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75)
◈ 175화. 싸늘한 경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솟구치는 흙먼지는 일순 전투의 흐름마저 멈추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그 중심에 있는 백하진의 후각에 지독한 혈향이 스며든다.
어깨를 파고드는 도신의 힘이 느슨해지나 싶더니 먼지 속에서 묵직한 발이 날아들었다.
퍽!
“큭!”
먼지 구덩이에서 튕겨 나온 백하진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쿨럭!”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백하진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전투가 멈춘 사이.
잠시 여유를 찾고 주변을 돌아본 이웅은 마음의 동요를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는가.’
두 발로 서 있는 상천의 무인 중 누구 하나 몸 성한 인물이 없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이가장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이가장 무인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신들을 보호하는 저들은 존경스러울 정도다.
‘우리가 따르던 태산표국은 자신들의 무공을 엿봤다는 이유만으로 본 장을 멸문시키려 했다. 반면 등한시하던 상천은 이곳을 지키겠다고 저렇게 필사적이니…….’
문득 지나온 세월이, 쌓아온 것들이 무색하게 느껴지며 눈물까지 흘러나왔다.
불어온 바람이 솟구친 먼지를 걷어간다.
고개 내민 동녘의 태양이 피에 젖은 악계화를 밝게 비춘다.
다리와 어깨, 등과 가슴을 비롯한 전신에는 도합 일곱 자루 비도가 박혀 있었다.
백하진으로 인해 움직임이 봉쇄된 결과였다.
양산팔수 양경은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저들의 무공이 이 정도였단 말인가?’
어째서 저 두 사람이 은곡 최고의 후기지수로 손꼽히는지 알 것 같았다.
“제법 따끔하군.”
비도를 뽑아내는 악계화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표대 조장 장교충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기세에서 밀린다. 이건 좋지 않다.’
악계화의 상처는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동진상단을 철통같이 봉쇄했기에 상대의 지원군은 계산에도 없었다.
그러나 계산은 빗나갔고 사기가 오른 저들의 반격으로 백표대의 피해는 점점 늘어가는 중이었다.
‘이 싸움은 우리의 예상과 너무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지원군도 그렇지만 모두를 경악케 한 것은 자신들과 같은 상천의 무공이었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
행여 결과가 예상과 반대로 나온다면 태산표국은 기사회생의 기회조차 잃어버린다.
“고송. 기현. 대표두를 모셔라.”
“예.”
번개같이 몸을 날린 두 사람이 악계화의 두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냐? 이 싸움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느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면 소문의 확산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교충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도 은곡의 무공을 익힌 이상 소문은 쉽게 퍼져나가지 않을 거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 악계화의 혈도를 점했다.
“상천은 양산채가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대표두와 백표대를 잃으면 끝입니다.”
장교충이 눈짓하는 순간 악계화를 부축한 백표대가 썰물처럼 이가장을 빠져나갔다.
양경은 손을 뻗어 추격하려는 부하들을 막았다.
“쫓지 마라.”
추격할 만한 여력도 없을뿐더러 추격전은 당초 계획에 없는 일이다.
“다친 자들은 자리에 앉아라.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서둘러…… 부상자를 수습하자.”
먹먹한 목소리에서 아픔이 묻어난다.
일어나지 못하는 동료들이 넷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희생은 천주님께서 반드시 값진 것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자신들의 꿈은 희생 없이 이룰 수 없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녹사대를 비롯한 무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천유가 백하진에게 다가갔다.
“어떠냐?”
백하진의 등에는 자신이 던진 비도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등 뒤로 손을 돌린 그는 비도를 뽑아내며 인상을 썼다.
“월천지망을 썼더라면 잡을 수 있었다.”
“너도 같이 죽었겠지.”
“내가 설마 생각도 없이 그 얘기를 꺼냈겠나?”
한천유가 지혈을 도우며 말했다.
“월천지망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면 그게 뭔지 듣고 싶은데.”
“…….”
서로를 경쟁자로 여기는 이상 쉽게 말해줄 백하진이 아니었다.
“옹졸하긴.”
상의를 벗은 백하진이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이번에는…… 패하지 않았구나.”
한천유의 얼굴에 처음으로 쓴웃음이 번졌다.
백하진의 어깨를 지혈한 한천유가 그 곁에 앉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패하지 않는 정도로는 안 돼.”
널브러진 시신 앞에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짙게 들려온다.
“저들이 없었다면 우린 그날 산채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야. 이번에는 우리가 모두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해.”
구명지은을 입은 것도 모자라 뜻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무공까지 배울 수 있었다.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백하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일 때.
수습을 지시한 이가장주 이웅은 양경에게 다가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본 장을 구해주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태산표국과 척을 지게 되었으나 차라리 잘됐다.
출신과 상관없이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아무것도 모르고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훗날 더 큰 화를 입을지 모를 일이었다.
양경은 힘겹게 두 팔을 들어 예를 갖췄다.
“이가장의 참변을 막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말투를 보아하니 무슨 질문인지 짐작이 간다.
“우리 상천은 은곡의 무공을 익힌 것이 맞습니다.”
홀로 곱씹는 것과 당사자의 입에서 듣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역시 그랬군요.”
상천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선 이웅을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양경은 상천이 지나온 역사를 차분히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 * *
다른 전장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진환이 지원을 갔던 전선무도, 시평이 지원했던 양소방도 치열한 접전 끝에 적을 격퇴할 수 있었다.
피로 얼룩진 시평의 얼굴을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비춘다.
그러나 햇살의 온기도 먹먹한 그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다.
‘늦어서 미안하구나.’
쓰러진 부하들의 숫자는 다섯 명.
백표대의 시신은 열 구가 있었으나 그것으로 죽은 부하들의 원혼을 달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한달음에 태산표국에 쳐들어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도륙하고 싶었다.
그러나 싸움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양소방주 묵운정은 노구를 이끌고 연신 고마워했으나 사람 마음이란 알 수 없는 일이다.
태산표국이라는 대적이 한순간에 사라지면 자신들이 도왔던 자들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상천이 저들에게 절실한 존재라는 것을, 고마운 존재라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당분간 이 전쟁을 끌어가야 한다.
‘그곳에서 편히 쉬며 지켜보아라. 우리는 반드시 너희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 것이다.’
* * *
콰르르릉!
뇌성벽력과 함께 영원할 것만 같던 튼튼한 전각이 무너져 내린다.
햇살보다 강렬한 화마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이곳은 바로 태산표국의 장원이었다.
수백여 명의 표사들.
다급하게 몸을 피하는 그들의 식솔.
텅 빈 건물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진무립은 마치 천신이 강림한 듯 압도적인 위용을 선보였다.
내지르는 주먹과 발에는 망설임이 없다.
앞을 막아서는 자도 없다.
이 자리에 남은 자들은 모두 하급표사들.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고작 일각 만에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적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콰콰콰쾅!
또 하나의 전각을 파괴한 진무립이 차갑게 말했다.
“살고 싶은 자들은 당장 건물 밖으로 피해라.”
그는 시평의 마음을 느낀 사람처럼.
죽은 부하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사람처럼 인정사정없이 장력을 발출했다.
콰콰쾅!
“잃을 게 없다면,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는 자라면 이 자리에 남아있어도 좋다.”
나직한 경고에 표사들은 다급하게 식솔들을 데리고 총단을 빠져나갔다.
조용히 뒤따르는 단려화는 진무립의 넓은 등을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 사람. 아프구나.’
말투의 차가움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예리한 감각은 그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오고 있었다.
백사대와 대표두들은 결코 만만치 않은 자들.
다른 전투에 참전한 부하 중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진무립이 그들에게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은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위기 없이 쉽게 이를 수 있는 꿈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주군은 스스로를 희생해 모든 일을 도맡아왔다.
이번에도 진무립에게 모든 짐을 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부하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상천을 위해, 진무립을 위해 목숨 바치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이 가슴에 스며들자 그녀의 눈가에 뿌연 습막이 번졌다.
입을 열어도 될 분위기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은 충분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수십 채의 건물 중 남은 것은 고작 세 채.
진무립이 남은 것들을 파괴하러 발을 돌릴 때였다.
“이놈!”
진무립과 단려화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는 다급하게 달려오는 사내들이 있었다.
“대체 어디에서 온 놈이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의를 반쯤 풀어 헤친 청년은 청금환의 아들이자 소국주인 청문평이었다.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네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겠군.”
가면을 반쯤 내린 진무립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데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가?”
진무립을 샅샅이 훑어보던 청문평은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흑면탈을 쓴 걸 보니 네놈이 바로 무면산왕이라는 놈이렷다?”
“아직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걸 보니 사태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놈이로군.”
“사태 파악 못 하는 건 네놈이겠지.”
표국이 잿더미가 되었는데 이것저것 따질 만큼 청문평의 수양은 깊지 못했다.
그는 이를 갈며 분노 섞인 독설을 퍼부었다.
“우리 오대표국이 이 일을 묵과할 것 같으냐? 중원무림맹과의 동맹이 체결되면 네놈들의 산채를 남김없이 쓸어버릴 것이다. 그 뒤에 사내놈들은 모두 죽여버리고 계집들은 몸종으로 부릴 것이야!”
독설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진무립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지더니 속삭임처럼 작은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온다.
“본보기로 몇 놈은 죽일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나와주니 고맙구나.”
“공자!”
당황한 수신호위들이 다급하게 검을 뽑아 들 때였다.
청문평의 턱을 움켜쥔 진무립은 그를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직!
“컥!”
깨진 머리에서 피가 튄다.
“멈춰라!”
다섯 명의 호위가 일제히 진무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 멈춰봐라.”
내뻗은 진무립의 좌장에 희뿌연 빛무리가 운집했다.
“가능하다면.”
얼음장처럼 차갑고도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장심에서 가공할 장력이 쏟아졌다.
콰아아!
공간마저 일그러뜨릴 정도로 엄청난 장력이 포탄처럼 뻗어 나가더니 그대로 다섯 호위에게 작렬했다.
콰지지직!
“크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피범벅이 된 호위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진무립은 청문평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큭!”
가면 속 진무립의 두 눈이 지독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다시 말해봐라. 몸종?”
떨리는 청문평의 눈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없는 호위들이 담긴다.
“이, 이러고도 네놈이 무사할…….”
“곧 뒈질 놈이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말이 끝나는 순간 진무립은 그의 머리를 지면에 사정없이 쑤셔 박았다.
쾅!
으깨진 이마에서 피가 튀며 비명이 솟구친다.
“크악!”
진무립은 연신 그의 머리를 쥐고 흔들며 딱딱한 땅바닥에 처박았다.
콰직! 콰직!
“네놈의 아비가 와도, 화무신검이라 떠받드는 운화결이 와도 나를 막을 순 없다.”
바닥에 처박힐 때마다 꿈틀거리던 청문평의 몸이 축 늘어졌다.
진무립은 숨이 끊어진 청문평을 들고 정문으로 나갔다.
정문 밖으로 대피한 식솔들과 표사들, 그리고 인근의 양민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진무립에게 쏟아진다.
“소, 소국주가…….”
그들의 두 눈에 은은한 두려움이 깃들었다.
훌쩍 뛰어오른 진무립은 청문평의 시신을 정문의 대들보에 걸었다.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대들보 위에 우뚝 선 진무립은 마치 세상을 굽어보듯 오연한 시선을 던졌다.
이어서 싸늘한 경고가 표사와 식솔들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달포를 주겠다. 그 안에 떠나지 않는다면, 표국에 살아있는 것은 쥐새끼 한 마리조차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