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17)
◈ 117화. 분노
지붕 위의 섬뜩한 웃음소리와 함께 혈야광인이 여승들을 도륙할 무렵.
산문 옆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서진환은 무너져가는 여승들을 보며 초조함을 곱씹었다.
행여 표식을 잘못 새긴 건 아닌가 싶은 불안한 생각까지 든다.
‘이대로는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한다. 주군께서는 아직이신가?’
자신의 주군 진무립도 사대거파가 멸문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껍데기만 남은 사천 무림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진무립이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까.
“아악!”
“우, 우측이 무너지고 있어요!”
“사숙조님!”
솟구치는 비명, 피륙이 갈리는 섬뜩한 소리.
칠백이 넘던 여승의 숫자는 악에 받친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그것도 상대의 수장이 아직 전투에 참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슬슬 끝내볼까?”
지붕 위의 섬뜩한 목소리가 경내에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순간.
‘주군께서는 반드시 오실 거다. 일단 막는다!’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복면을 끌어 올린 서진환의 발은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품에 들어갔던 손이 귀신같이 뻗어 나가며 허공에 한 줄기 섬광을 쏘아낸다.
쐐애액!
강렬한 파공성과 함께 모든 것을 꿰뚫을 듯 엄청난 기세의 암기가 염화대의 후방을 덮쳐 간다.
“저건 뭐야?”
지붕에서 뛰어 내리려던 무초걸의 고개가 산문으로 돌아갈 때.
후방의 날카로운 기운을 감지한 염화대원이 다급히 돌아서서 암기를 쳐내 갔다.
암기와 도신이 닿기 직전, 쇄도하던 서진환의 손이 좌에서 우측으로 흔들렸다.
쉬익!
자루에 연결된 은잠사가 요동치자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암기가 한순간에 방향을 틀어 도신을 피해갔다.
“피해!”
경악한 염화대원의 경고는 늦었다.
퍼퍼퍼퍼퍽!
곡선을 그리며 선회한 암기가 순식간에 다섯 명의 머리통을 꿰뚫고 서진환의 손으로 회수됐다.
단 한 수에 부하 다섯을 잃은 학철강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웬 놈이냐!”
“그분께선 아미의 몰락을 원하지 않으신다. 네놈들의 뜻대로 두지 않겠다.”
“사천맹주의 부하냐?”
복면에 가려진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그런 편협한 자가 어찌 내 주군이 될 수 있을까?”
말이 끝나는 순간 서진환의 전신에서 활화산 같은 엄청난 기세가 솟구친다.
그와 정면에서 맞선 학철강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구부정한 자세로 지면을 내려보던 무초걸이 히죽 웃었다.
“이거 재밌는 녀석이 나타났네?”
그때 후방에서 혈야광인을 상대하던 노승의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으윽!”
“성화야!”
노승들의 다급한 외침이 안타깝게 울려 퍼진다.
서진환은 무너지는 정심원 고수들을 향해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지금까지 지켜본 걸 보면 수장은 곧바로 나서지 않을 것이다.’
질주하는 이 순간에도, 적의 칼날에 젊고 어린 여승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간다.
미안하지만 이대제자들을 우선시할 수는 없다.
전력이 될 아미의 고수들을 구하고 진무립이 올 때까지 버티는 게 우선이다.
화살처럼 쏘아지는 서진환의 앞을 학철강이 막아섰다.
“멈춰라!”
그의 뒤로 십여 명의 염화대원이 뒤따른다.
서진환의 눈이 매서운 빛을 토해냈다.
‘쓴다.’
은무대 전원은 살성(殺星)의 무공을 익혔다.
하지만 진무립과 스승이 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두 사람이 창안한 검하직천공(劍下織天功)이 바로 은무대의 또 다른 성명절기였다.
탓.
단 두 번의 도약으로 둘의 간격이 일 장까지 좁혀진다.
부릅뜬 학철강의 눈에 서진환의 신형이 빨려들 듯 확장된다.
이어서 서진환의 손이 잔상을 남기고 흔들린다 싶더니 허리춤의 소검이 번개같이 뽑혀 나왔다.
슈아악!
“아.”
학철강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오는 순간.
몰아치는 광풍과 함께, 허공에 수놓인 검영(劍影)의 그물이 그를 무자비하게 찍어눌렀다.
쿠콰콰콰콰쾅!
지축이 진동하고 젖은 흙이 솟구친다.
이윽고 솟구친 흙더미가 바닥에 내려앉았을 때, 자리에 남은 것은 핏덩이가 된 학철강과 십여 명의 염화대원뿐이었다.
청심당주 정묘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대체 어디서 저런 자가…….’
절망의 문턱을 넘었던 아미파 제자들의 눈에 한 줄기 희망이 깃들었다.
순식간에 적을 도륙한 서진환은 어느새 한 구의 혈야광인을 찔러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혈야광인은 노승의 일격을 등으로 받으며 서진환에게 일장을 퍼부었다.
쾅!
강렬한 일격이 터짐과 동시에 후퇴를 모르던 혈야광인이 주르륵 밀려났다.
성허의 주름진 눈꺼풀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혈야광인이 밀려?’
자신들 세 명이 달라붙어도 공세를 잡지 못했던 괴물이다.
그런 적을 단 한 수에 밀어내자 경악을 금치 못한 것이다.
차분히 지켜보던 무초걸의 눈이 짙은 살광으로 번들거린다.
“킬킬킬킬! 다 죽어가는 노인네들은 무혼광인에게 넘기고 혈야광인을 삼진(三陣)으로 돌려라!”
“존명!”
서 있는 아미파의 제자들은 고작 삼백.
백오십이 넘는 염화대가 지치고 상처 입은 여승들을 막아선다.
무혼광인들은 정심원의 녹초가 된 노승들에게 달려들었다.
무려 스무 구의 무혼광인에게 둘러싸여 맹공을 당하던 자소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저 청년은…….’
만일 서진환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자신은 차디찬 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에 달하는 제자들이 쓰러진 지금 안도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녀는 쓰러진 제자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악에 받친 외침과 함께 복잡한 전장이 정리되며 다시금 전투가 이어진다.
순식간에 혈야광인 셋에게 둘러싸인 서진환은 자세를 바짝 낮춰 그들의 사각으로 치달렸다.
쉬이익!
사선으로 솟구치는 소검에 놈의 팔목이 걸린다.
카아앙!
검과 피륙의 격돌에도 기분 나쁜 쇳소리가 고막에 와닿는다.
서진환은 좌우의 일격을 피해 후방으로 미끄러졌다.
콰쾅!
내리찍는 두 개의 발에 지축이 흔들린다.
‘역시 목인가.’
산내촌에서 혈야광인을 상대했던 진무립은 이들의 목이 그나마 약점이라고 했었다.
일 장의 여유를 갖고 거리를 벌렸는데 숨 한 번 들이마실 시간에 지척에서 공격이 들어온다.
‘빠르다. 그리고 강해.’
더불어 숨 막히는 사기까지 전신을 옥죄어온다.
그는 여승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군께서 적사곡을 무너뜨리지 못했더라면 아미는 벌써 끝났을 거다.’
적사곡이 남아있었다면 오늘 나타난 혈야광인은 세 구가 아닌 여섯 구였을 것이다.
번개같이 몸을 날린 서진환은 삼 면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대응해 극성의 환류보(幻柳步)를 전개했다.
쐐애액!
흔들리는 상체 사이로 공격이 지나쳐간다.
지켜야 할 것이 명확했던 아미의 노승들은 혈야광인을 정면에서 상대해야 했으나 서진환은 경우가 달랐다.
자신이 목표가 된 것을 아는 그는 회피를 서슴지 않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일각이 지나갈 무렵, 좀처럼 끝나지 않는 전투에 무초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놈 대체 뭐야?’
자신조차 세 구의 혈야광인은 상대하지 못한다.
서진환의 분전에 아미의 여승들까지 힘을 내고 있다.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새끼들.’
이를 악문 무초걸은 은밀히 땅으로 내려와 검파를 쥐었다.
‘한 수만 성공하면 된다.’
혈야광인이 내뿜는 짙은 사기에 무초걸은 자신의 기척을 감췄다.
그리고 삼 면에서 쏟아지는 맹공에 서진환의 신형이 좌측으로 미끄러지는 순간.
지면을 박찬 무초걸의 번개 같은 일격이 단숨에 그의 허벅지를 갈랐다.
“큭.”
나직한 신음이 귓속을 파고들자 무초걸은 희열에 벅찬 얼굴로 물러났다.
“야! 내 칼에 독 묻었어! 몰아내지 않으면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될걸? 크히히히!”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함께 지독한 사기가 순식간에 혈맥을 파고든다.
‘빌어먹을.’
서진환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방심한 건 아니다.
계속해서 신경은 쓰고 있었으나 혈야광인의 농밀한 사기에 놈의 행적을 잠시 놓친 게 화근이었다.
서진환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남과 동시에, 무혼광인을 상대하던 노승들도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아!’
자소는 한탄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
사숙들이 하나둘 쓰러져간다.
제자들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간다.
‘모두 내 불찰이로다.’
할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서라도, 무간지옥에 영혼이 구속되더라도 시간을 돌려놓고 싶었다.
피눈물을 삼킨 자소는 일성을 토해냈다.
“이놈들!”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온 불가의 사자후가 금정봉을 뒤흔들었다.
“내,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결코 네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정순한 내력에서 비롯된 사자후는 일순 무혼광인의 움직임을 더디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찰나의 순간 공격을 허용했던 무혼광인들은 이내 힘을 되찾아 맹렬한 공격을 재개했다.
“아미의 장문인이라는 년이 고작 입으로 저주를 퍼붓는 게 끝이야? 참으로 한심하구나! 크하하하!”
무초걸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산문 밖까지 울려 퍼진다.
그리고 산문 밖에서 그의 웃음에 대답이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거슬려.”
“응?”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휙 돌아갔다.
그곳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면사 여인과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공자가 서 있었다.
악전고투를 이어가던 서진환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은 바로 진무립과 단려화였다.
‘드디어…….’
눈에 들어온 두 사람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린다.
다리의 중독이 전신으로 퍼진 까닭이다.
잠시 휘청이는 순간 매섭게 솟구친 주먹이 서진환의 복부를 강타했다.
콰앙!
“컥!”
화살처럼 튕겨 나간 서진환이 복호전의 기둥에 처박혔다.
지면을 박찬 진무립의 두 눈에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드드드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경천동지할 기운에 초목이 흔들리고 지축이 몸을 떤다.
전투 중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할 만큼 엄청난 기세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서걱!
빗살처럼 뽑혀 나온 은광검이 거치적거리는 염화대원 여섯 명을 단숨에 찢어발겼다.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버거울 만큼 엄청난 쾌검.
무초걸의 두 눈에 처음으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막아!”
서진환을 쫓아가던 혈야광인이 즉시 몸을 틀어 무초걸의 앞을 막아선다.
진무립은 좌수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단전에서 솟구친 맹렬한 기운이 한순간에 장심까지 치달린다.
엄청난 기세를 머금은 장심에서 일순간 폭발적인 장력이 쏟아져 나왔다.
콰아아아!
장력에 휩쓸린 빗방울이 연기처럼 산화한다.
두 손을 내뻗은 혈야광인이 장력을 마주쳐가는 순간, 놀랍게도 허깨비처럼 그들을 통과한 장력은 무초걸의 눈앞에 나타났다.
“헉!”
막기엔 늦었다.
콰아아아앙!
“크아악!”
마치 포탄에 적중된 바위 파편처럼 무초걸의 신형이 십 장이나 튕겨 나갔다.
경악한 염화대원들이 소리쳤다.
“소, 소교주!”
그들의 외침에 이어 단려화의 다급한 음성이 귓속을 파고든다.
[무립!]조금 전 사용한 공간을 뛰어넘는 장법은 장성(掌星) 소표청의 무월반장(無越搬掌).
팔성(八星)과 마주친 적이 없는 사천에서 그것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테지만 노파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진무립은 개의치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늘한 정적 속에 혈교의 무인들도, 아미의 여승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서서 진무립을 주목한다.
단 한 수에 모두가 압도된 것이다.
자소의 노회한 눈동자가 옅은 떨림을 동반한다.
‘저 아이가…… 광룡 진무립이로구나.’
최근 사천 무림에서, 아니 천하에서 가장 뜨거운 젊은 고수.
비록 만난 적은 없으나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친 초이린을 만난 기억이 뇌리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무립의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지독한 살기는 공간마저 일그러뜨릴 만큼 경악스러웠다.
그 분노는 자신의 사람, 자신이 내린 명령으로 인해 상처 입고 쓰러진 서진환 때문이었다.
혈교도를 눈에 담은 진무립의 입이 작게 열렸다.
“즐거운…… 시간이었는가?”
지금의 나직한 말은 마치 한빙지옥(寒氷地獄)에서 올라온 송제대왕(宋帝大王)의 목소리를 연상케 할 만큼 무겁고 차가웠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검극을 겨눈 진무립의 두 눈이 지독한 살광을 토해냈다.
“지금부턴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즐길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