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
◈ 3화. 네놈들은 배가 불렀어
진무립은 조용히 대나무밭을 걸었다.
죽림을 파고드는 은은한 달빛처럼 진무립의 몸속에 잠든 극음의 기운도 팽창하기 시작했다.
신의의 의술과 천양신단의 도움으로 천음지체의 저주에서 목숨을 건졌지만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육신이 성장하며 사내로서의 양기가 점점 강해지자 천음지체의 음기도 지지 않겠다며 덩치를 불렸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은 기신봉진대법(氣身封鎭大法)으로 불안정한 진무립의 내력에 제한을 가했다.
봉인이 풀리는 날은 육신의 성장이 멈추는 순간.
그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진무립이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스물일곱이 된 오늘까지도 미세하게나마 키가 자라고 있었다.
‘완전해지기 전까지는 절대 함부로 무공을 드러내선 안 될 것이다. 지금은 그런 세상이다.’
황하 용왕을 제압하고 돌아왔을 때 들었던 말이다.
자신이 익힌 무공을 생각하면 스승의 당부가 무슨 의미인지 잘 안다.
머릿속으로 스승의 얼굴을 그리며 걷던 진무립이 정신을 차렸을 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작은 공터 앞이었다.
아스라이 달빛이 스며드는 공터에는 선객이 있었다.
대춧빛처럼 불그스름한 얼굴에 날렵한 인상의 청년은 대나무에 기대앉아 술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운치를 아는구나.”
목소리에 힐끔 쳐다본 청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공대를 하는 것을 보니 진무립을 안다.
태상림주를 비롯해 일가에게만 지급되는 무복을 입었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예를 갖추긴커녕 심드렁한 태도로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물론 진무립도 그런 것에 구애받을 사람은 아니었다.
“이름이 뭐냐?”
“유대하(柔待夏).”
“유대하.”
그의 이름을 곱씹던 진무립이 물었다.
“소속은?”
“묵검대 육조 평대원.”
“이 시간에 여기서 뭘 하는 거냐?”
“무인으로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중입니다.”
“마지막 밤?”
“검을 쥘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떠나야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밥만 축내는 사람을 누가 반가워하겠습니까?”
“찔리는 말이군.”
왠지 자신을 빗댄 말 같았다.
림주 일가를 비롯한 일부는 자신을 환영했지만 대다수의 시선은 외림원주 우가산과 다름없다.
그런 시선을 잘 아는 유대하는 진무립을 피해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한 말은 아닙니다.”
“안다. 그 술, 나도 한 모금 줄 수 있겠나?”
유대하의 팔이 슬쩍 움직인다 싶더니 그의 손을 떠난 호리병이 허공에 둥실 떠올라 진무립에게 다가왔다.
쉬이 볼 수 없는 고절한 수법에 진무립은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켠 진무립이 물었다.
“사지육신도, 내력에도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검을 쥘 수 없다는 건 무슨 소리지?”
“당신에겐 저게 무슨 색으로 보입니까?”
유대하의 검지가 향한 곳엔 밝은 달이 있었다.
“노란색.”
“내겐 회색으로 보입니다.”
무채색의 세상. 그것이 유대하의 세상이다.
“그 탓에 임무에서 실수를 했나?”
고개 돌린 유대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진무립이 고작 몇 마디 말에서 자신의 과거를 읽었기 때문이다.
의외라는 듯 진무립을 응시하던 유대하는 그가 내민 술병을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마도림이지만 사천의 지부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가깝게는 동쪽으로 하루 거리에 무산현 지부가 있었지요.”
“있었다?”
“내가 없앴습니다.”
일 년 전 가을, 마도림은 정체불명의 무리가 무산 지부를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유대하를 필두로 열 명의 무인이 지부를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고 칠흑 같은 야밤에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백중세.
하지만 공교롭게도 아군과 적군 모두 비슷한 형태의 무복을 입고 있었고, 난전이 벌어진 사이 유대하의 검에 동료 세 명이 중상을 입고 말았다.
결국 마도림은 지부를 지키지 못한 채 퇴각하고 말았다.
그 뒤로 적 앞에 설 때마다 그날이 떠오른 유대하는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그날 이후 유대하는 사천 무림의 촉망받던 후기지수에서 몰락한 천재로, 최연소 묵검대주에서 최단기간 평대원 강등의 오욕을 뒤집어썼다.
“그날도 오늘같이 달이 밝았더라면······.”
우울한 목소리에 짙은 회한이 깃들었다.
유대하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일어났다.
“본 림의 위세가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나 마도림의 소공자라면 적어도 중경에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겁니다. 무운을 빌지요.”
진무립의 목소리가 돌아서는 유대하의 발을 잡았다.
“어딜 가나?”
“여긴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니 떠날 겁니다. 어디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라도 지을까 싶습니다.”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다.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게 되지만 조금이라도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기대는 비난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버틸 바엔 그냥 떠나는 게 유대하가 생각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진무립이 말했다.
“기다려라.”
순식간에 다가온 진무립의 손이 검집에 닿으려 하자 움찔한 유대하는 다급히 허리를 틀었다.
“뭐 하는 겁니까?”
진무립이 씩 웃었다.
“무인으로서의 기본도 버리지 못한 주제에 무슨 농사를 짓겠다는 거냐?”
“이건 그냥 습관이······.”
“잔말 말고 검부터 내놔봐라.”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유대하는 순순히 검을 건넸다.
이윽고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월광에 빛나는 검이 뽑혀 나왔다.
‘검을 버린다는 놈이 관리는 오지게 잘해놨구나.’
마치 새것처럼 관리된 검에는 유대하의 미련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무인의 자존심인가.”
유대하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마도림의 젊은 무인이라면 대부분 비슷했다.
‘집안은 망해가는데 부릴 자존심은 남아있다는 거지?’
진무립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검을 떠맡기듯 넘긴 진무립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따라와라.”
“다시 말하지만 난 여길 떠날 겁니다.”
돌아선 진무립은 유대하와 눈을 맞췄다.
“네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주마.”
***
유대하는 영문모를 얼굴로 진무립을 따라 마도림을 나섰다.
밤이 깊었으나 이대로 잠들긴 아쉬운 시간, 중경 대로의 밤은 아직 깨어 있었다.
유대하를 대동한 진무립은 걸음을 옮기며 중경의 사정을 파악했다.
“중경의 성 내는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까지 두 개의 대로가 열 십(十)자로 이어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대로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지. 이 중 본 림이 관리하는 구역은 동북로입니다.”
“나머지 셋은?”
“천하대전 전까지는 세 구역을 본 림에서 관리하고 나머지 하나는 인근 방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맡겼다고 합니다. 지금은 남쪽 두 개의 구역을 대검문이, 나머지 하나는 대검문에 협조적인 방파들이 나눠 먹고 있습니다.”
무림방파의 운영에는 많은 돈이 들어간다.
대검문은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막고자 중경의 돈줄을 틀어쥐는 방식으로 마도림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철사방인가?”
“예.”
진무립은 피식 웃었다.
우가산은 처음부터 자신이 이 일을 해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철사방을 때리면 대검문이 나서는 거냐?”
“쉽게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대검문이 마도림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문주의 야망이 사천의 패권을 노릴 만큼 크기 때문이죠. 우리와 싸운다면 그들의 피해도 작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확실한 명분이 있다면 나설지도 모르겠군.”
“대검문과 싸운다면?”
유대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필패.”
오랜 역사를 가진 마도림인 만큼 고수의 숫자에선 비등하나 전체적인 전력에선 밀리는 게 현실이었다.
나직이 숨을 내쉰 진무립이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면 움직일 빌미를 줘선 안 되겠네.”
“뭘 하려는 겁니까?”
“거리 구경은 할 만큼 했다. 청하객잔으로 안내해라. 술 한잔 해야겠다.”
청하객잔은 서북로에 위치한 철사방의 객잔. 유대하는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거긴 철사방의 영역입니다.”
진무립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진무립의 영역이 될 거다.”
***
서북로의 청하객잔.
영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인근의 철사방 무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도림의 소공자라고 찾아온 얼뜨기가 나보다 잘생겼다며?”
“이 새낀 거울도 없고 양심도 없네.”
“씨벌 놈이······. 그래서 무공은 익혔대? 어미가 한때 사천에서 이름 꽤나 날렸다며?”
“당시엔 사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더군. 천음······ 뭐시긴가 하는 불치병 때문에 가출했다던데 산서에서 혼인을 했나 봐. 소공자라는 놈은 십 년 내력에 호신술 정도 익혔다고 하더라.”
술판을 벌인 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가운데 옷을 갈아입은 진무립과 유대하가 객잔 앞에 도착했다.
“임무다. 명을 내릴 거다.”
유대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공자. 아까 듣지 못했습니까? 나는 더 이상 검을······.”
“끝까지 들어.”
진무립의 가늘어진 눈초리가 닿는 순간, 유대하는 마치 눈앞에 맹수가 나타난 듯한 착각에 하마터면 검을 뽑을 뻔했다.
‘이건 뭐냐?’
그 기묘한 눈빛은 사라졌지만 유대하의 등이 축축해지는 것은 지금부터였다.
진무립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에서 잠시 소란이 있을 거다. 밖에서 기다리다가 정리가 끝나면 들어와라. 네가 싸울 일은 없을 거다.”
“혼자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알려진 소공자의 실력을 생각하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진무립은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절대 중도에 들어오지 마라.”
유대하는 뭔가 묻고 싶었지만 진무립의 손은 어느새 객잔 문을 열고 있었다.
“식사 되나?”
시원스러운 이목구비에 수려한 외모의 사내가 나타나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한달음에 달려온 점소이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숙수께서 퇴근하신지라 소채 밖에 안 됩니다.”
“그거면 됐다. 적당히 술 좀 내와라.”
“예.”
점소이가 부엌으로 들어가자 진무립은 대담하게 철사방도의 옆자리에 앉았다.
진무립을 위아래로 훑어본 사내 하나가 말했다.
“근방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보던 얼굴이면 어쩔 건데?”
진무립의 예상치 못한 말에 사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식욕 떨어지는 얼굴 좀 치워라.”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십여 명의 철사방도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 새끼가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피식 웃은 진무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면 달라져?”
얼굴이 유달리 험상궂은 사내, 칠보가 눈을 부라리며 곤봉을 들었다.
“아무래도 매 맛을 좀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구나.”
좌에서 우로,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훑어본 진무립은 천천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래. 그래야지. 이게 흑도의 방식이 아닌가?”
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유대하는 진무립이 남기고 간 말뜻을 헤아리며 객잔을 관찰했다.
‘정리가 끝나면 들어오라고?’
그때 객잔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내부 기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오며 객잔은 한바탕 소란에 휩싸였다.
“죽여!”
유대하의 귀가 쫑긋거렸다.
‘적어도 열 명 이상.’
철사방이 흑도패라곤 하나 단순한 왈패가 아니라 무공을 익힌 흑도방파였다.
진무립을 돕고자 나서려던 유대하는 객잔에 들어가기 전 마주쳤던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
‘분명 뭔가 있는 사내다.’
한순간 자신을 움츠러들 게 만들었던 그 눈빛은 절대 범인의 것이 아니었다.
진무립의 말을 떠올린 유대하는 침착하게 소란이 잦아들기만 기다렸다.
대략 일각이 흐른 시간, 객잔이 조용해진다 싶더니 피투성이 사내가 문을 뚫고 나와 길바닥에 처박혔다.
“끝난 건가?”
피투성이 철사방도를 지나친 유대하는 부서진 객잔 문을 밀어내고 들어갔다.
“소공······ 자?”
유대하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렸다.
씩씩거리며 서 있는 열한 명의 사내는 전부 철사방도. 진무립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건 또 뭐야?”
“저 새끼 싸우지도 못하고 밥만 축내는 마도림의 식충이 아니야?”
유대하를 향한 철사방도들의 눈빛이 퍼렇게 빛날 때, 그의 뒤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다. 여기.”
천천히 고개 돌린 유대하는 철사방도인 줄 알고 지나쳤던 피투성이 사내가 진무립이라는 걸 확인했다.
“소공자!”
마치 혼자 정리할 것처럼 나서더니 자신이 정리당해버렸다.
이 일이 중경에 퍼진다면 큰 망신이 될 터, 유대하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진무립은 검붉게 멍든 얼굴로 히죽 웃었다.
“대검문도 끼어들지 못할 거다.”
유대하는 조금 전 진무립이 중얼거렸던 혼잣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움직일 빌미를 줘선 안 되겠네.’
철사방도들은 모두 멀쩡하다.
얻어맞기만 했는데 대검문이 움직일 리 없다.
마도림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지만 감히 철사방이 넘볼 정도는 아니다.
협상을 잘하면 뭔가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너무 치욕스럽지 않은가?
‘이 사람 제정신인가?’
진무립은 마치 유대하의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네놈들은 배가 불렀어.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부릴 자존심이 남아있나? 이 사치스러운 새끼야.”
미간을 좁힌 유대하가 진무립의 말뜻을 파악하려 애쓸 때, 등 뒤에서 들려온 철사방도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고개를 휙 돌린 유대하가 말했다.
“네놈들이 지금 누굴 건든 줄 아느냐?”
“설마 네가 말한 소공자가 그 소공자를 말하는 거냐?”
“그렇다. 이분은 본 림의 소공자시다.”
철사방도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순간, 마도림의 표식을 단 십여 명의 무인이 객잔 앞에 나타났다.
진무립을 주시하던 외림원주 우가산은 그가 싸우지도 못하는 유대하만을 대동하고 마도림을 나서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무인들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선두에 선 외림원주 우가산은 바닥에 드러누운 진무립을 보곤 대경했다.
“소공자!”
우가산을 본 진무립은 그대로 드러누우며 중얼거렸다.
“완벽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