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209)
◈ 209화. 개방의 방주
개봉에 스며든 왕유는 폐부 깊숙이 새벽공기를 빨아들였다.
‘어디에 계시오. 주군.’
상천의 밀문은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위치에 새겨진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왕유는 성벽에서 다섯 집을 건너뛴 뒤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았다.
‘저곳이로군.’
오 장 밖에 이 층 높이의 객잔이 눈에 띈다.
순식간에 이동한 왕유는 처마 밑에 새겨진 밀문을 발견했다.
‘풍령객잔.’
이른 새벽임에도 일터를 찾아가는 양민들이 하나둘 눈에 띈다.
음혼귀영공을 해제한 왕유는 어깨에 곡괭이를 걸친 청년에게 다가갔다.
마지막 계획이 코앞까지 다가온 하루.
별채에 틀어박힌 진무립과 동료들은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하빈의 방으로 거처를 옮긴 진설란은 마치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연신 눈치를 살폈다.
결국 참다못한 이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움찔한 진설란이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채주께서는 자신의 한계를 느낀 적이 없으십니까?”
“없다.”
짧은 대답에 말문이 콱 막힌다.
어색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이하빈이 물었다.
“한계를 느끼느냐?”
그녀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재를 인정받아 속가제자로는 이례적으로 본산의 월하정검(月下正劍)을 익힌 그녀다.
그러나 최근 앞을 가로막은 벽으로 인해 좀처럼 무공에 진전이 보이지 않았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니 참고만 하거라. 나는 무공의 성취에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본다.”
눈을 빛낸 진설란이 자세를 바로 고쳤다.
“경청하겠습니다.”
“네가 십 리 길을 가야 한다. 맹수로 득시글대는 숲에 들어서면 조금 더 빨리 갈 수 있으나 잘 닦인 길로 가면 조금 돌아서 가게 된다. 어느 길을 갈 것이냐?”
잠시 고민하던 진설란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잘 닦인 길로 갈 것 같으나 채주께서 생각하신 정답은 아닐 것 같습니다.”
이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정답은 없다. 어느 길로 가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니까.”
“조금 돌아가도 된다는 말입니까?”
“거친 숲을 가로질러 목적지에 도착하는 자들은 능히 일대종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두 일대종사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 잘 닦인 길이 있다는 건 누군가 그 길을 만들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길을 걷는 것도 틀린 방법이 아니다.
간단한 듯하면서도 왠지 심오한 말이다.
진설란은 의심 없이 물었다.
“채주께서는 당연히 숲을 걷고 계시겠지요?”
“나는 잘 닦인 길을 걷고 있다. 그렇기에 한계는 느껴지지 않는다.”
“채주께서 걷는 길은 누가 닦은 것인가요?”
“나의 주군이다.”
“아!”
그녀는 비로소 이하빈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눈앞의 벽만 보고 있었구나.’
선대의 고수들과 월하정검을 가르쳐준 스승께서 닦아둔 평탄한 길이 있었다.
그럼에도 동료들의 성취에 마음이 조급해져 길을 보지 못했다.
지그시 눈 감은 그녀가 스승과 사저들의 검술을 차분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투명하게 빛나는 이하빈의 눈동자에, 진설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뿌연 서기가 떠오른다.
‘머리가 좋은 아이로군.’
간단한 말 몇 마디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녀가 그만큼 열린 사고를 가졌기 때문일 터.
그렇다면 지금보다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
조용히 밖으로 나온 그녀가 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눈동자가 우측 담장에 닿았다.
[발소리조차 내지 마십시오.]날카로운 전음이 이제 막 담장에 올라선 왕유에게 꽂힌다.
[허허. 이거 무섭구먼.]헛웃음을 삼킨 왕유가 구렁이처럼 담을 넘었다.
[주군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아직 주무십니다.]결전에 대비한 진무립은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고자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왕유가 물었다.
[채륜과 평이를 제외하고 모두 서문 밖에 집결했네. 지금 데려올까?] [행여 적에게 노출되어 계획이 흐트러진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서슬 퍼런 엄포에 왕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슬며시 돌아선 왕유는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미 들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 * *
아침의 상쾌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다향이 막사 내에 짙게 깔린다.
운화결은 다섯 개의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도존 박위문이 허허롭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리 먼 길은 아니었네.”
“이리 몸소 행차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창존 구유비가 물었다.
“우리에게 무면산왕의 상대를 맡길 참인가?”
운화결의 곁에 앉은 설지량이 입을 열었다.
“산동에서 두 분의 노존께서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더불어 네 명의 국주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희들만으로는 대계의 진행이 벅찬 상황입니다.”
박위문의 짙은 눈동자가 설지량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그러나 속내를 감춘 설지량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주의해야 할 노인네야.’
흑무진천도를 극성까지 익힌 박위문의 통찰력은 팔존 중에서도 으뜸이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박위문이 이내 시선을 거뒀다.
궁존 안사독이 물었다.
“상천팔기가 도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가?”
운화결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는 길에 성문 밖에서 마주쳤네. 잠시 시험해보았는데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자들이었어.”
설지량이 말했다.
“염두에 두겠습니다.”
이어서 운화결이 말했다.
“팔기가 왔다 한들 팔존께서 계신 이상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단순히 띄워주기 위한 말은 아니다.
상천의 산채에서 대규모 이동은 감지하지 못했다.
국주들을 잃었다곤 하나 수천에 달하는 표사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팔기와 무면산왕만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것이다.
운화결이 물었다.
“그런데 검존께서는 오지 않으셨습니까?”
거구의 영군천이 찻잔을 가볍게 쥐며 말했다.
“그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같은 팔존에 묶여있으나 검존은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팔존 중 유일하게 은곡 출신이 아닌 그는 좀처럼 이들과 어울리는 법이 없었다.
뜨거운 잔을 가볍게 비운 구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다. 움직일 때가 되면 이르거라.”
그녀에 이어 팔존이 차례로 일어나 막사를 나갔다.
피식 웃은 운화결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여전한 노인네들이로군.”
설지량이 빙그레 웃었다.
“주군을 경계하는 탓이지요.”
“내가 아니라 네 잔머리를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 아닌가요?”
마주 본 두 사람이 헛웃음을 흘릴 때, 막사 밖으로 다급한 걸음이 가까워졌다.
“맹에서 소식을 보내왔습니다.”
“들어와라.”
휘장을 걷고 들어온 무인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내일 밤, 적모개가 국주님과 중검문주의 유착을 입증하겠다고 합니다. 하여 중원맹주가 국주님을 초빙하였습니다.”
순간 두 사람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빛이 스치고 사라졌다.
‘내일이로군.’
뭔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바로 내일 밤이 될 것이다.
설지량과 시선을 교환한 운화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하겠다고 전해라.”
“명을 받듭니다.”
부하가 나간 직후, 운화결이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지량.”
“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변수에 변수까지 머릿속으로 그려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아가씨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인근까지 함께 간다. 양천대를 후방으로 돌려 호위를 맡겨라.”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존재를 떼어두고 갈 수는 없다.
설지량은 예상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지요.”
* * *
표국의 진영에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온한 곳이 있었다.
추레한 움막으로 가득한 개방의 총단.
방주의 낡은 집을 힐끔 쳐다본 지박개가 속으로 읊조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노인네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방주 철표개는 개방의 운영에 달관한 사람처럼 앞에 나서는 일이 없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삼가와 힘을 합해 중원무림맹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보다 열정 있는 방주였다.
그런데 맹이 세워지고 기틀이 잡힌 뒤로는 총단 밖으로 나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물끄러미 처소를 바라보던 지박개가 조당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진 직후였다.
반대편 건물 모퉁이로 주름살 가득한 거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더니 방주의 처소로 들어갔다.
“갔습니다.”
거지치곤 제법 깔끔한 침상에 누워있던 늙은 거지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바로 개방의 방주이자 천하십대고수의 일인, 걸왕 철표개였다.
“개봉은 좀 돌아보았…….”
추영당주 봉추개의 꼬질꼬질한 면상을 본 철표개가 잔뜩 인상을 썼다.
“내 방에 들어올 땐 좀 씻고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거지는 거지다워야 합니다. 신룡이 씻으랬다고 씻고 다니는 방주님이 이상한 겁니다.”
삼십여 년 전부터 지겹게 들어온 말이다.
체념한 듯 고개를 흔든 철표개가 멀찍이 물러나며 말했다.
“개봉은 좀 돌아보았느냐?”
“예. 태산표국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놈들은?”
“예상대로 팔황문의 후신이었습니다.”
흩어진 조각이 머릿속으로 맞춰지기 시작한다.
봉추개가 말을 덧붙였다.
“더불어 상천도 은곡의 후신입니다.”
적모개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물었다.
“뭣이라고?”
“상천이 은곡의 후신이라고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맞춰지던 조각이 다시 흩어져간다.
“이러면 곤란한데.”
혜성같이 등장한 상천의 정체도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대표국은 적극적으로 힘을 키우며 세력을 확장해온 반면 상천은 정해진 영역 밖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천이 은곡의 후신일 것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봉추개가 말했다.
“천하대전이 끝난 뒤 은곡이 둘로 갈라진 모양입니다.”
“둘로 갈라져?”
“태산표국의 국주 청금환이 팔황문의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했던 모양입니다. 반면 상천의 전신이 되는 은곡은 전쟁을 반대하고 관여치 않았다고 합니다. 떠도는 소문이라 완전히 믿을 순 없겠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합니다.”
은곡의 사정에 대해 차분히 설명한 봉추개가 철표개를 설득했다.
“이제 거짓 은둔은 관두고 나설 때가 되신 거 같습니다.”
삼십여 년 전.
팔황문의 매수에 넘어간 일부 장로들로 인해 개방은 자칫 둘로 쪼개질 뻔했었다.
당시 적모개의 스승도 반란에 가담한 장로 중 하나였다.
하여 철표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고자 먼저 선수를 쳤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은둔한 척하며 외부의 입김을 개방 내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개방에 충성을 다할 자와 사욕을 탐하는 자를 가려내는 작업이었다.
봉추개의 추영당은 오로지 방주의 명에만 따르는 특수한 집단.
철표개가 물러난 사이 봉추개는 방도들을 은밀히 감시하며 적의 수작에 넘어간 자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넘어간 놈들을 전부 파악한 모양이로구나.”
“예. 지박개와 조당의 거지 전원. 거기에 일부 분타주들까지 표국의 일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일부 분타주라고 하면 누가 나쁜 놈인지 어떻게 알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읊기가 어렵습니다.”
철표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염병. 하여간 거지새끼들은 줏대가 없다니까.”
봉추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방주는 자기가 그렇게 욕하던 사람과 닮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빠르게 전대 방주를 닮아가는 철표개였다.
아무래도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모양이다.
봉추개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우리도 거집니다.”
“나도 안다. 적모개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삼가의 참관인들이 조사를 함께하는 덕분에 잘 지내는 모양입니다.”
“우매한 스승과 달리 영특한 놈이다. 텃세로 유명한 사천에서 이룬 성과만 봐도 그래.”
“그걸 알면 조금 더 빨리 불러들이지 그러셨습니까?”
“인고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놈이 그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게야.”
“…….”
봉추개의 게슴츠레한 시선에 철표개의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깜빡한 거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