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301)
301화 태산의 절대고수들 (3)
백류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그래…….”
산문 앞에서 이강과 신승을 맞이한 뒤로부터 그랬다.
회합 장소로 선정한 도관에는 단풍나무가 잔뜩 심어져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되었고, 빨갛게 단풍이 물들었다.
태산에 바람이 불자 붉은 낙엽이 흩날렸다.
떨어지는 단풍잎 사이에서 백류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랬단 말이지. 마기가…….”
“다행히 대사님과 당문의 도움 덕택에 많이 회복했습니다.”
“대맥을 또 이었다고?”
“황궁에서 기연을 얻어 그리했습니다.”
“팔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냐?”
이강은 마기를 억제하여 양손으로 포권하였다.
“보시다시피.”
“……다행, 그나마 다행이구나.”
아들의 검게 물든 손을 보는 눈빛에 축축함이 묻어났다.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신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분명 갱년기로군.”
“…….”
백류산은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그것이 이강과 똑같은 얼굴인 탓에, 신승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흐허허, 철혈무정이라는 별호는 집어치우는 게 어떻겠나. 그것보다는 감성부친(感性父親) 같은 별호가 좋겠군.”
별호에 어울리지 않게 부성애를 보이는 백류산에게 하는 농담이었다.
백류산은 그것이 들리지 않는 척했다.
“크흠.”
“심려치 마십시오 아버지. 저는 나날이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하준이는 만나 보았느냐.”
“예, 많이 성장하였더군요.”
“허허…….”
백류산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강과 하준의 나이 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렸을 때라면 형제간의 나이 차가 크게 느껴질 법하지만 지금은 둘 다 어엿한 청년 아닌가.
하지만 이강은 여전히 자신의 동생을 어린아이 보듯 보고 있었다.
“그래, 외가에서 절맥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느냐?”
“자세히는 듣지 못했습니다만 조상님 중에 저와 같은 태음절맥이 있으셨다는 것 같군요. 치료할 방법은 얻지 못했습니다.”
“그랬군.”
이강은 성역주와 외가에서 절맥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별다른 방책이라든가 돌파구는 찾지 못했다. 그저 여태까지 해 왔듯 대맥을 차근차근 이을 수밖에.
그 방법이 대맥을 이을 때마다 어려워졌지만, 분명 나머지 대맥도 이을 방법이 있으리라.
그때, 신승이 웃으며 조언했다.
“부맹주. 자식을 너무 어리게 보지 말게나.”
“……맹주님.”
신승의 눈에는 보였다.
이강이 제 동생을 어린아이처럼 여기듯, 백류산 역시 장성한 자식을 유약하게 본다는 것을.
“이강이 이놈은 쉽게 죽을 운명이 아니야. 어디 가서 요절할 일은 없을걸세. 내 장담하지.”
“예…….”
아비로서 그 말이 오히려 불길하게 들렸지만 백류산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보다. 제 자식을 이곳에 데려오겠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는데요.”
“아, 그에 관해 할 말이 있네.”
신승은 이강을 뒤로 한 채 백류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늙고 마른 신승에 비해서 백류산의 체격이 더 컸고, 그렇기에 그 어깨동무는 어설프고 우스웠다.
“조용한 곳에 가서 말하지.”
“……그러시지요.”
“이강 너는 짐을 풀고 쉬고 있어라.”
신승은 이강을 돌아보곤 덧붙였다.
“이곳에서 재미있는 인간군상을 많이 볼 것이다. 은인자중한 채로 지켜보아라. 네 안목을 넓히는 것도 수행의 일부분이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 듯한 말투다.
신승이 그리 말하자, 눈을 크게 뜨고 반응한 것은 백류산이었다.
“제 아이를 돌봐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자로 둔 것은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나.”
백류산은 기쁜 표정으로 감사를 표하며 신승과 함께 사라졌다.
홀로 남은 이강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태산의 도관에 들어온 이후로, 이강은 신승과 백류산을 좀처럼 만날 수 없었다.
사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소림에 있을 때야 신승은 쉬고 있었던 것이니 이강과 함께 지낼 시간이 많았다지만.
이곳은 소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승이 직접 주관한 회합이 아닌가.
맹주와 부맹주가 바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음.”
이강은 명상에서 벗어났다.
외부의 소란 때문은 아니었다.
후기지수들이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소림보다 오히려 이곳이 더 조용했다.
잘 생각해 보면 그럴 법했다.
무림맹의 정파 무인들과 사도련의 무인들, 녹림의 무인들, 게다가 천하십대고수라 불리는 몇몇 또한 이곳 도관에 모여 있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고수들도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얌전히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강을 일깨운 것은 소란이 아니었다.
“……뭐지?”
육감(六感)의 영역을 깨닫게 된 이강은 무언가를 느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고 할까.
오감으로 비유하자면, 바람에는 쇠 맛이 느껴지고 피부로는 오한이 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강은 오늘 아침 오랜만에 만난 신승의 말이 떠올랐다.
“해가 뜨면 나와서 지켜보라고 하셨지.”
어지간하면 묵고 있는 건물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지침이었다.
하지만 신승이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강은 자신의 직감에 따라 건물을 나섰다.
함께 지내고 있던 사대금강은 신승을 따라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밖에 나서니, 경계를 서고 있던 무림맹의 무인들도 통 보이질 않았다.
이강은 잠시 텅텅 빈 도관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감각이 이끄는 방향으로 향했다.
곧 인기척이 느껴졌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곳 태산에는 정상 부근에도 도관이 있었으니, 황제가 봉선의식을 치르는 제단 아래쪽에서 그것을 보좌하는 건물이었다.
“이건…….”
보이지 않던 무림맹 무사들은 그 길에 있었다.
그들은 길을 호위하듯 산길의 좌측에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마차도 지나갈 법한 널찍한 길의 우측에는 마찬가지로 사도련의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 무림맹과 사도련의 엄정한 군기(軍氣)를 과시하듯 부동자세였다.
디리딩- 딩-
그때, 어딘지 익숙한 금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강은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구경거리라더니.’
신승의 말이 맞았다.
그곳에는 중원의 복색과 조금 다른 옷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걷고 있었다.
다섯 명의 여인이 한 명의 여인을 호위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호위무사들이 하나같이 무기 대신 금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호위를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남해 보타암에 있는 검각(劍閣). 검각주인 보타신녀와 그녀를 호위하는 오현검희들임에 분명할 터.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도관에 있었어도 보지 못한 천하의 고수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냈다.
검각과 대비되는 붉은 옷을 입은 여무사들.
그녀들이 들고 있는 가마에는 검각주의 앙숙이라는 적월마희(赤月魔姬)가 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도끼를 들고 산적들을 이끌고 올라가는 이가 녹림패왕 갈사혁.
살기(殺氣)라는 것을 형상화한 듯한 가면을 쓴 사내는 그 명성이 드높은 사도련주.
마치 대장군처럼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는 구창왕 소진굉.
사대금강을 이끌고 가는 자는 신승.
그 절대고수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기세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길을 지키고 있는 무림맹과 사도련의 무사들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기세를 죽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강은…….
“크윽.”
반사적으로 내기를 끌어올려 저항했다.
몸속의 마기가 날뛰고 있었다.
이미 경지에 오른 이강이 그저 고수들의 기세 때문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이유는 없었다.
‘누가……!’
누군가가 이강을 압박하고 있었다.
저 길을 지나는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는 무형지기로 이강을 압박할 수 없었을 테니.
어째선지 마기마저 끓어오르는 지금.
누군가가 나타나 이강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든 이강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부님?”
그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은 많았지만, 이강이 ‘사부’라고 부를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었다.
“이강아!”
이강의 앞에서 그 기세를 막아 준 이는 다름 아닌 유정신이었다.
“사부님도 오셨습니까!”
“막 왔다! 녀석,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반가운 얼굴을 너무 많이 만난다.
이강은 왜 유정신이 이곳을 찾았는지 알게 되었다.
청림주 역시 천하십대고수였다.
“난 림주님의 대행으로 이곳에 왔단다. 녀석…….”
청림주는 이곳에 오지 못한 것이다.
유정신은 이강과의 해후를 만끽하고 싶은 듯했지만 계속 길바닥에 서 있지는 못했다.
“따라오거라.”
“저도 말입니까?”
“그래, 신승께 언질을 듣지 못했니? 너도 함께 올라오도록 하라고 말씀해 주셨단다.”
“그러셨군요.”
신승은 괜히 나와 있으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이강은 유정신의 일행과 함께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강을 압박하던 누군가는 기세를 거둔 듯했다.
여전히 공기는 무거웠지만 이강은 저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정신과 함께 온 일행 역시 이강을 반겼다.
“이강……!”
진무와 진리연이 유정신의 양옆에 있었다.
진리연은 황궁에서의 전투 이후에 깨달음을 얻어 초절정에 올랐다고 했다.
그들이 유정신을 호위하듯 하며 인사를 했다.
담현은 없었지만, 그 대신 다른 인원들이 있었다.
“이강 사숙, 저희 녹림척살귀들도 있습니다!”
준명이 그리 말하자, 유수린이 그런 준명의 등허리를 찔렀다.
“청림삼협이라는 좋은 별호도 얻었으면서 언제적 별호야, 녹림척살귀는! 그리고 넌 눈치도 없어?”
여전히 사매에게 잡혀 사는 듯했다.
그런 유수린에게 이번에는 손희일이 면박을 주었다.
“사매, 사매 목소리가 더 크네. 자중하시게나.”
“왜 갑자기 그런 말투예요, 대사형은.”
“음, 이곳은 공적인 장소 아닌가. 말과 몸가짐에 더 주의하는 것이 사리에 맞겠지.”
손희일은 보지 않은 사이에 조금 변해 있었다.
그런 사질을 바라보는 이강의 표정이 뜨악했다.
“희일, 뭐냐 그 수염은?”
“……예?”
“깎는 게 좋겠다.”
손희일은 숱도 없으면서 어울리지 않는 수염을 기른 것이다.
유수린이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그들은 목소리를 죽이며 태산을 함께 걸었다.
그 덕에 이강은 청림의 일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전음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담현 사형은 청림에 남았다고?
청호와 담현이 보이지 않는 사실이 신경 쓰여 물었더니, 청림에서는 꽤 큰일이 벌어졌다는 듯했다.
-참사교의 무인들이 나타났어요. 사상자가 꽤 나온 데다가 기묘한 사술까지 써서…….
참사교의 이야기가 나오자 이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강은 이 무림의 가장 큰 적이 마교가 아니라 참사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원래 대서고주님이 그 수습을 하고 계셨는데 이곳에 온 터라, 담현 사숙이 그 임무를 맡고 계시죠.
-사형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
림주는 어지간하면 그의 거처에서 나오지 않는다.
지켜야 할 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이강은 림주의 칩거에 납득했다.
-사형은 어떻게 지냈어요? 팔이…….
유수린의 전음에 이강은 조용히 답했다.
-천마의 부활을 막았어. 그 탓에 마기에 당했다.
전음을 들은 유수린은 우뚝 멈춰 섰다.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그녀를 손희일과 준명이 이상하게 보았다.
“예?”
“쉿.”
이강은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유수린은 누군가 엿듣지 못하도록 준명과 손희일에게 각각 전음으로 설명했다.
곧, 준명과 손희일도 유수린처럼 한 명씩 차례대로 입을 쩍 벌리며 멈춰 섰다.
그런 작은 소란 끝에, 그들은 결국 정상 부근의 도관에 도착했다.
그 도관은 오히려 산 중턱에 있는 것보다 더 화려했다.
중앙에는 회담장으로 쓸 수 있을 법한 거대한 궁(宮)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의 화려한 누각에는…….
“뭐야 이거…….”
“연회군.”
술과 고기가 준비된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독특하네.”
그것이 이강의 감상이었다.
회담에서 연회를 벌이는 것은 정파 무림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회담장 바로 앞에 고기를 굽고 술을 준비하는 것은 사파나 녹림의 문법이다.
“이곳에서 대기하거라. 술은 마시지 말고.”
유정신이 그리 말했다.
앞으로의 회담은 십대고수에 속한 자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듯했다.
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천하십대고수들이 자신들의 수하를 남겨 두고 궁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들이 무림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이곳에서 대기하라는 것이다.
“누가 설마 정신을 팔고 술을 마시겠어요.”
유수린이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다.
“으하하하, 이거 대단하군만.”
녹림패왕 갈사혁을 따라온 녹림의 고수들이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호기로움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리고 구창왕의 수하들도 술과 고기를 조금씩 먹었다.
다른 이들도 식사를 시작했다.
이강이 조용히 말했다.
“술만 마시지 마라.”
그러자, 유수린과 그 일행들도 슬쩍 연회상에 다가갔다.
그중 가장 신난 것은 준명이었다.
몹시 배가 고팠던 참이었기에, 큼지막한 돼지의 통다리를 콱 움켜쥐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다른 한쪽 다리를 잡고 있었다.
“……어.”
그 상대는 거구의 준명보다도 더 덩치가 컸다.
기골이 장대한 정도가 아니라 체구까지 비대했기에, 준명은 흠칫 놀랐다.
“음, 전 다리 한쪽만 가져가겠습니다.”
상대를 너무 빤히 쳐다보는 것도 실례기 때문에 그리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예?”
준명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는 돼지 다리를 잡아당겼다.
콱.
그런데 그 팔뚝이 잡혔다.
거구의 사내, 갈동탁은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이게 무슨…….”
녹림척살귀의 일인, 준명이 결국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