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76)
◈ 176화. 청금환의 기억
태산표국이 잿더미가 되었다는 사실은 곧장 청금환의 귀에 들어갔다.
굳게 닫힌 동진상단의 정문에서 십여 장 떨어진 거리.
표사들이 주변을 포위한 가운데 청금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뭐라? 무면산왕이 표국에 나타나?”
나이 든 표사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 숙였다.
“예. 그리고 대공자께서…… 그자의 손에 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며 청금환의 신형이 휘청거렸다.
“국주님!”
부축하는 자영을 뿌리친 청금환이 두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럴 리가 없다. 무면산왕은 분명 이 안에 숨어 있단 말이다!”
버럭 악을 쓴 청금환이 정문 앞으로 달려가더니 주먹을 내질렀다.
쿠아앙!
쩌렁쩌렁한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간 정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무면산왕!”
텅 빈 상단의 넓은 마당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문 너머에서 무인의 기척이 느껴졌건만 지금은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청금환이 안채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국주께서는 자리에 멈추시지요.”
중앙 전각의 모퉁이 너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공여소가 나타났다.
청금환의 눈썹이 역팔자로 치솟았다.
“무면산왕은 어디에 있느냐!”
“이 장원에 상천의 무인은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이 안에서 빠져나간 놈은 보지 못했다!”
그녀는 진무립의 부탁대로 침착하게 계획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우리를 협박해 암도를 알아내고는 그곳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안채에 잡혀 있던 식솔들은 이제 막 풀려난 참입니다.”
“분명 정문 너머에서 무인의 기척을 느꼈다.”
“본 상단의 호위가 잠시 밖을 살폈을 뿐입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내부를 살펴보셔도 좋습니다.”
청금환이 부하들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휙 돌릴 때였다.
“국주님!”
다급하게 달려오는 이는 피를 흠뻑 뒤집어쓴 백표대원이었다.
이어서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든다.
“전선문의 습격이 실패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언성이 높아지려 하자 철사대주 자영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듣는 귀가 있습니다.”
당초의 계획은 모든 것을 상천의 짓으로 덮어씌우는 것.
백표대가 제남의 방파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극비 사항이었다.
그는 순간의 분노를 억누르지 못해 목숨을 재촉한 아들과 달랐다.
공여소를 슬쩍 살핀 청금환은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며 밖으로 나왔다.
“전선문 따위가 어찌 백표대를 막는단 말이냐?”
“상천의 살수와 무인들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좌황 대표두를 상대했던 살수는 엄청난 고수였습니다. 지금 대원들은 대표두를 수습해 표국으로 복귀하는 길입니다.”
“살수라고?”
자영이 말했다.
“무면산왕의 곁에는 은밀히 따르는 수신호위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 그들인 모양입니다.”
이어서 먼저 온 백표대원과 똑같은 몰골의 대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양소방의 임무에 실패했습니다. 구표걸 대표두는 청옥공자의 공격에 중상을 입고 퇴각했습니다.”
“이가장으로 향했던 악계화 대표두 역시 부상을 입고 물러났습니다. 지금 표국으로 복귀하는 중입니다.”
“…….”
사람이 상상한 것 이상의 당혹감을 느끼면 말을 잃는다더니 지금의 청금환이 바로 그런 모양새였다.
“백표대가 막혔다면 부인의 말대로 상단은 텅 비었을 겁니다. 서둘러 돌아가 표국을 수습하는 게 좋겠습니다.”
정신이 든 청금환이 백표대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천하에 백표대를 막을 수 있는 건 화령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너희들이 어중이떠중이에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 그놈들은 대체 누구냐?”
셋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청옥공자는 상천이 무성의 의지를 이어받은 진정한 은곡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청금환과 자영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은곡이라고? 그놈들이?”
“예. 모두가 들었을뿐더러 무공을 사용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초식이 묘하게 다르긴 했으나 그들은 분명 저희와 같은 무공을 익혔습니다.”
청금환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부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전쟁에 걸린 것은 산동의 패권만이 아닐 것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단 말이냐?’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려온다.
그대로 돌아선 청금환이 자영을 불렀다.
“자영.”
“예. 국주님.”
“스승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그사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으셨다면 태산 천족봉에 계실 겁니다.”
제남에서 태산까지는 삼백 리.
고수가 신법을 전개하면 왕복으로 이삼일 안에 다녀올 거리다.
“당장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스승님을 모셔오너라.”
“예.”
자영의 신형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청금환은 즉시 표두들을 불러모았다.
“복귀한다. 서둘러라.”
은곡이 나타났다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포위를 푼 표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정문 안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공여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공했구나.’
그녀의 시야에 뒤를 돌아보는 청금환이 담긴다.
공여소는 매우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청금환은 화답하지 않고 고개 돌렸다.
한가롭게 예를 갖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복수인가?’
복수라고 하기엔 너무도 갑작스럽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공교롭다.
잔뜩 미간을 좁힌 그의 뇌리에 잊은 줄만 알았던 수십 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협곡.
흩날리는 눈송이를 맞으며 달려간 청년, 청금환이 작은 동굴로 들어섰다.
“스승님.”
벽에 기댄 파리한 안색의 중년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무슨 일이냐?”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 짙은 탁기가 엿보인다.
낡은 천으로 동여맨 가슴에선 검붉은 피까지 가득했다.
패전 후 추격을 뿌리치며 이곳까지 오다가 당한 부상이었다.
“놈들이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큭큭큭.”
사내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자꾸나.”
힘겹게 일어서는 스승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청금환은 짧은 망설임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투항하는 것이…….”
사내의 눈이 시퍼런 안광을 토해냈다.
“닥쳐라.”
움찔한 청금환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걸음을 내디디며 단호하게 말했다.
“소주(小主)께서 살아계신 이상 회천대계(回天大計)는 끝난 것이 아니다.”
이백여 년 전 천하를 지배했던 여덟 명의 절대자 팔황(八皇).
무성의 사손(師孫)이기도 한 그들은 압도적인 무공으로 수십 년간 천하 무림에 군림했다.
그런 그들의 시대를 끝낸 것은 혜성처럼 나타난 천룡(天龍) 한사운이었다.
천룡의 감각이라 일컫는 여섯 번째 감각을 타고난 그는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팔황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패배한 팔황의 후예들은 세상의 눈을 속이고, 이백여 년에 걸쳐 은곡에서 힘을 키우며 권토중래를 준비했다.
영광스럽던 과거를 되찾기 위한 비책.
천하대전에서 신룡 단소룡에 의해 물거품이 된 그것이 바로 회천대계였다.
동굴의 입구까지 걸어간 중년인, 정사륭은 청금환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은곡이 어디더냐?”
“하루 거리에 무사곡(無沙谷)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전쟁에 반대했던 자들이 숨어있는 곳입니다. 도움을 받기에는…….”
“그게 아니다.”
정사륭의 두 눈이 차갑게 빛났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협곡을 나선 청금환은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멈춰라!”
“도망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루 밤낮을 꼬박 달린 청금환은 입술을 깨물어 혼미한 정신을 일깨웠다.
숨이 턱에 찰 만큼 가빠오고 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쑤셔온다.
하지만 잠시라도 발을 멈춘다면 수십 개의 칼날이 등판을 내리찍을 것이다.
사력을 다해 신법을 전개한 청금환의 눈앞에 수풀에 뒤덮인 협곡의 입구가 보였다.
‘이건 잘못된 게 아니다.’
애써 자신을 정당화한 청금환은 눈을 질끈 감고 수풀에 뛰어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마른 잎새를 뿌리치고 십여 장을 나아간 그의 앞에, 전화에서 비껴간 아늑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침내 발을 멈춘 청금환의 뇌리에 스승의 당부가 떠올랐다.
‘배신자들에게 죽음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만일 우리가 천하를 되찾았다면 저들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영광을 함께 누렸을 것이다.’
이를 악문 청금환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적이다!”
세상을 덮어가는 눈송이는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투명했다.
그러나 이날 무사곡에 쏟아지는 눈송이만큼은 분명 붉은 빛이었다.
“국주님.”
정신을 차린 청금환의 세상이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왔다.
어느새 모두가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가라.”
“예.”
잠시 멈췄던 걸음이 재개되며 이들은 빠르게 태산표국으로 달려갔다.
후미를 따르던 청금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참변을 입은 곳은 비단 무사곡뿐만이 아니었다.
도망치던 황운천의 부하들은 전쟁에 반대한 은곡을 미끼로 던져주고 그사이 몸을 피했다.
‘저놈들은 배신자다. 이번엔 확실히 씨를 말려주마.’
청금환은 자신을 세뇌하듯 되뇌고 되뇌며 결연한 각오를 다졌다.
* * *
첫 번째 전투가 끝난 뒤.
이가장으로 달려간 진무립은 마침내 부하들과 합류했다.
이가장주 이웅은 매우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며 넓은 대전을 내어주었다.
대전의 상석에서, 부하들을 차분히 돌아보던 진무립이 무겁게 물었다.
“피해는?”
시평이 답했다.
“모두 열셋이 죽었고 중상자는 녹사대를 포함해 서른둘입니다.”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저들의 표정이 밝을 수 없는 이유였다.
이들에게서 늘 밝고 긍정적인 모습만 봐왔던 단려화는 지금 같은 무거운 분위기는 너무도 어색하게 다가왔다.
‘역시 전쟁은…….’
그녀가 한숨을 속으로 삼킬 때 백하진이 그답지 않게 먼저 입을 열었다.
“장주에게 관을 부탁했습니다. 시신은 모두 이가장으로 수습해 차후 양산채로 옮겨갈까 합니다.”
겨울이니 부패가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진무립이 짧게 답했다.
“수고했다. 오늘은 다른 전투가 없을 것이니 회복에 전념하도록 일러라.”
“예.”
진무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죽은 부하들의 추모는 이 싸움이 끝난 뒤에 한다. 상관이 처져 있으면 부하들 역시 눈치를 보게 된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평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주군의 말씀대로입니다. 슬픔은 잠시 미루고 임무의 성공을 알려 부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한천유도 특유의 미소를 되찾았다.
“저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해내겠습니다.”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던 장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단려화는 그제야 웃으며 백하진과 한천유를 바라보았다.
“두 분이 벽력도 악계화를 막아냈다면서요? 그 사람은 대표두 중에서도 가장 고강하다고 하던데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군요.”
한천유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무공은 천주님께서 손수 창안한 절세신공입니다. 그깟 놈에게 당할 리가 있겠습니까?”
백하진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내가 없었더라면 넌 죽었을 거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두 사람의 말다툼이 시작된 것을 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조용히 일어난 진무립은 대전을 나섰다.
겨울의 찬 공기가 옷깃을 파고드는 가운데 이가장의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곳은 흙으로 덮고 이리 오게.”
“알겠습니다.”
그들은 전투의 상흔을 수습하고 있었다.
“주군.”
뒤따라 나온 시평이 곁으로 나란히 섰다.
“그래.”
“백표대라는 자들. 그만한 놈들을 국주 혼자서 키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청금환이 진무립과 같은 천재가 아닌 이상 그 많은 은곡의 무공을 홀로 가르쳤을 리가 없다.
진무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저들을 키운 자들이 배후에 있을 거다. 전투 결과를 총사에게 전해라.”
“예.”
시평이 사라지자 진무립은 천천히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을 응시했다.
부러진 채 나뒹구는 칼 조각.
차갑게 식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핏자국.
그중에는 분명 부하들의 피도 있을 것이다.
진무립의 눈에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그 누가 오더라도 상관없다. 반드시 갚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