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spicious little prince is a world's top ten masters RAW novel - Chapter (323)
◈ 323화. 방점
소화산이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차오를 무렵.
북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야산에는 정반대의 긴장감이 머물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는 앙상한 숲속.
“크으으.”
악다문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온다.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에선 피를 뚝뚝 흘려내는 노인은 복령천의 군사 약환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수법이란 말이냐.’
천진서의 검에 독이라도 발라져 있었던 것인지 이틀이 지나도록 피가 멎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에 기대앉은 약환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주군.’
황천패가 지는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칠십여 년을 살아오며 봤던 이들 중 가장 완벽한 무인.
이 세상에 그를 단신으로 상대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 황천패가 죽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나 태종무단이 내지른 승리의 함성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을 것이다.
약환의 얼굴에 단 한 번 본 사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진무립.’
압도적인 두 명의 절대자를 거침없이 기습하는 배짱.
완벽한 계획으로 호위부터 제거한 심계.
수만의 적이 인근에 있음을 알고도 주눅 들지 않는 눈빛과 당당함은 적이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클클클. 애송이. 아직 끝난 것은 아니란다.’
숲속에 숨어 부상을 치료하던 약환은 황천패의 죽음이 알려지는 순간 그곳을 벗어나 이곳 동조산까지 이동했다.
주군이 죽었음에도 여기까지 질긴 목숨을 이어온 까닭은 아직 만일에 대비한 안배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가면 세상의 눈을 속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차갑게 눈을 빛낸 약환이 짙어지는 어둠과 함께 산중의 수풀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바닥을 유심히 살피던 약환이 커다란 나뭇등걸 아래 박힌 쇠꼬챙이를 발견했다.
‘여기 있었구나.’
약환은 거침없이 그것을 잡아당겼다.
크르르르…….
지면이 나직한 소음과 함께 흔들리더니 나무가 우측으로 미끄러지며 좁은 계단이 드러났다.
퀴퀴한 냄새가 지독하게 풍기는 어둠 속의 공간.
크게 숨을 들이마신 약환이 입을 꾹 다물고 안으로 몸을 던졌다.
크르르…….
나무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계단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순식간에 움직인 시꺼먼 그림자가 동굴로 날렸다.
‘바로 죽이지 마라. 가능한 곳까지 추격해서 싹을 완전히 잘라내야 한다.’
진무립의 전음을 되새기며 조용히 동굴에 진입하는 인물은 바로 악계화였다.
팔황문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했기에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고 두 번째 전쟁을 겪어야 했다.
분지를 기습하던 순간.
진무립은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 찰나의 시간 지시를 내린 것이다.
악계화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억누르며 여기까지 따라왔다.
추격은 어렵지 않았다.
놈이 흘린 핏자국만 따라오면 됐으니까.
어둠 속, 악계화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복령천의 군사.’
이제 기나긴 추격전에 방점을 찍고 복수를 완성할 때가 왔다.
좁은 통로를 따라 십 장가량 나아가자 오 장 남짓한 공동이 나타나며 청량한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사방이 선반으로 가득한 공간.
만일에 대비해 오대표국이 벌어들인 자금으로 수십 년간 은밀히 모아온 영약들이었다.
횃불에 불을 지핀 약환은 좌측 벽으로 걸어가 시꺼먼 목함을 꺼냈다.
“크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영약들만 있으면 백화무단과 같은 자들을 언제든지 키울 수 있다.
약환은 다리와 옆구리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누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목함을 열어 검은 단약을 집어가는 순간이었다.
서걱!
벼락같이 짓쳐 든 악계화의 도가 그의 손목을 싹둑 잘라버렸다.
“크아악!”
대경실색한 약환이 목함을 놓치며 다급하게 물러났고, 악계화는 도망치는 놈의 다리를 그대로 잘라버렸다.
“카악!”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공동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다.
악계화의 서늘한 도신이 약환의 목에 닿는다.
“태산표국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이냐?”
“네, 네놈은…….”
부릅뜬 약환의 눈동자에 악계화의 살기 짙은 눈빛이 가득 담긴다.
“태산표국 대표두 악계화다. 곱게 죽고 싶다면 순순히 질문에 답하라.”
“…….”
악계화를 담던 시선이 이내 잘린 손목과 다리로 향한다.
“클클클…….”
마지막을 직감한 약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배신자로구나.”
악계화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다.
“평생 충성을 바쳐온 부하를 그렇게 쉽게 내치는 개새끼가 감히 배신을 논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악계화의 도신이 약환의 남은 팔을 잘라버렸다.
서걱!
“크윽!”
억눌린 신음과 동시에 빠르게 움직인 악계화의 손이 약환의 상처를 지혈한다.
“말해라.”
자포자기 상태로 킬킬거리며 웃던 약환이 벽에 등을 기댔다.
‘갈 땐 가더라도 이대로 쉽게 갈 순 없지.’
약환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치듯 사라진다.
“인간사에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아느냐?”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욕망이다.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잡아먹는 진짜 괴물이지. 킬킬킬!”
한참을 웃던 약환은 눈짓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소 시간은 걸리겠으나 이 안에 있는 영약들이라면 백화무단과 같은 자들을 다시 키울 수 있다. 저쪽의 작은 방 안에는 그들이 익힌 절세 신공의 비급이 있지.”
이어서 악계화의 귀로 마치 악귀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스며든다.
“어떠냐? 강자들을 거느리고 천하를 거머쥐고 싶지 않으냐? 이젠 네가 하는 거다.”
“…….”
“따지고 보면 청금환의 죽음에는 광룡도 개입되어 있질 않으냐? 광룡의 천하를 네가 빼앗는 게야.”
“미친 노인네로군.”
“킬킬킬…….”
미친 듯한 약환의 웃음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더니 이네 칠공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 심맥을 끊은 것이다.
빛을 잃어가는 약환의 눈동자에 찌푸린 악계화의 얼굴이 담긴다.
‘네놈은 결국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저 방문을 열 것이다. 그렇다면 네놈은…….’
생각을 채 끝맺지 못한 약환의 두 눈이 완전한 암흑에 빠져들었다.
“……”
멈춰선 악계화의 두 눈이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백화무단이라고?’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눈부신 아침 햇살이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흰 눈이 소복한 야산.
두 명의 무인이 지친 육신을 이끌고 힘겹게 산을 오르고 있었다.
“분명 이 근처로 이어졌는데.”
“그나마 전투가 빨리 끝나서 다행이군. 더 늦었으면 바람에 흔적이 전부 지워졌을 거다.”
대화를 나누며 산을 오르는 이들은 바로 육군명과 유대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혼절한 진무립 대신 두 사람이 약환을 추격하는 악계화를 따라온 것이다.
육군명이 가쁜 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빨리 끝내고 가서 좀 쉬고 싶군.”
유대하가 잠시 허리를 펴고 주변을 돌아본다.
“놈의 수급을 베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다.”
“나도 알아. 이번과 같은 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으려면 말이지.”
그때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비탈 위로 돌아갔다.
“왔느냐?”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약환의 수급을 든 악계화가 서 있었다.
“오.”
육군명이 반색하며 한달음에 위로 올라갔다.
“수고 많았다. 별일은 없었어?”
짧은 침묵 끝에 악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었다.”
공동은 철저하게 다시 감춰두었으니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도 찾지 못할 것이다.
유대하가 비탈을 올라오며 악계화를 쳐다본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다쳤습니까?”
“아니다. 그만 돌아가…… 쿨럭!”
말을 하던 악계화의 허리가 갑자기 낫처럼 휘더니 검붉은 핏덩이를 쏟아냈다.
‘설마!’
지나온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가운데 악계화의 머리에 합리적인 의심이 번진다.
‘비급이 있는 방이었나?’
방문을 여는 순간 청량한 공동의 공기와 달리 지독한 약 냄새가 물씬 풍겼던 게 떠오른다.
그의 의심처럼 공동에 딸린 방문을 여는 순간 중독되고 만 것이다.
약환이 당초 먹으려고 했던 검은 단약이 바로 해약이었다.
놀란 유대하와 육군명이 다급하게 손을 내뻗는다.
“악공!”
바닥으로 쓰러져가는 악계화의 뇌리에 어젯밤 약환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욕망이야말로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지. 킬킬킬!’
악계화의 눈앞에 공동의 영단과 채 읽지 못한 비급들이 아른거린다.
그는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철저하게 감춰둔 공동은 천하 영웅이 될 이의 손에 의해 다시금 열리게 되리라는 것을.
* * *
천하를 뒤덮은 전운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햇살이 만천하를 살포시 감싸 안는다.
화령도와 소화산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치러진 두 번의 격전.
복령천과 천마신교의 야망이 완전히 부서진 두 번째 천하대전이 완전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시린 바람 속, 하얗게 물든 세상이 햇살에 부딪혀 아름다운 빛을 쏟아내는 가운데.
수만에 달하는 무인들이 눈 덮인 광활한 들판에 발을 내디뎠다.
지나온 산을 슬쩍 쳐다본 탁소혜가 두 팔로 몸을 감싸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산이라면 지긋지긋해. 두 번 다신 안 갈 거야.”
투백비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곳도 화령도에 있는 산인데요.”
탁소혜가 곱게 눈을 흘긴다.
“누님이 그렇다면 그러려니 하는 거지. 이 새끼는 눈치가 없다니까.”
“…….”
양천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미운 정도 정이라고, 너희들 그러다 눈 맞는 거 아니냐?”
탁소혜의 고개가 휙 돌아간다.
“죽고 싶어?”
“하하하!”
양천의 기분 좋은 웃음이 멀리 퍼져 나간다.
뒤를 슬쩍 쳐다본 수문화가 들판에 진입하며 흐트러진 대열을 다시금 정비케 했다.
“양민에게 두려움을 주면 안 됩니다. 개봉에 도착할 때까지 간격을 유지하십시오.”
수문화의 말에 좌우를 살핀 무인들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간다.
사천의 무인들을 돌아본 초무강이 초평천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상 없습니다.”
“수고했다. 광룡대의 상태는 어떠하냐?”
“아직 깨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나…… 피로가 겹쳐서 그렇지 크게 위중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깊은 잠에 빠져든 광룡대는 수레에 실려 이동하는 중이었다.
“체온이 내려가지 않도록 수시로 살펴야 한다.”
“예.”
그때 강유월과 하종보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림주께서 고생이 많으시구려.”
초무강이 멋쩍게 웃었다.
“고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등 뒤에서 자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흘. 이렇게 다시 함께 돌아가게 되니 반갑구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평생 경험해온 것보다 더 많은 풍파가 세상을 휩쓸고 간 기분이다.
이 모든 것이 진무립을 만난 뒤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강유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결국 해냈습니다.”
이어서 하종보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평천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대단한 손자를 두셨습니다.”
고개 돌린 초평천의 눈동자에, 대열의 중앙에 높게 솟은 깃발과 마차가 떠오른다.
「구천영웅(救天英雄) 광룡(光龍) 진무립.」
생사조차 알 수 없던 딸아이가 남긴 씨앗.
그 작은 씨앗은 훌륭하게 싹을 틔워 종국엔 천하를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에 뿌연 습막이 번진다.
‘이린아.’
모처럼 마음속으로 딸의 이름을 되뇌인 초평천이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슬며시 들어 올린 눈동자에 청명한 하늘 위로 그리운 얼굴이 그려진다.
초평천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려다오. 언젠가 내가 네 곁으로 가게 되는 날, 네 아이가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전해주마.’
청명한 햇살이 머무는 들판.
넘실거리는 뜬구름이 마치 미소짓듯 흩어져가는, 정월 초닷새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