문을 넘었습니다.”
“흐으음.”
얼굴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쓸어 쪽 빨아먹은 무초걸은 나른한 표정으로 칠호를 응시했다.
광기로 가득한 그 눈빛에 흠칫 놀란 칠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아미는?”
“여승 이백여 명이 청성으로 향했습니다. 상대 중 제법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여승이 있어 정확한 정체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작 이 정도 움직임에 속아 넘어갈 만큼 정신이 없는 건가? 저쪽엔 대가리 굴릴 줄 아는 놈이 없는 거야?”
“비각주 당문경이 사라진 뒤로 사천맹의 일 처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 분분합니다.”
당문경이 실각한 뒤 중소방파까지 이탈하자 한동안 사천맹이 혼란스러웠던 것은 사실이었다.
“킬킬킬! 청성으로 가는 줄 알았던 우리가 대뜸 아미에 나타나면 그년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섬뜩한 웃음과 함께 무초걸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아버지의 본대가 대설산맥을 넘었겠지?”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어디 한번 흔들어볼까.”
부하가 내민 면포에 피를 닦은 무초걸은 생각을 정리했다.
“사흘 뒤다. 청성파 인근에 아미가 공격당했다고 은밀히 소문을 퍼트려라.”
문밖에 서 있던 부하가 즉시 예를 갖췄다.
“존명.”
그가 사라지자 무초걸은 칠호에게 턱짓하며 말했다.
“비구니의 피는 무슨 맛일지 궁금하네. 앞장서봐.”
“존명.”
마을을 점령했던 혈의인들이 내려앉는 야음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들이 떠나고 반 시진 뒤.
적막에 사로잡힌 참혹한 마을에 시꺼먼 인영이 나타났다.
“늦었나.”
주검으로 가득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본 사내,은무대주 서진환은 무초걸이 머물던 방을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절반쯤 뜯겨 나간 시신을 본 그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와 흔적을 쫓았다.
‘방치해선 안 될 놈이다.’
은곡을 공격했던 자들도 이런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시신의 상태를 보아 일을 벌인 놈에게 살육과 식인은 마치 놀이처럼 자연스러운 행동 같았다.
흔적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던 서진환은 숲에 들어서는 순간 상대의 종적을 놓쳤다.
“하필 이 시기에 장마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며칠째 그치지 않는 비에 무려 이백이 넘는 숫자가 하늘로 솟구친 것처럼 사라졌다.
‘시신의 상태를 보면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주변을 전부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낸다.’
쏴아아!
숲을 덮치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한다.
이런 날씨라면 동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단이 한정된다.
인근에서 가장 높게 치솟은 나무에 은밀한 표식을 새긴 서진환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 *
평야를 지나 숲에 접어든 진무립은 큰 나무 밑동에서 서진환이 남긴 표식을 확인했다.
“하루 거리다.”
단려화가 물었다.
“은무대인가요?”
“그래.”
나무 위로 솟구친 진무립의 눈에 멀리 산 밑의 마을이 보인다.
‘연기가 올라오질 않는군.’
이제 곧 저녁이 다가오는데 그 어디에서도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질 않았다.
훌쩍 뛰어내린 진무립은 단려화와 함께 마을로 몸을 날렸다.
이윽고 도착한 마을의 입구, 흘러내린 피에 시뻘겋게 물든 땅이 두 사람의 표정을 굳게 만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단려화가 단숨에 언덕을 올라 마을에 들어섰다.
“세상에…….”
뒤따라 도착한 진무립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군.”
울먹이는 단려화의 목소리가 옅은 떨림을 동반했다.
“이건…… 무림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대체 왜 양민을…….”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 생명의 기척, 사방에 널브러진 참혹한 시신.
곳곳에 패인 웅덩이마다 붉은 피가 넘실거리는 이곳은 한 폭의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중앙의 큰 집으로 달려간 진무립은 방 안에서 뜯겨나간 시신을 발견하곤 미간을 좁혔다.
“식인을…….”
눈앞의 끔찍한 참상은 좀처럼 동요하는 법이 없던 진무립의 마음조차 흔들 정도였다.
뒤에서 단려화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에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진무립은 다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
단려화는 핼쑥한 얼굴로 작게 입술을 벌렸다.
“시신을 수습하고…….”
마음 같아선 이대로 당장 움직이고 싶었지만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진무립은 대답 대신 즉시 움직여 시신을 모두 촌장의 집으로 보이는 큰집 안에 쌓기 시작했다.
단려화도 진무립을 따라 움직이며 마을 곳곳의 시신을 옮겨왔다.
그로부터 일 각이 지난 뒤, 백여 구의 시신이 큰 집 한 채에 모두 쌓였다.
“멀리 물러나.”
“…….”
그녀는 차분히 뒷걸음쳐 마당으로 물러났다.
시신에 손을 올린 진무립은 지그시 눈 감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단전에서 솟구친 내력이 양손의 장심으로 치달으며 열양지기로 변해 쏟아져 나온다.
이어서 비에 젖은 시신들에서 뿌연 수증기가 피어나더니 건물 주변이 마치 작은 운무가 내려앉은 것처럼 몽롱하게 변해갔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신비로운 운무가 내리는 비에 천천히 사그라들고, 단려화의 눈에 진무립의 등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눈앞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집 전체가 이글거리는 홍염에 휩싸였다.
마치 먹구름에 가린 태양을 대신하듯, 엄청난 빛과 열기가 쏟아져 나오자 단려화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 진공자!”
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무립을 구하고자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그녀의 발이 불타오르는 집의 처마 밑에 도달했을 때, 안에서 나온 진무립이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는 괜찮다.”
놀란 얼굴로 진무립을 올려다보던 단려화는 이내 저 불을 붙인 사람이 그라는 걸 떠올렸다.
“…….”
짧은 정적 끝에 그녀가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 미안해요.”
그는 담담하게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이해한다. 가자.”
“이제 어디로 가는 거죠?”
진무립의 두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빛났다.
“흉수를 잡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