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184)
◈ 184화. 전투가 끝나고
상천의 무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노존!”
한달음에 달려간 자영이 역이광을 부축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국주부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악계화가 청금환을 살피고 있었다.
‘호흡이 있다.’
악계화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들것을 가져와라!”
분주하게 움직인 백표대가 들것을 만들어와 청금환을 옮겼다.
부상자를 수습하고 빠져나가는 그들을 담장 너머에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청금환의 상태를 재차 확인하라는 명을 받고 온 서진환이었다.
그들이 떠난 뒤, 어둠에 스며든 서진환의 신형이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이가장의 무인들은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였다.
적의 수뇌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진무립으로 인해 마음에 드리운 한 줄기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단전이 으깨진 청금환은 다시 무공을 펼칠 수 없는 몸이 되었고 정체불명의 노고수들 역시 진무립에게 압도당했다.
그들은 상천의 힘을 새삼 다시 느끼며 경외심을 품었다.
이가장 외원의 작은 별실.
흥분으로 가득한 외부와 달리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충호의 시신을 관에 넣은 오광이 잔뜩 인상을 썼다.
“대체 뭐가 좋다고…….”
동료가 죽었는데 밖에선 환호하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것이다.
문밖을 쳐다보던 오광이 한천유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정신을 차린 한천유는 침상에 기대앉아 웃고 있었다.
오광이 버럭 성을 냈다.
“충호가 죽었는데 웃음이 나오냐? 이 새끼야!”
한달음에 달려가 멱살을 잡아가던 오광이 우뚝 멈춰섰다.
웃는 입꼬리와 다르게 그의 눈가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이 고여있었다.
“충호도 웃잖아.”
오광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말처럼 관에 누운 충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게 무림이야.”
“…….”
“잔인하지만 그래.”
오광은 침상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산채의 선배들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친구 한 명이 죽은 것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그러나 양산채의 무인들은 동료를 잃은 지 고작 이틀 만에 모든 걸 털어버린 사람처럼 표정이 밝다.
“싫다. 이런 거.”
은곡에서 나와 살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손에 죽은 상대의 가족들도 아마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기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역시 친구의 죽음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때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싫으면 싫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때까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해지면 된다.”
“양위장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곳 이가장에서 함께 싸운 양산팔수의 수장 양경이었다.
오광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문으로 들어온 양경이 차갑게 식은 충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친한 친구라고 했었지. 슬프겠구나.”
친한 동료를 잃었을 때의 감정이 어떤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여섯 살 때 습격자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고 일곱 살엔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
관 옆에 주저앉은 양경의 눈에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너희도 들어 알고 있겠지만 우리 상천의 식구들은 천하대전이 끝난 시점부터 도망치는 생활을 해야 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우릴 지켜주던 어른이, 나와 함께 도망치던 친구가 죽어 있었지.”
무거운 분위기 속에 한천유와 오광은 양경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동료가 죽었는데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그러나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울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양경의 넋두리 같은 말은 조금 전 오광이 내뱉은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우린 슬퍼할 시간에 앞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 시간에 다음을 준비하지 않으면 더 많은 동료들을 잃게 된다는 걸 몸으로 겪었으니까.”
오광은 그제야 양산채 무인들의 밝은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생각이 짧았구나.’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절로 숙여진다.
“동료들과 같은 꿈을 공유했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그 꿈을 이룰 때까지 슬픔을 미뤄둬도 좋다. 죽은 동료들도 그것을 바랄 거다.”
빙그레 웃으며 오광의 어깨를 두드린 양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에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천주님이 계시다. 천주님의 곁에서, 누구도 우리를 넘보지 못할 만큼 강해지자. 그런 날이 오면 더 이상 오늘과 같은 슬픔은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광은 벌떡 일어나 공손히 예를 갖췄다.
“물론입니다.”
미소를 남긴 양경이 밖으로 나가자 한천유가 쓴소리를 내뱉었다.
“동료가 죽었는데 선배들이라고 슬프지 않을 리가 있겠냐? 멍청하긴.”
“닥쳐. 너한테 듣고 싶지 않아.”
그때 백하진이 열린 문 앞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네가 했던 말은 천주님께 말씀드리겠다.”
“내가 했던 말?”
입을 닫은 백하진은 평소의 그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사라졌다.
오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쟤한테 뭐라고 했냐?”
“아무 말도…….”
그때 월천지망을 전개하던 순간의 기억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네가 녹사대의 대주다.」
통증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난 한천유가 눈을 부릅떴다.
“아, 망했다.”
“뭐가?”
“잠깐 다녀올게.”
겉옷을 챙긴 한천유가 다급하게 문턱을 넘었다.
* * *
진무립의 처소에 상천의 수뇌들이 집결했다.
상석의 진무립부터 좌우에는 단려화와 시평이 앉았고 끝에는 백하진과 한천유가 자리했다.
진무립은 한천유를 치하했다.
“객잔에서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충호는 돌아오지 못했으나 네 판단이 오광을 살린 것이다. 수고했다.”
고개 숙인 한천유가 작게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더 확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지금보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지금보다 더욱 똑똑해져야 한다.
그래야 오늘과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의 뜨거운 열망이 모두에게 전해져 온다.
“더욱 나아진 모습을 기대하마. 그만 돌아가서 쉬어도 좋다.”
한천유는 백하진을 슬쩍 살피며 말했다.
“아닙니다. 천주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멀쩡합니다.”
진무립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녹사대의 대주 자리를 하진에게 양보한다고 했다지?”
한천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뺌했다.
“예? 그런 기억은 없는데요?”
태연하게 시치미를 떼는 모습에 시평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조금 전까지 우울해하던 녀석이 뻔뻔하기는.’
실소를 흘린 진무립은 백하진과 한천유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은곡을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너희들은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은곡을 나와 무림에 출도한 것이 고작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 녹사대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확실하게 수장을 정해줘야 할 때다.
“듣자 하니 은곡을 나선 이백 명 중 절반은 하진을, 절반은 천유를 따르고 있다지?”
“그렇습니다.”
이백의 녹사대원 중 함께 오지 않은 무인들은 대별채에 머물고 있었다.
“녹사대를 백 명씩 나눈다. 오늘부터 너희 둘은 대주가 될 것이다.”
백하진과 한천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시평이 말했다.
“총사에게 서신을 보낼 때 대주의 직인을 내려달라 전하겠습니다.”
“그래.”
이야기가 일단락되자 단려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그 노인 말이에요. 어째서 살려둔 거죠?”
진무립에게 패했다곤 하나 단려화가 보기에 그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였다.
진무립이 굳이 후환을 남겨둔 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진무립은 뒤에 선 서진환에게 물었다.
“청금환은?”
“무공은 회복하기 어렵겠지만 분명 살아있습니다.”
이어서 시평이 말했다.
“태산표국에서 이곳 이가장까지 일정 간격으로 무인을 배치해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다경 안에 소식을 전해올 겁니다.”
진무립은 흡족한 듯 웃으며 단려화를 바라보았다.
“이게 바로 그 이유다.”
단려화는 일그러진 얼굴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혹시 여기에서 나만 바보예요?”
* * *
들뜬 이가장과 달리 참패한 태산표국의 분위기는 초상집을 연상케 할 정도로 무겁기 그지없었다.
병상에 드러누운 역이광은 자신의 실책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실수다.’
무면산왕을 처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게 아니다.
팔존의 둘과 청금환까지 가세하고도 무면산왕에게 참패했다.
지금 가진 전력으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남에 머무는 상천의 전력을 상대할 수 없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터, 태산표국이 은곡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은 머지않아 천하가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태산표국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하나가 의심을 받는다면 다른 오대표국까지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되면 중원무림맹과의 동맹이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회천대계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생긴다.
「돌아가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봐라.」
무면산왕이 남긴 마지막 말.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깨달았다.
‘거기서 죽었어야, 내 손으로라도 죽였어야 했다.’
무면산왕의 혈옥비에 정사륭이 죽었고 자신 또한 당분간 무공은커녕 거동하기 힘들 정도로 당했다.
그러나 청금환이 살아있다.
놈은 교활하게도 그의 단전만 깨뜨리고 목숨을 붙여놨다.
그게 문제다.
다른 오대표국이 결백을 증명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그것은 명줄만 가까스로 붙어있는 태산표국을 그들의 손으로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가 살려둔 청금환은 자신들의 손으로 죽여야 한다.
무면산왕의 차가운 미소가 떠오르자 등골이 서늘해진다.
‘참으로 무서운 자로구나.’
단순히 무공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심계까지 지니고 있다.
더욱 가슴이 쓰라린 것은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오대표국을 살리기 위해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지체할 시간도 없다.
소문이 천하를 강타하기 전에 의혹을 차단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역이광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노존.”
문밖을 지키던 백표대원이 들어왔다.
“국주의 상태는 어떠하냐?”
“살피는 의원에 의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예. 다들 안도하고 있습니다.”
역이광의 눈에 일순 어두운 빛이 스치듯 사라졌다.
“지필묵을 가져다 다오. 밀서를 전할 것이니 봉장인(封藏印)도 가져와야 할 것이다.”
봉장인은 열어 보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 도장이었다.
“예.”
순식간에 다녀온 백표대원이 지필묵과 봉장인을 탁자에 올려두고 나갔다.
힘겹게 탁자 앞에 앉은 역이광은 식은땀을 뚝뚝 흘려내며 붓을 움직였다.
‘회남표국의 정예라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하동교호(下東狡狐)로 불리는 회남표국주 나명도는 눈치가 빠르고 명석한 인물이다.
그라면 자신의 의도를 반드시 알아챌 것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완성했을 땐 역이광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뒤였다.
역이광은 서신을 봉인한 뒤 백표대원을 불렀다.
“들어오너라.”
“예.”
눈앞의 백표대원이 청금환의 무사에 안도한다면 여기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역이광은 내심을 감추고 말했다.
“이대로는 상천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다. 회남표국에 은밀히 도움을 청할 것이다. 너는 당장 이것을 나국주에게 전달하고 오너라.”
“대표두에게 보고하고…….”
역이광은 그의 말을 잘랐다.
“한시라도 지체할 틈이 없다. 악계화에게는 내가 말해두마.”
그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백표대원은 즉시 예를 갖췄다.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