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6)
◈ 116화. 아미산의 전투
참사가 벌어진 마을에서 나온 두 사람은 서진환의 흔적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렸다.
치미는 분노가 육신의 고단함마저 밀어낸다.
단려화는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역시나 아미일까요?”
표식을 따라 향하는 방향엔 아미파밖에 없다.
“그럴 거다.”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죠?”
진무립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중소방파의 공백을 채우느라 사대거파에선 적지 않은 무인을 보냈을 터, 본산에 남은 제자가 많지는 않을 거다.’
고작 이백 명의 적에게 사천을 지탱하는 기둥 하나가 부러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서장에서 본 혈야광인의 힘을 생각하면 마냥 낙관할 수도 없었다.
세가 기운 마도림에게 옛 영광을 되찾아주려 하는 진무립이었지만 타인의 악운을 디딤돌 삼아 위로 올라갈 마음은 없었다.
‘버텨라.’
진무립과 단려화는 내심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법에 박차를 가했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날 무렵.
저 멀리 운무에 휩싸인 아미의 영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대불상 앞에 다소곳이 꿇어앉은 자소는 두드리던 목탁을 천천히 내려두었다.
‘오늘따라 가슴이 주책맞게 왜 이럴꼬.’
어제부터 느껴지던 묘한 두근거림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정말 청성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청성파 장문인 고중선의 짓궂은 미소를 떠올린 자소는 고개를 흔들어 불안함을 털어냈다.
‘쉽게 죽을 늙은이가 아니지. 암, 별일 없을 게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대불상에 공손히 합장을 한 뒤 밖으로 나왔다.
“보현아. 산문은 누가 지키고 있느냐?”
정전의 문 앞에 서 있던 앳된 얼굴의 여승, 보현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보령사저가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생각에 잠긴 자소의 고개가 어딘가로 휙 돌아가더니 표정이 갑자기 핼쑥해졌다.
‘설마. 청성이 아니라 이곳 아미란 말인가?’
비에 젖은 잎새가 초록으로 빛나는 심산유곡의 절경.
아름드리나무들이 마치 장승처럼 좌우로 시립한 가운데 산문으로 통하는 언덕길엔 빗물이 강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에 숨소리까지 감춘 서진환은 커다란 나무 위에 몸을 숨겼다.
‘온다.’
산밑에서 풀잎을 밟아가는 미세한 기척이 느껴진다.
뒤따라 느껴지는 사이한 기운.
점점 늘어나는 발소리에 서진환의 망설임이 짙어졌다.
‘알려야 하나?’
자신이 개입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산촌의 혈사를 떠올린 순간, 절로 반응한 몸은 산문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산문 옆으로 마치 관제묘처럼 작은 가림막에 우의를 두른 여승이 보인다.
서진환은 지체 없이 전음을 보냈다.
[산 밑에 혈교가 왔소. 당장 올라가서 알리시오.]산문을 지키던 젊은 여승, 보령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는 전음을 보낸 이를 찾는 것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서진환은 다그치듯 재차 전음했다.
[당장 올라가서 알리라니까!]움찔한 보령은 마치 감사의 예를 표하듯 허공에 합장을 취하더니 바람같이 사라졌다.
쏴아아!
짙어진 먹구름만큼이나 쏟아지는 빗줄기도 굵어져 간다.
언덕 밑에 도착한 무초걸은 사방을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산세가 수려하구만. 하룻밤 묵어가기에 딱 좋겠어.”
뒤따르던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 염화대주 학철강이 말했다.
“소교주. 정면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마치 유람 온 것처럼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수려한 풍광을 감상하던 무초걸은 산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사조부터 십조까지는 산문으로, 혈야광인을 가진 세 개 조는 입구에서 시선을 끄는 동안 외곽으로 돌아 후방과 좌우 측면으로 들어가라. 염화대는 전투가 벌어지면 광인을 앞세우고 계집들의 실력을 파악한 뒤 참전한다.”
광증을 보일 땐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처럼 섬뜩하기 그지없으나 이럴 땐 누구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존명.”
즉시 예를 갖춘 학철강이 부하들을 이끌고 산문으로 달려 올라갔다.
서진환의 전음을 받고 금정봉에 오른 보령은 복호전 앞을 가득 채운 제자들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단 위에 올라서 있던 가녀린 체구의 여승, 청심당(靑心黨)의 수장 정묘가 보령을 보며 말했다.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 널 데려오려 했다.”
“스승님. 지금 산문 밑에 혈교의 무인들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정묘가 보령에게 물었다.
“네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닌 모양이로구나. 네게 그 사실을 알려준 이가 누구였느냐?”
보령은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전음만 들려왔을 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여승들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혀, 혈교의…….”
“청성이 아니라 이곳이었다니.”
정묘의 시선이 산문 방향을 향했다.
‘스승님의 예감이 적중했구나.’
이 자리에 아미의 모든 승려를 소집한 것은 다름 아닌 장문인 자소였다.
여승들의 동요가 점점 커져갈 때, 복호전의 문이 열리며 황옥불장(黃玉佛長)에 검은 가사를 두른 자소가 나타났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여승들은 일제히 그녀를 향해 합장을 취했다.
합장으로 화답한 자소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듯 빙그레 웃었다.
“두려워할 것 없느니라.”
정묘가 그녀에 이어서 말을 덧붙였다.
“스승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보현보살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말에 제자들이 안정을 되찾아갈 때, 자소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 말은 잘못되었구나. 보현보살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
정묘가 살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오늘의 일 또한 물결처럼 흘러가는 속세의 흐름. 보살께서는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실 게다. 너희는 자신을 믿고 싸워야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 싸운다면 그 믿음이 깨졌을 때 오는 혼란을 이겨낼 수 없다.
자소는 냉정하지만 이들에게 현실을 깨닫게 해준 것이다.
그때 우측의 오솔길에서 십여 명의 고승이 나타났다.
“장문인의 말씀이 옳네.”
그녀들은 정심원(正心院)의 은퇴한 여승들이었다.
자소가 씩 웃으며 농을 던졌다.
“사숙. 아직도 살아계셨는지요?”
자글자글하게 흘러내린 주름으로 눈의 절반을 덮은 노인, 아미산의 최고 연장자인 성허사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년은 지가 오래 놓고 증말.”
성허와 함께 온 노승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문의 어른들은 긴장한 내색 없이 농을 주고받는다.
그 태연한 모습에 제자들의 표정이 한결 밝아질 찰나였다.
자소는 천천히 산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에 실혼인이 있을지 모릅니다. 사숙들께서는 죽지 못한 마물들을 상대해주셔야겠습니다.”
“죽지 못한 마물과, 아직 죽지 않은 노마물의 싸움이 되겠구먼. 껄껄껄!”
성허의 웃음이 바람에 흩어져 갈 때, 마침내 산문으로 핏빛 무복을 걸친 무인들이 나타났다.
“혈교!”
제자들이 일제히 병기를 뽑아 들며 몸을 돌리자 학철강은 공손히 합장을 하며 말했다.
“황공하옵게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나 봅니다.”
제자들 사이로 걸어 나온 자소가 태연하게 물었다.
“청성은 어찌 되었는가?”
“멀쩡합니다.”
“우리 눈을 속였구먼.”
학철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미의 여승은 어림잡아 칠백.
‘생각보다 수가 많이 적군. 이 정도라면…….’
히죽 웃은 학철강이 손을 들었다.
“지워라.”
“존명!”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붉은 바람이 쏘아져 나간다.
앞으로 나선 자소가 불장을 휘두르며 외쳤다.
“감히 어딜 넘보느냐!”
불장에서 쏘아진 강렬한 바람이 붉은 바람을 덮치기 직전, 염화대원들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지더니 발을 멈췄다.
이어서 그들 뒤로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자소는 전신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실혼인!’
제자들이 그녀의 곁으로 달려나갈 때, 붉은 장벽 너머로 관뚜껑이 솟아오르더니 스무 구의 무혼광인이 튀어나왔다.
“사숙!”
“간다.”
벼락같이 달려 나온 성허와 노승들은 제자들을 추월해 시꺼먼 광인들에 맞서 갔다.
학철강은 즉시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명을 내렸다.
“계획대로 움직여라!”
“예!”
염화대원들이 일제히 멈칫하자 무혼광인이 자연스럽게 일선으로 나아간다.
쉬이익!
서로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던 아미의 노승들과 무혼광인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콰콰콰콰콰쾅!
지축이 흔들리고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먹먹한 하늘로 솟구친다.
정심한 내력과 지독한 사기의 격돌.
무혼광인과 정심원의 노승들은 지면에 깊은 골을 패며 주르륵 미끄러졌다.
학철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전장에 시선을 던졌다.
‘괴물들인가.’
무혼광인의 돌진을 막아낸 노승들에겐 가벼운 상처조차 보이지 않았다.
학철강은 놀라고 있었으나 자소의 얼굴에는 그늘이 스치고 사라졌다.
지치지 않는 실혼인과 달리 노승들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다.
‘쉽지 않겠구나. 이 싸움, 길게 끌면 필패다.’
판단을 내린 그녀는 즉시 목청을 키웠다.
“살계를 열어도 좋다!”
“예!”
절절한 외침이 하늘로 치솟는다.
그것을 시작으로 아미산의 금정봉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콰콰콰콰쾅!
무혼광인과 노승들이 숨 막히는 접전을 펼치는 사이, 염화대는 광인의 후방을 지키며 몰려드는 여승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일진일퇴의 맹렬한 공방에 피와 비명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무혼광인의 약점은 등 뒤에 있다. 원진을 돌파해야 사숙조님들을 지원할 수 있어.’
선두에서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던 청심당주 정묘는 수적 우세를 활용하기로 했다.
“청심당은 삼연진(三聯陣)을 펼쳐라!”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푸른 가사를 걸친 여승들이 세 명씩 짝을 짓더니 연수합격으로 염화대를 몰아붙였다.
심상치 않은 기세와 날카로운 공격.
거기에 압도적인 수적 열세까지 더해지자 필사적으로 버티던 염화대의 대형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원진의 중심에서 부하들을 지휘하던 학철강은 즉시 몸을 날려 무너지는 일각의 틈을 채웠다.
“곧 죽을 계집들이 용을 쓰는구나!”
정묘는 즉시 학철강에게 쇄도하며 일검을 쏘아냈다.
쉬이익- 카앙!
선명한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공평하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정묘가 재차 달려들려 할 때, 학철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오셨구나.”
그 순간 여승들의 후방에서 전신의 감각을 마비시킬 듯한 폭발적인 사기가 치솟았다.
공격을 포기하고 훌쩍 물러난 정묘의 눈에, 어느새 복호전의 지붕에 올라선 무초걸이 담겼다.
광기 어린 미소,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사기에 펄럭이는 핏빛 장포.
처마 끝으로 걸어간 무초걸은 오연하게 지상을 깔아보며 말했다.
“몇 놈은 살려둬도 좋아.”
말이 끝나는 순간 후방과 좌우에서 시뻘건 복장에 검은 피부를 가진 혈야광인들이 튀어나와 여승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아악!”
“자, 장문인…….”
염화대를 몰아붙이던 여승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한다.
노승들을 도와 무혼광인을 상대하던 자소의 눈이 격동에 휘말렸다.
‘저들이 혈야광인…….’
사숙들과 연계해 겨우 무혼광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그보다 더한 괴물이 나타났다.
무혼광인보다 훨씬 지독한 사기를 뿜어내며 맹위를 떨치는 광인들은 소문으로 접한 혈야광인이 분명해 보였다.
“사숙! 이곳은 소질이 맡을 테니 저놈들을 부탁합니다!”
콰앙!
성허가 무혼광인의 일검을 받아치며 물었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어서요!”
혈야광인의 보보마다 제자들은 속절없이 무너지며 비명을 내지른다.
시선을 교환한 노승들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혈야광인에게 몸을 날렸다.
“이놈들!”
“킬킬킬!”
지붕 위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웃음소리.
아비규환의 전장을 바라보는 무초걸의 눈에 짙은 희열이 번졌다.
“아미도 별거 아니네?”
순식간에 절반이 넘는 여승들이 차디찬 바닥에 쓰러져 신음한다.
무혼광인에게 둘러싸인 자소는 금방이라도 목이 떨어질 듯 위태로웠으며.
노승 셋이 달라붙은 혈야광인은 되려 그들을 압도하며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거기에 원진을 해체한 염화대까지 반격에 나서자 아미의 여승들은 활로를 찾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갔다.
쓰러진 여승의 숫자가 무려 삼백이 넘어갈 무렵.
“슬슬 끝내볼까?”
히죽 웃은 무초걸이 무릎을 굽힐 때 산문에서 새하얀 섬광이 벼락같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