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277)
277화 천고삼불 (2)
이강은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기공을 수준급으로 익힌 고수들은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진기라는 것은 생명력, 곧 정(精)이다.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여 하단전에 축기한 기운을 온몸의 기경팔맥으로 순환시킴으로써, 무인은 육체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
그리 두껍지 않은 팔로도 쇠막대를 구부릴 수 있고, 한달음에 먼 거리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
감각을 날카롭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
뒤에서 날아오는 검을 피하고, 옆 방에서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엿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강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신승이 그의 단전에 금제를 걸어 두었기 때문이다.
진기 없이는 무인들도 일반 양민과 다를 바가 없다. 눈을 가리면 더욱 그러하다.
이강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며칠 전 좌불 법진과 겨루었던 대련을 복기했다.
‘자만했다.’
자만한 것이 맞았다.
어릴 적, 그는 숙부인 백진태와 겨룬 적이 있었다.
백진태는 단전이 부서졌었고 배에 큼지막한 구멍까지 뚫린 상태였다.
또한 오랫동안 모진 심문을 당해 정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강은 분명 초절정고수였던 숙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온갖 수단을 다 활용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분명 행운이 따른 일이었다.
‘아버지도, 조상님도. 참 날 강하게 키우셨군.’
초절정고수를 상대로 병든 이강을 내보내다니.
위험했었지만 어쨌든 그는 죽지 않고 이겼다.
그렇듯 초절정고수라도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다면 훨씬 낮은 경지의 무인에게도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강도 법진에게 거의 패배할 뻔했다.
그가 일곱 걸음째를 걷던 순간이었다.
이강은 우뚝 멈추더니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음!”
법진이 감탄했다.
이강이 앞에 있는 장애물을 성공적으로 피했다는 뜻이다.
이강은 계속 집중을 이어 갔다.
법윤이 인자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아나율 존자는 눈을 잃고서야 천안통(天眼通)을 얻으셨다 하였소. 눈 외의 감각에 우선 집중하시오.”
이강이 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직관적인 수련이었다.
눈이 없어도 법윤은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살아간다. 법윤에게 그러한 방법을 배우고자 눈을 가린 것이었다.
“우선 청각에 집중하시오.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이외다.”
“사형, 사형이 자꾸 말하면 시주가 집중을 더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가?”
법윤이 당황하자 법진이 낄낄 웃었다.
천고삼불의 첫째인 법윤은 선하고 인자하지만 조금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법진은 그런 법윤에 비해 유쾌한 성격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대단하군요. 저는 사형을 흉내 내려고 해도 안 되던데.”
“물구나무서서 걷는 일도 쉽지 않은데 눈까지 가리고 장애물을 피하는 게 쉬울 리 없지 않느냐.”
“그렇긴 하죠. 하하! 넘어지면 꼼짝없이 얼굴이 까져서 말이에요.”
이강은 수다를 떠는 저 둘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서 장애물을 피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오감에 의존해야 했다.
피부에 닿는 바람의 흐름을 느껴서 큼지막한 장애물을 감지한다.
쿵.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낸다.
지척에 있는 장애물에 발소리가 반사되어서 돌아온다.
아주 미묘한 소리지만 삼 일째 이 짓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다.
코를 살짝 찡긋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흙과 섞여서 물비린내가 난다.
가까이에 진창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 역시 장애물 중 하나였다.
“으음…….”
하지만, 이러한 감각을 아무리 활용한다고 해도 시각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이 장애물들이 가득한 길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태음절맥으로 날카로운 감각을 타고났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오감을 활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천안통이라고 할 수 없소.”
법윤이 나지막이 조언했다.
“중요한 것은 육감(六感)이오.”
육감을 깨워라. 영안을 떠라. 천문을 열어라.
익숙한 말이었다.
신승이 천고삼불에게 배움을 얻으라 시킨 것도 조금 이해가 갔다.
하지만 육감이 쓰라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인가.
발을 내딛던 이강이 멈칫 굳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몸이 기우뚱하더니 결국 발이 쑤욱 빠져 버렸다.
철퍽!
이강은 어깨를 비틀어서 눈을 가린 안대를 풀었다.
오른쪽 발이 진창에 푹 빠졌다.
발이 축축했다. 양팔을 쓰지 못하는 지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려면 꽤나 번거로울 것이다.
여지없는 실패였지만 반응은 좋았다.
법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조금 전에 발을 피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나야 눈이 안 보이니 못 봤지.”
“제가 틀림없이 봤지요. 봤어요!”
“시주의 재능이 뛰어나군!”
법윤과 법진은 이강에게 제법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진창에서 발을 빼고 걸어 나오니 진흙이 발자국을 만들었다.
이강은 바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곳으로 법진이 몸을 끌고 다가왔다.
“후후, 찝찝하지요?”
“예, 그렇네요.”
“그래도 예전 법윤 사형이 수련한 방식보다는 훨씬 온건한 겁니다.”
법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시각 장애를 극복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강과 같은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천안통 비스무리한 것을 얻었다고 했다.
“구덩이에 물을 붓는 대신, 아예 해우소의 분뇨를 가져와서 부었지요.”
“…….”
“위기감을 느껴야 육감이 발달한다고 무명 사숙조께서 직접 부어 주셨는데……. 시주도 도전해 보겠습니까?”
“됐습니다.”
신승은 무림맹주로 일하면서도 종종 그렇게 똥지게를 들고 변소를 비웠다고 한다.
호사가들은 가장 비천한 일을 손수 함으로써 선(禪)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어쩌면 그저 괴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수건입니다. 쓰십시오.”
“고맙습니다.”
이강은 법진으로부터 흰 수건을 받아들었다.
양팔을 못 쓰는데 어떻게 받았냐 하니, 입으로 받았다.
그 다음 한쪽 발의 신을 벗어서 발가락으로 수건을 잡았고 수건으로 젖은 오른발을 닦았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군요.”
처음에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이강이야말로 백씨세가의 적손, 도련님 중의 도련님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입으로 수건을 받아서 발가락으로 잡아 몸을 닦다니.
품위 없는 행동거지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손이 없는 자가 발을 이용해 스스로를 닦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일과 중에서는 더 이상 정명이 이강의 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
법진으로부터 발을 손처럼 사용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강은 처음에 주저했다.
하지만 곧 주저했던 그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법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법윤 사형처럼 시주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나는 두 발을 못 쓰고, 시주는 양팔을 못 쓰니까요.”
법진에게도 이강은 배워야 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직관적인 것이었다.
“다만 발이 없으면 손을 쓰면 되고, 손이 없으면 발을 쓰면 되는 것이지요.”
“스님의 말이 맞습니다.”
“소림은 권(拳)이 유명하다고 하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권각(拳脚)의 수발이 자연스러워야 비로소 외공의 완성에 다가갈 수 있지요.”
“예.”
“두 다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법진과 함께하는 수련은 눈을 가리고 장애물이 가득한 길을 지나는 것보다 훨씬 더 장난 같았다.
양발을 이용해 글씨를 쓴다거나, 밥을 먹는 등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
각법을 정밀하게 갈고닦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의 수련은 장난 같은 행위들이었다.
하지만 이강은 묵묵히 법진의 지시에 따랐다.
이강은 내심 확신했다.
‘천고삼불은 몸의 천형이 아니었다면 진작 고수가 되었을 이들이다.’
신승은 이들이 바깥에서 절정고수라 불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실력으로 따진다면 분명 절정고수에 못지않았다.
만약 다른 소림 무승들과 같은 조건에서 무공을 수련했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다다랐을까.
‘의미 없는 가정인가.’
그렇기에 이강은 묵묵히 따른 것이다.
적어도 그의 선택이 법진의 마음을 감화시킨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강을 보는 법진의 눈빛이 따스했다.
법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강에게 말할 때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이강이 천고삼불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법진이 법재를 슬쩍 보고 핀잔을 주었다.
“거 법재 사형, 표정 좀 피십시오. 왜 우리 착한 이강 시주한테 그렇게 심술이십니까? 법윤 사형이 한마디 해 주셔요.”
“으응? 나는 표정이 안 보여서…….”
“육감으로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그렇군. 법재야. 심술 좀 풀거라.”
추불(醜佛) 법재.
등이 굽은 채 심술궂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는 이강을 외면한 상태였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강을 꺼렸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이강을 싫어하는 듯했다.
법재가 엄지를 치켜들고 두 손가락을 당기는 수화를 했다.
이강은 수화를 몰랐으니 가만히 있었다.
법진이 고개를 끄덕여 주더니 수화를 해석했다.
“잘난 놈한테 가르칠 건 없다!”
“…….”
“그렇다고 하네요.”
그가 이강을 위해서만 수화를 해석해 준 것은 아니었다.
첫째인 맹자불 법윤은 눈이 안 보이니 수화를 볼 수 없다. 그것을 위해서 법진이 사이에서 수화를 해석해 주는 것이다.
다만 둘째인 법재는 귀가 안 들려도 법윤의 입술 모양을 읽어서 말을 이해했다.
법진이 찬찬히 추불을 설득했다.
“사형, 왜 자꾸 그렇게 고집을 피우십니까.”
“…….”
“사형이 잘생긴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지 않냐고요? 알죠. 애초에 법윤 사형부터 잘생겼잖아요. 그리고 저도 법재 사형보다는 잘생겼을걸요?”
“…….”
“예? 저는 못생겼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형과 동지라니.”
법진은 법재의 수화에 몹시 억울한 듯했다.
이강은 가만히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래도 무명 사숙조님의 명령인데 그렇게 어깃장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
“예, 물론 사숙조께선 이강 시주에게 보고 배우라고 했지, 저희보고 무엇을 가르치라고 하시진 않았지요. 맞는 말이긴 한데……. 직접 물어보라고요?”
법진이 이강을 돌아봤다.
“법재 사형에게 뭘 배우고 싶은지 물어보라는데요?”
이강은 잠시 고민했다.
법윤에게 배운 것은 시각의 부재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법진에게 배운 것은 사지가 온전치 못함을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법재에게 배울 것은 무엇인가.
“귀가 안 들려도, 청각을 잃어도 극복하는…….”
이강은 하던 말을 멈췄다.
법재가 인상을 확 찡그리고 고개를 젓더니, 아예 눈을 감아 버린 것이다.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어어, 어!”
곧 법재는 휙 도망쳤다.
등이 굽었다고 해도 경신술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몹시 쾌속했다.
이강과 승려들은 떠나는 추불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런, 법재가 도망갔나.”
“예.”
“미안하게 됐구려, 시주. 다만 법재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 주시게.”
법윤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잘생긴 놈은 싫다’며 이강에게 차갑게 구는 데에 이유가 있던 걸까.
하지만 법윤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말이었다.
“어릴 적, 법재는 몸을 고칠 기회가 있었지.”
척추가 굽고 귀가 들리지 않는 몸.
그것은 타고난 것이 아닌 듯했다.
“열병을 극심하게 앓았던 게야. 귀가 멀고 등이 굽을 정도로. 그때 사미승들을 키워 주신 주지께서 방장께 요청했지. 대환단을 내려달라고.”
“…….”
“허나, 이미 법재는 생사의 고비를 넘긴 뒤였네. 대환단의 반출은 허가되지 못했어. 그 탓에 평생의 후유증이 남았지.”
이강은 신승의 말을 기억했다.
대환단은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면 먹이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원칙인 듯했다.
“방장대사님은 물론이고 신승께서도 반대하셨다고 알고 있네. 그런데 이번에 신승께서 시주에게 대환단을 반출했으니…….”
이강은 목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법재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대환단을 먹지 못해 평생의 천형을 얻었는데, 외부인인 이강에게 신승이 대뜸 대환단을 주었으니.
“저를 싫어할 법도 하군요.”
“그렇게 생각할 것 없네. 우리는 이미 출가하여 불법에 귀의한 몸. 법재의 수행이 부족할 따름이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서도 법윤의 목소리에는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이강은 법재가 ‘잘생긴 놈이 싫다’라는 핑계를 대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의 등이 굽고 얼굴이 얽은 것도 열병 탓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자 법진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 법재 사형이 잘생긴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동자승 시절부터 그랬습니다. 처음에 법윤 사형을 얼마나 미워했는데요.”
“……그렇군요.”
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신승이 내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천고삼불 모두의 인정이 필요했다.
그중에서는 법재의 인정을 받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법진 스님, 배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배우고 싶은 것? 추가로요?”
“예. 저도 법재 스님과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요.”
이강은 법진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청했다.
“수화를 알려 주십시오.”
“아……!”
법진이 감탄했다.
첫째 법윤은 울컥했는지 목소리가 떨리기도 했다.
“법재와 대화하기 위해 수화를 배우려는 것이오?”
“예.”
“그런 생각을 한 시주는 처음 뵈었소. 아미타불…….”
법진도 기쁘게 이강의 청을 받아들였다.
“시주는 머리가 명석하니 금방 수화를 배울 겁니다. 당장 해 볼까요?”
“예.”
“자, 왼팔을 아래에 두고 오른손을 세워 두 번 두드리십시오. 이게 고맙다는 뜻의 수화입니다.”
“아…….”
이강은 입을 다물고 법진을 응시했다.
법진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장난입니다, 장난.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십니까.”
“수화를 이해하는 것부터 해 보겠습니다.”
“그러지요. 후후.”
법진은 장난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수화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매일 이강은 수화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