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21)
◈ 121화. 칼과 술잔의 대화
잔잔하던 빗줄기가 갑자기 폭우로 변신한다.
거의 동시에 뽑혀 나온 자인경과 단려화의 검신이 탁자 위로 교차한다.
치칭!
자인경의 미간이 좁아진다.
‘이 계집!’
경이로운 반응속도다.
분명 먼저 출수한 건 자신이었는데 순식간에 따라잡아 일검을 막아냈다.
손목을 비틀자 그의 검신이 그녀의 검신을 거슬러 올라간다.
스릉!
단려화가 슬쩍 팔을 흔들자 자인경의 검신이 위로 튕겨 오른다.
공격을 뿌리친 그녀는 그대로 무천극의 목을 노려갔다.
쌔애액!
무천극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사선으로 떨어진 자인경의 검신이 공격을 받아쳤다.
쏴아아!
날카로운 쇳소리가 쏟아지는 빗소리에 파묻힌다.
단려화의 검이 옆으로 흘러가는 사이 이번엔 자인경의 검극이 진무립을 노려간다.
쉬익!
손등으로 비를 가린 진무립은 호리병을 기울여 술을 채웠고, 번개같이 상승한 검이 자인경의 검신을 휘감고 솟구친다.
눈앞에서 검과 검이 부딪치는 긴박한 싸움 속,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태연하게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그 태연함 속에는 서로를 탐색하는 팽팽한 신경전이 감춰져 있었다.
‘될까?’
진무립의 머리가 비상하게 회전했고.
‘여기서 잡을 수 있는가?’
무천극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숨이 턱 막히는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 무천극은 손등으로 잔을 덮으며 말했다.
“광룡 진무립.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 반갑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알면 반갑지는 않을 텐데.”
“궁금하군. 말해줄 수 있겠느냐?”
“술을 다 마시면.”
비 내리는 숲속의 작은 공터.
어둑한 하늘 아래 술잔을 놓고 마주 앉은 두 사내.
그들의 머리 위로, 뒤에 선 두 명의 검객이 펼치는 쾌검의 향연은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신비롭다.
치치칭!
무천극은 교차하는 검신 아래로 손을 뻗어 호리병 잡았다.
“잔을 비운 뒤, 한 잔씩 주고받으면 딱이겠어.”
진무립이 물었다.
“부족한가?”
무천극은 웃었다.
“충분하다.”
둘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슈욱!
눈앞으로 투명한 검신이 비를 가르며 지나간다.
호리병의 마개를 연 무천극이 진무립의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느냐?”
“감이 좋거든. 나도 궁금한 게 있다.”
“말해보아라.”
“청성과 아미는 근방이니 처리하기 어렵지는 않을 테고. 점창은 어떻게 할 셈이지?”
사대거파 중 셋은 이곳 사천에 있었으나 점창은 제법 떨어진 운남에 있다.
“사천맹과 가까운 청성도 쉽게 무너뜨렸는데 점창이 어려울까.”
의미심장한 말속에 진심이 담겨 있다.
청성은 아미가 공격당한다는 소문을 믿고 무인들을 파견한 사이 당했다.
잔을 잡아가는 진무립의 머리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확실히 점창에서 사천으로 무인을 파견하는 사이 빈집을 턴다면 살릴 방도가 없다.’
하종보에겐 미안하지만 포기한다.
무천극이 물었다.
“사천맹이 나를 막을 수 있겠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렵겠지.”
아미가 반파 되고 청성이 무너지는 동안 사천맹에서는 이들을 감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사천과 서장의 경계는 족히 수천 리. 병력을 조 단위로 쪼개서 넘었다면 알아채지 못한 것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가까운 청성이 무너질 때까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비각이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계략에 넘어가 다수의 무인이 사천맹을 비운 지금 혈교를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
사천맹은 이들에게 완전히 농락을 당하고 있었다.
무천극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공위맹에서는 가능하겠느냐?”
“그건 쉬운 일이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쌔애액- 치잉!
탁자 위로 교차하는 검신에 빗방울이 튕겨 나갈 때.
진무립의 한쪽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공위맹에는 광룡이 있질 않나?”
거센 폭우가 네 사람을 짓누르는 가운데 무천극이 대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한참을 웃던 그가 말했다.
“참으로 걸물이로구나. 아쉽다. 아쉬워. 내 밑에 있었더라면 크게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진무립은 비릿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보다 유명하지도 않은 놈에게 그런 소릴 들으니 웃기는군.”
무천극의 눈에 짙은 살기가 스치듯 사라졌다.
“갈 길이 머니 그만 잔을 비우고 일어나지.”
팅!
마지막 잔을 비워가는 그들의 목에서 한 치 앞으로 두 자루 검극이 공평하게 멈춰섰다.
면사 속 단려화의 눈빛과 마주 선 자인경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친다.
탁!
잔을 내려둔 두 사내는 목 앞에 드리운 검극을 밀어냈다.
그들이 검을 거두자 무천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뒤따라 일어난 진무립의 손에는 머리통만 한 목함이 들려 있었다.
“그건?”
“술을 다 마시면 말해주기로 했던 게 있었지. 돌아가서 열어봐라. 그 안에 내 답이 있다.”
무천극의 눈짓에 목함을 챙긴 자인경이 전음을 보냈다.
[주군. 광룡은 여기서 끝내야 합니다!]곁에는 서장의 절대자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수천의 무인들과 실혼인이 쉬고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다.
마주 선 진무립과 무천극의 눈빛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힌다.
잠시 후, 무천극은 자인경의 말을 수용하지 않고 돌아섰다.
진무립도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등 뒤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무천극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기대하겠다.”
뒤를 경계하며 무천극을 따르던 자인경이 몸을 돌려 그와 함께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단려화가 그제야 막힌 숨을 토해냈다.
“후우.”
진무립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는다.
“수고했어.”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니네요. 머리 위에선 칼날이 오가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술을 마실 수가 있죠?”
“그와 나의 자리는 제정신으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그리고…….”
“그리고?”
돌아서는 진무립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그럴 땐 먼저 움직이는 놈이 지는 거다.”
단려화는 의외라는 듯 물었다.
“자존심 때문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건 얻을 게 있을 때의 얘기지. 오늘은 자존심을 버려도 얻을 게 없잖아. 어떤 놈인지 봤으니 됐다. 가자.”
진무립은 아쉬움을 삼키며 발을 옮겼다.
가능할 것 같았더라면.
십여 초식 안에 잡을 수 있었더라면.
수천의 수하들이 몰려오기 전에 끝낼 확신이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 정도로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신법을 전개하자 숲속에 숨어 있던 은무대가 재빨리 뒤를 따랐다.
“진환.”
“예.”
“문화에게 연통을 넣어라.”
서진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말씀은…….”
“그래. 고작 일 년 배운 마도림의 무공으로는 쉽지 않은 상대다.”
폭우를 뚫고 달리는 진무립의 눈이 차갑게 빛난다.
“육병흑궤(六兵黑櫃)를 가져와야겠다.”
무천극을 따르던 자인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주군. 기회였습니다. 어째서 저자를 그냥 보내십니까?”
“그 자리에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느냐?”
“속하의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면 흑천대가…….”
자인경의 눈이 부릅떠진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다.
자신과 면사여인이 검을 맞대는 순간, 곧장 튀어나왔어야 할 그들이 나오질 않았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다.
수풀 사이로 걸어간 무천극이 목석처럼 굳은 흑천대원 한 명을 끌고 나왔다.
자인경은 서둘러 그의 마혈과 아혈을 풀었다.
“어찌 된 일이냐?”
그는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속하가 감지하지 못한 사이 기습을 당했습니다.”
자인경이 믿기지 않는 눈으로 말했다.
“흑천대가…… 기습을 허용했다고?”
진무립과 무천극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숲속에 스며든 은무대가 이들을 제압한 것이다.
무천극이 싸우지 않고 진무립을 보낸 이유였다.
쉽게 끝날 상대도 아니었을뿐더러 흑천대를 제압한 자들이 막아선다면 도주를 막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추격전으로 이어질 경우 사천맹으로 가는 길이 지체될 터, 그러면 무초걸이 적을 유인한 의미가 퇴색된다.
무천극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 쉽게 잡힐 놈 같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라.”
“……알겠습니다.”
자물쇠를 부수고 뚜껑을 연 자인경의 눈이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소, 소교주!”
안에 담긴 것은 소금에 절여진 무초걸의 머리였다.
예상치 못한 말에 무천극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초걸이라고?”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에 실핏줄이 다 터져 시뻘건 눈동자.
쩍 벌어진 입속의 으깨진 이빨은 당시의 끔찍한 고통을 짐작하게 했다.
“…….”
형용할 수 없이 무거운 침묵 속,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이들의 귓속을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자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설마 아미에 다녀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미를 지켜내고 이곳까지 왔다고?’
무초걸이 아미파에 도착한 시점을 계산하면, 산술적으로는 매우 빠듯하지만 이곳까지 달려올 시간이 된다.
잠도 안 자고 달리기만 한다면.
“크하하하하!”
느닷없는 무천극의 앙천광소에 자인경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와 함께 초목이 몸을 떨고 대지가 진동한다.
“사천맹을 뒤로 미루더라도, 추격전을 벌여서라도 그놈을 잡을 걸 그랬어.”
자인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반드시 복수의 대계를 세우겠습니다.”
“복수?”
무천극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쯧. 자식이야 낳으면 그만이다. 무능한 자식놈 하나 잃었다고 대업을 그르칠 것 같으냐?”
“그렇다면…….”
발을 든 무천극은 땅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쿵!
지면이 움푹 꺼지자 무천극은 아들의 머리통을 그 안에 집어 던졌다.
“사천맹 전체보다 더욱 위험한 놈을 그대로 보낸 게 아쉬운 게지. 하지만 지금 쫓아봐야 늦었을 것이다.”
발로 흙을 쓸어 아들의 머리를 대충 가린 무천극은 차갑게 돌아섰다.
“가자. 오늘 안에 당가와 사천맹을 끝낼 것이다.”
* * *
사천맹의 중목원.
대전의 문을 박차고 나선 자소의 얼굴이 터질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귀가 있어도 듣질 않으려 하는구나. 고약한 늙은이.”
문득 헤어지기 전 진무립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태. 한천월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들으려 하지 않을 자입니다. 가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한숨을 내쉰 자소는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서월각으로 달려갔다.
중목원의 최상층.
활짝 열린 창문으로 밖을 응시하던 한천월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 서월각으로 가는군.”
서월각주 정연은 자소의 사질이다.
한 발짝 뒤에 선 비각주 정운창이 말했다.
“서월각주는 흔들릴 인물이 아닙니다.”
정연의 스승 자영은 자소의 다섯째 사매다.
차기 장문인과 거리가 먼 그녀의 입장에선 본산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이곳에 남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녀가 장문인의 명을 어길 수 있겠느냐?”
행여 아미제자들이 자소를 따라 이탈한다면 그것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운창은 확신하듯 말했다.
“어기지야 못하겠지요.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적당히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한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보다 사태의 말이 마음에 걸리는군.”
적의 본대에 청성이 무너졌을 거라던 말.
비록 아직은 그녀의 추측에 불과한 말이었으나 청성이 무너졌다면 이건 심각한 일이다.
“대설산맥에서부터 청성까지, 아미로 향한 선발대처럼 소수가 아닌 대규모 병력이 우리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건 불가능합니다. 본대는 아직 산을 넘지 않았습니다. 자소사태의 노파심은 조금 과합니다.”
“음. 선발대에 아미가 반파됐으니 그럴 만하지.”
“주력이 모두 빠진 아미가 혈야광인 세 구와 무혼광인 스무 구를 막아냈다면 이 전쟁은 해볼 만합니다.”
“동의하네. 그간 우리가 혈야광인을 과대평가한 모양이야.”
자소가 진무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한천월의 역린을 건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이들을 안일하게 만드는 독이 되고 있었다.
한천월이 말했다.
“혹시 모르니 청성의 소식을 확인하고 무인들을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대기시키게. 만에 하나라도 대비를 해야지.”
“명에 따르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한천월이 창문을 닫았다.
중목원을 나선 정운창은 즉시 비각으로 돌아와 부하들을 소집했다.
“녹사대는 맹의 전 무인에게 출전 대기를 명하거라.”
“예. 각주님.”
녹의를 입은 무인들이 나가자 정운창은 회색 무복을 입은 이들에게 말했다.
“청성에 무슨 일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전서를 띄우고 사람을 보내거라.”
“예.”
한천월의 명을 이행하고 집무실로 돌아온 정운창의 눈에, 탁자 위로 서신을 넣은 듯한 검은 비단이 보인다.
“드디어!”
부릅떠진 정운창의 눈에 짙은 희열이 번진다.
검은 비단에 새겨진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흑사칠랑(黑死七狼).
과거 천하대전에서 권성(拳星) 대연무를 척살한 천하 최강의 낭인 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