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64
“도둑이 주머니에 넣어 놨더라고.”
그 얼굴에서 능청스러운 미소가 철철 흘러넘쳤다.
‘알고 보면 저승사자가 아니라 900년쯤 묵은 능구렁이일지도⋯.’
따지는 듯한 초원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승준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올려놓고 올 테니 초원 씨는 부모님이랑 차에 들어가 있어요.”
그는 차 키를 넘겨주곤 건물로 들어갔다.
“가족 이야긴 물어보지 마.”
차 안에 앉아 부모님의 맹렬한 질문 공세에 철저한 방어를 펼치던 초원이 문득 생각난 듯 당부했다.
“왜?”
역시나 호기심 많은 원태는 앞좌석을 향해 몸을 숙이며 캐물을 자세를 취했다.
“그냥 물어보지 마. 내가 나중에 따로 얘기해 줄게요.”
“왜? 묻지 말라니까 더 묻고 싶잖아. 아빠 궁금하게시리.”
“아이고, 이 양반아. 묻지 말라면 좀 그런가 보다 해.”
화영이 철없는 남편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는 순간,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고 초원의 무릎 위로 검은 패딩 점퍼가 떨어졌다. 급하게 나오느라 겉옷을 못 챙긴 걸 승준은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미끄러지듯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엔진이 달궈지면서 히터에서 나온 열기가 차 안을 훈훈하게 덥히기 시작했다.
“그래, 자네가 우리 초원이네 팀장이라고?”
초원의 뒤에 앉은 원태가 몸을 바짝 앞으로 기울였다.
“네, 맞습니다.”
“우리 딸 똑똑하고 성실해서 일 잘하지 않나? 그래서 반했나 보네.”
“하하, 네.”
그것 때문에 반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승준은 초원의 살벌한 미소에 기가 눌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자앤데 위험하고 험한 일은 안 시켰으면 좋겠네.”
“그래서 저도 초원 씨가 그만두고 결혼하면 좋겠는데 말이죠.”
지원군이 간절했던 승준은 초원의 부모님 앞에서 슬쩍 결혼 이야기를 흘렸다.
“그래, 초원아. 관두고 결혼해.”
“아, 쫌⋯.”
원태가 잘됐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지만 초원은 난감함에 짜증만 냈다.
“얘가 못 관두는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승준의 뒤에 앉아 있던 화영이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아, 그건 제가 심⋯.”
심령관리팀에 물어봤더니 걱정할 필요 없다 했다고 설명하려는 찰나 초원의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마조마하게 뒷좌석을 가리키는 눈짓을 본 승준은 그제야 초원의 아버지는 특관청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왜? 뭔 사정인데?”
앞좌석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원태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캐묻기 시작했다.
“아, 학자금 대출. 돈 벌어서 다 갚기 전엔 결혼 안 할 거야.”
초원이 적당한 핑계를 찾아내자 나머지 두 사람은 몰래 안도했다.
“그럼 관두고 의사를 할 것이지. 아무리 공무원 철밥통이 최고인 세상이래도 글치.”
“아, 됐어.”
적당한 줄 알았는데 허술한 핑계였나 보다. 할 말이 없어진 초원은 괜히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렇게 많이 남았어?”
“아, 아빠 딴 얘기 해.”
“우리 집이 그렇게 없는 집은 아닌데⋯.”
딸의 남자 친구 앞에서 돈 이야기가 나오자 민망해진 원태는 괜히 묻지도 않은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 위로 언니가 연년생이고 밑에 또 남동생이 있어 가지고 우리가 얘 예과까지만 등록금 내주고 그다음부터는 못 내줬거든⋯.”
“괜찮아. 내 공부 내 돈으로 해야지.”
“에이, 엄마 아빠가 혼수로 내줄 테니까 얼른 시집 가.”
“아, 초원 씨 혼수 안 해 와도 됩니다. 제가 집도 해 오고 대출도 갚을 테니 몸만 오면⋯.”
“헐, 그걸 승준 씨가 왜 갚아요?”
“왜 갚냐니⋯. 부부는 일심동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까, 장인어른?”
“그렇고말고.”
오늘 처음 본 남자들끼리 손발을 척척 맞추며 초원을 코너로 몰아넣고 있었다. 여기까지 했는데도 그녀는 좀처럼 져주지 않고 이젠 승준을 향해 그만하라는 듯 눈을 흘기고 있었다.
“초원 씨가 고집이 세네요.”
고집 세다는 말에 시선이 한층 따가워졌지만 승준은 모른 척 싱긋 웃었다.
“하긴 그렇지? 얘가 엄마를 많이 닮아서 이래.”
“이 양반이, 진짜.”
“아! 아파.”
원태는 꼬집혀 얼얼한 허벅지를 문지르며 씨익 웃었다.
“초원 씨가 장모님을 많이 닮아서 이렇게 미인인가 보네요.”
그 말에 두 여자의 입꼬리가 동시에 귀에 걸렸다.
“맞아, 우리 초원이 엄마가 좀 미인이어야 말이지.”
자칭 사랑꾼인 원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준의 아부에 숟가락을 떡하니 얹었다.
“승준 씨도 참 잘생겼어요.”
화영이 운전석 시트를 붙잡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칭찬을 들었으니 입을 싹 닦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관상도 좋고 키도 크고 훤칠하니 잘생겼네.”
“감사합니다.”
“초원이 엄마야, 그래도 젊었을 때 내가 더 낫지 않나?”
“아, 진짜. 이 양반 왜 이렇게 주책이야.”
뒷좌석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던 승준은 웃지 않으려고 기를 써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유, 얘가 미리 말했으면 승준 씨가 좋아하는 반찬도 준비했을 텐데.”
“아닙니다. 솜씨가 워낙에 뛰어나셔서 전에 해 주신 반찬 전부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호호, 그래요? 아이고, 얘는 말 좀 하지. 그럼 엄마가 더 담아왔을 텐데.”
“그나저나 딸, 오늘 밸런타인데인데 아빠 초콜릿 안 줘?”
“엄마한테 받아.”
그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말투에 승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참 나, 내 딸이라 이런 말 하면 내 흉이지만 얘가 참 무뚝뚝해.”
“하하, 무뚝뚝하면서도 귀여운 게 초원 씨 매력이죠.”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에 초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차가 길가에 멈춰 서자 초원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조 서방.”
초원은 푸훗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봐 놓고 조 서방 소리를 하는 아버지도 초면에 장인어른이라 부르는 승준 못지않았다.
“우리 초원이랑 싸우지 말고 많이 예뻐해 주고⋯.”
“네, 걱정 놓으십쇼.”
원태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화영은 승준의 어깨를 고맙다는 듯 두드렸다.
“아쉬워라. 오늘 약속만 없었어도 식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다음에 제가 좋은 자리 마련해서 모시겠습니다.”
“아니지, 우리가 초대해야지. 다음에 우리 집에 놀러 와요.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요.”
“네, 꼭 가겠습니다.”
차에서 내려 길가에 선 부모님에게 초원은 손을 흔들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쪽을 보며 선 화영의 손을 원태가 슬그머니 붙잡았다. 그걸 쌀쌀맞게 뿌리치는 화영의 모습을 백미러로 보던 승준은 웃었다.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초원 씨가 진짜 장모님을 많이 닮았구나.”
“엄마를 안 닮으면 누굴 닮아요.”
좋으면서 무뚝뚝하게 구는 것도 유전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다음번엔 셋이서 뵈면 되겠네?”
승준의 얼굴에 애틋한 기대감이 번지고 초원은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우튀김 해 주는 오빠
초원은 아일랜드 카운터에 허리를 기댄 채 눈앞의 예술 작품을 감상했다.
‘으음, 저 너른 등짝 매우 마음에 들어.’
‘심지어 이름도 잘생겼어.’
‘거기다가 맛있는 것도 잘 해 주잖아.’
‘내 거라니 좋아, 아주 좋아.’
가스 불 앞에 서서 무언가를 분주하게 튀기고 있던 승준의 허리에 가느다란 두 팔이 착 감겼다.
“기름 튀어요.”
뜨거운 기름이 튀어 데기라도 할까 걱정됐던 승준은 왼손으로 초원의 두 손을 감쌌다.
“다 내 거야, 새우튀김. 여기 있는 새우튀김 다 내 거야.”
바삭한 새우튀김을 먹을 생각에 초원의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건 알겠는데 튀김을 해 줄 때마다 도대체 저 요상한 노래는 왜 부르고 있는지 승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거 안 불러도 아무도 안 뺏어 가는데.”
“헐, 이 노래 몰라요?”
“뭐? 그거 있는 노래야?”
지금까지 초원이 제멋대로 지어 부른 노래인 줄 알았던 그는 정말 있는 노래라는 말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헐, 이 명곡을 모르다니.”
초원은 새삼 건널 수 없는 세대 차이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원래는 새우튀김이 아니라 감자튀김이에요.”
“어⋯.”
승준은 딱히 뭐라고 대꾸해 줘야 할지 몰랐다. 감자튀김이어도 요상한 건 매한가지였다. 다행히 초원은 별말 없이 아기 원숭이처럼 매달려 등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근데 인간적으로⋯.”
“네?”
“새우튀김 해 주는 남자랑은 혼인신고부터 하는 게 도리 아닌가?”
또 튀어나온 혼인신고 타령에 초원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계절 하나 지났어요.”
“내가 장담하는데, 초원 씨 사계절 못 채우고 나랑 혼인신고 한다. 내기할래요?”
“아뇨.”
이 남자와 내기를 하면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 무슨 짓이든 벌일 것 같아 초원은 재빠르게 거절했다.
“영양제는 먹었어요?”
눈 뜨자마자 뜨겁게 불태웠던 밸런타인데이 후, 승준은 종합 영양제를 사 오더니 매일 출근 전에 하나씩 챙겨 주기 시작했다. 그러던 게 오늘은 주말이라 잊고 점심때가 되어서야 생각이 난 것이었다.
“⋯네.”
“거짓말은⋯.”
승준은 튀김 젓가락을 놓고 찬장 문을 열었다. 영양제 한 알을 꺼낸 그는 물 한 잔을 따라 같이 내밀었다.
초원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다 마지못해 영양제를 받아 삼켰다.
임신이 될 리가 없다는 걸 아직도 털어놓지 못했다. 말할 타이밍을 좀처럼 찾지 못한 탓이었지만 사실 말해도 좋을 타이밍이란 건 애초에 없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면 망치고 싶지 않아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더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라며 미루는 건 다 저 좋자고 하는 비겁한 핑계일 뿐이었다.
‘그냥 이렇게 시간 끌다가 ‘어이쿠, 안 생기네. 그냥 딩크족이나 합시다!’ 이래야 하나?’
이 남자가 떠나지 않을 걸 안다 해도 실망시키는 건 역시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끌다 늦게 말할수록 초원은 비겁한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였다.
새우에 빵가루를 묻히느라 바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원은 결심한 듯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치익, 캔 따는 소리에 휙 고개를 돌린 승준은 초원이 맥주 캔을 입에 가져가기도 전에 낚아챘다.
“제정신이에요?”
초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승준이 맥주 캔을 단숨에 비우더니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걸 부루퉁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거나 먹어요.”
그는 떼쓰는 세 살짜리라도 달래듯 적당히 식은 새우튀김을 손에 쥐여 주었다. 초원은 허무한 한숨을 내쉬곤 튀김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흠, 맛있네.”
“누가 한 건데.”
꼬리까지 다 먹어 치우자마자 접시에서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아직 뜨거운 튀김을 호호 불던 초원의 시선이 마치 무언가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기라도 한 듯 움직였다.
‘배고픈가?’
초원은 적당히 식은 튀김의 꼬리 쪽을 입에 물고 까치발을 들었다. 승준을 향해 고개를 내밀자 그의 얼굴에 환하게 미소가 번졌다. 새우튀김의 양쪽 끝을 물고 있던 두 입술이 서서히 겹쳐지고 쪽쪽 소리가 이어졌다. 그 순간 초원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아까만 해도 옆에 서 있던 지박령이 못 볼 꼴이라도 본 듯 휙 나가 버렸다.
“승준 씨, 전 여친 중에 귀신 된 사람 있어요?”
“응?”
초원이 깜빡이도 켜지 않고 헛소리를 불쑥 들이밀자 승준은 황당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또 무슨 근거 없는 헛소리야.”
“아님 귀신이랑 사귄 적 있어요?”
헛소리의 기어가 1단에서 바로 6단으로 훅 들어오고, 이건 아무리 그라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볼 수가 있어야 사귀지. 참 나⋯.”
“흐음⋯.”
이번엔 어떤 기가 막힌 헛소리를 하려나 싶어 기다리는데 초원은 말없이 찬장에서 접시 하나를 꺼내더니 새우튀김을 몇 개 옮겨 담았다.
“이거 내 거 맞죠?”
“네, 여기 있는 새우튀김 다 홍초원 씨 겁니다.”
초원은 피식 웃더니 타르타르소스를 접시 한구석에 짜 올리곤 아일랜드 카운터 위에 놓았다.
“따뜻할 때 먹어요.”
초원이 허공에 대고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그 모습을 본 승준의 목 뒤로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귀신은 음식의 주인이 먹으라고 허락을 해 줘야만 먹을 수 있었다. 멀찍이 서 있던 귀신이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 재빠르게 접시 앞으로 다가왔다. 나눔의 뿌듯함을 만끽하며 뒤로 돌아보던 초원의 얼굴에 온갖 의문과 걱정이 섞인 시선이 와 닿았다.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승준 씨 귀신 붙은 거 몰랐죠?”
승준은 침대에 누운 채로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초원을 끌어안고 그 고른 숨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는데, 오늘은 아무리 애를 써도 정신이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
그의 눈이 어두컴컴한 방 곳곳을 훑었다.
‘여기 있으려나?’
귀신을 볼 줄 아는 사람을 한 번도 부러워해 본 적 없었다. 오히려 저주라고 생각했으면 했지. 그런 그였는데 지금은 보진 못해도 느끼기라도 할 줄 아는 초원이 부럽다 못해 속이 타들어 갔다.
‘왜 진작에 몰랐을까?’
오래전이라 이미 이승을 떠났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옆에 있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영매를 찾아가든 심령관리팀 사람들에게 부탁이라도 하든 했을 텐데.
‘한이라도 남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