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rminally Ill Young Master of the Baek Clan RAW novel - chapter (300)
300화 태산의 절대고수들 (2)
산중서생 학기룡은 녹림맹의 총군사다.
녹림맹이라고 하면 녹림삼십육채가 소속된 연합체로, 간단히 말해서 산적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산적 무리에게 어떤 지성이 있을까.
서로를 녹림호걸이며 산중의 호랑이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본질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털어먹는 털 숭숭 난 범죄자 집단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녹림맹은 그 범죄자 집단의 연합체에 불과했고, 총표파자이자 녹림맹주인 갈사혁은 그중에서 가장 강한 산적 나부랭이였다.
본디 ‘총군사(總軍師)’라는 사도련이나 무림맹에 있었던 직책도 녹림맹에는 없었다.
군사는 뭐가 군사라는 말인가.
그러나 녹림맹의 규모는 너무 커져 버렸고, 그 패주인 갈사혁은 명실상부 천하십대고수까지 올랐다.
무식한 주제에 야망은 넘치는 갈사혁은 자신이 유비 현덕이라도 된다고 생각한 것인지, 제갈량(諸葛亮)을 모시겠다며 총군사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처음에는 놀랍게도 칠대세가인 제갈세가에 연락하여 똑똑한 놈을 보내 달라고 했단다.
당연히 격분한 제갈세가가 녹림 도당을 토벌해야 하니 어쩌니 하면서 반발했고, 갈사혁은 못 이기는 척 그 제안을 물렸다.
하지만 곧, 갈사혁은 또 새로운 방법을 떠올렸다.
풍진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한 현인을 모셔 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은거기인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만약 그런 자가 있다 하더라도 찾는다고 찾아질 리 만무했다.
자연스럽게 갈사혁의 명을 받고 나선 산적들은 조급해졌다.
아무 수확 없이 돌아가면 호된 꼴을 당할 것이 분명하니, 점차 기준을 낮춰서 아무나 잡아가기 시작했다.
먹물 좀 먹었다 싶으면 우르르 어깨에 짊어지고 산속으로 들어갔으니, 학기룡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학기룡은 본디 낙향서생이었다.
향시에 합격하고 북경으로 올라갔는데, 집구석에 쥐뿔도 없는 그는 순번에서 밀려 제대로 된 관직을 받지 못하고 낙향했다.
3년을 조정으로부터의 연통만 기다리면서 버티고 있으니 나날이 궁핍해졌다.
다 무너져 가는 초옥에서 글귀나 읽고 있는 게 제법 은거기인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들이닥친 산적들에 의해 납치당한 그가 눈을 뜬 곳은 녹림맹 총단이었다.
어째선지 갈사혁의 마음에 흠뻑 든 그는 여차저차 녹림맹의 총군사가 되었다.
산중서생(山中書生)이라는 별호도 받으며.
한때는 학기룡 역시 가슴에 바람이 들었더랬다.
조정이 재능 있는 그를 버렸으니, 조금 냄새가 나긴 하지만 산적들과 무림이라는 세상을 정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녹림패왕 갈사혁은 강하지만 무식한 자였고, 이 세상에는 그보다 강하고도 현명한 무인들이 더 많았다.
“자, 나가서 내 아들 들어오라고 해.”
“……예.”
태산의 코앞까지 당도한 시점이었다.
갈사혁은 총군사인 학기룡을 마차에서 내보내고 제 아들을 불러오도록 시켰다.
그의 맏아들은 갈동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적으로, 갈사혁이 학기룡보다 더 깊게 믿는 자였다.
곧, 산적들이 갈동탁을 데려왔다.
“아부지, 제가 왔습니다아.”
갈동탁은 몹시 비대한 청년이었다.
동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도 배가 불뚝하니 튀어나와 있었는데, 드러난 배꼽마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우둔해 보이는 얼굴로 들고 있는 것은 천으로 내용물을 덮은 나무통이었다.
“들어가시오, 소맹주.”
학기룡은 자기가 그 단어를 내뱉고 인상을 찡그렸다.
소맹주라니. 소가주도 아니고 소문주도 아니다.
소맹주라는 건 대체 어디 있을 수 있는 호칭이던가.
하지만 갈사혁은 제 아들을 소맹주라고 불렀고, 그 호칭에 불만을 표할 수 있는 자는 감히 없었다.
갈동탁은 헐레벌떡 그 비대한 몸을 이끌고 마차에 올라탔다.
갈동탁이 스쳐 지나가자 달큰한 오디 냄새와 독한 기름 냄새가 났다.
안에서 두 부자가 할 짓은 뻔했다.
갈사혁은 반로환동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의 반로환동이라는 것은 참으로 구질구질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마차의 내부.
“꼼꼼하게 칠해라!”
머리에 오디와 창포물, 여러 가지 풀즙을 으깬 것을 섞어서 머리에 치덕치덕 바른다.
눈에 오디물이 들어서 얼른 고개를 든 갈사혁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먹지 마, 이 자식아!”
“예, 예!”
오디를 우물거리는 아들을 보고 갈사혁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놈아, 넌 이 천하의 호걸 녹림패왕의 아들이다. 그 목 뻣뻣한 놈들 앞에서 내게 망신살을 뻗치면 절대 안 될 것이야.”
갈동탁은 천하의 신력(身力)을 타고났다.
일평생 녹림맹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 온 자식이지만, 갈사혁은 제 아들이 흑도의 쟁쟁한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나리라고 믿었다.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얌전히만 있어라.”
“네 아부지…….”
“빨리 등에도 기름을 발라!”
갈동탁은 허겁지겁 제 아비의 몸에 기름을 발랐다.
기름은 달팽이의 진액과 각종 비법 재료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그게 효험이 있었는지 그저 기분 탓인지, 갈사혁은 제 주름진 피부가 팽팽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아비는 이번에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 치들의 콧잔등을 납작하게 해 줄 것이다.”
갈사혁의 눈빛에서 정광이 번쩍였다.
반로환동은 웃기지도 않은 연극이었지만, 그가 근래 얻은 깨달음은 진짜였다.
천하십대고수 안에서 그는 자신의 입지를 높일 계획이었다. 녹림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라도.
갈사혁은 산중의 호랑이가 여전히 용맹하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동탁아.”
“…….”
이름을 부르자 화들짝 고개를 드는 못난 아들.
하지만 그런 자식을 보는 갈사혁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너는 하늘이 내린 용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머지않은 날에는 나를 능가하겠지.”
“…….”
“허나 보는 눈 없는 놈들이 널 우습게 볼까 봐 그게 걱정이다. 눈깔에 힘 빡 주고 근엄한 표정을 항시 유지하거라.”
“…….”
“대답 안 하냐?”
갈사혁이 눈을 부라리자, 갈동탁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투툭.
그리고 그의 꽉 찬 입에서 오디 몇 알이 굴러떨어졌다.
갈사혁은 잠시 아들을 응시하더니…….
꽈앙!
때아닌 바위 두드리는 소리가 마차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 * *
“힝…….”
갈동탁의 고슴도치 같은 머리에는 눈에 확 띄는 혹이 불룩 솟아 있었다.
바위도 깨부술 만한 갈사혁의 주먹에 얻어맞고 혹만 난 것이 다행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눈물까지 찔끔 흘리려는 듯하기에 학기룡이 얼른 주의를 주었다.
“소맹주, 표정을 바로 하시오. 무인들이 지켜보고 있소.”
“넵.”
요란한 일행은 결국 태산까지 도착했다.
회합의 장소가 태산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력의 장들이 모일 수는 없는 법이다.
태산에는 도관(道館)이 있었다.
태산파라는 작은 문파의 구역인데, 낡긴 했지만 문파의 세력에 비해서는 큼지막한 건물들이 있었다.
멸망한 전진파의 유산을 그대로 점거했기 때문이었다.
그곳, 태산파가 바로 회합 장소였으니.
평소에는 사람이 적은 태산파의 산문 앞에는 무사들이 진을 치고 경비 중이었다.
“그것도 무림맹의 무사들입니다.”
학기룡이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회합을 주최하는 것은 무림맹과 사도련이다.
그중 무림맹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다.
“신원을 밝히시오!”
경비의 책임자로 보이는 무사가 그리 외쳤다.
이럴 때 대응하는 건 학기룡의 영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있던 것이다.
“산중의 제일 호걸이자, 천하 백만 녹림도의 총표파자. 녹림패왕 갈사혁 대협과 그분을 따르는 아우들이오-!”
학기룡은 우렁차게, 그리고 제법 기세 있는 답을 했다.
백만 녹림도라는 말은 한참 과장이고, 만약 산적도당이 백만 명씩이나 되면 그것이야말로 난세(亂世)나 다름없겠지만. 학기룡은 준비한 말을 마쳤다.
“녹림패왕 갈사혁 대협이시군요.”
동맹인 사도련의 무인들이라면 거창한 행렬을 보고 바로 입장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이면 무림맹 무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 더 절차를 갖추었다.
“천하의 중요한 회합이 열리는 시기이니, 실례지만 마차를 열고 신분을 증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학기룡은 표정이 굳었다. 무림맹의 대처가 무례해서가 아니라, 갈사혁의 대처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끼익.
마차의 작은 창문이 열렸다.
사람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창문이었지만, 나온 것은 얼굴이 아니라 사람 얼굴만 한 손이었다.
큼지막한 팔뚝과 큼지막한 손을 내민 갈사혁은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
무림맹 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차 앞에서 포권하고 말하길.
“절차가 절차이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
콰작!
그리고 닫힌 창문을 부수며 손이 다시 나타났다.
무림맹 무인은 피하려고 했지만 그 손은 쾌속하고, 무엇보다 강인했다.
순식간에 무인의 멱살을 틀어쥔 뒤.
갈사혁은 손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콰자자작!
무림맹의 무인은 자신의 안면과 상반신으로 마차의 문짝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얼굴은 긁히고 찢어져서 피를 줄줄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명이나 고함을 지를 수 없었으니, 그것은 갈사혁의 늙은 호랑이 같은 안면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보고 싶다고? 으흐흐흐!”
맹수의 울음소리처럼 낮고 우렁우렁한 목소리였다.
갈사혁은 무림맹 무인의 멱살을 틀어쥐고 부서진 마차의 문으로 내렸다.
“오냐! 보여 줬다. 다만 대가를 치러야 할 터!”
쩌렁쩌렁한 저 목소리는 내력을 담은 것이 아니라 순수한 목청의 힘이었다.
그 위세가 정말 호랑이 같았지만, 학기룡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갈사혁이 저리 행동하는 이유는 뻔했다.
산적 놈들은 기세를 무척이나 중요시한다.
일단 털어먹을 놈들 앞에 나타난다면 자신의 잔혹함과 강력함을 보이기 위해 기선제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겁많은 상단이 아니라 무림맹의 정예 무사였다.
채채챙-
“무슨 짓이오!”
“내려놓으시오!”
무인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겨누었다.
당연히 갈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불러서 왔더니 손님 대접이 이토록 박한가! 책임자를 데려와! 안 그러면 이 무례한 녀석의 혀를 뽑아 버리겠다!”
살벌한 대치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상황은 수습되어야 한다. 갈사혁으로서도 이렇게 무림맹과 싸울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수그릴 수도 없으니 말리는 것은 학기룡의 역할이었다.
“잠시, 오해가 생긴 듯하오나…….”
짜증을 숨기고 중재하려던 도중.
누군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놓으시오.”
“일단 맹주님도 놓으시고…… 어?”
등장한 것은 중년인이었다.
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용모가 갈사혁과 대비되었다.
날카로운 턱선에 차가운 눈빛. 조금은 창백한 피부가 몹시 어울리는 중년인.
그는 허리에 찬 검에 손을 얹은 상태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넌 뭐냐?”
갈사혁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그 중년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가 싫어하는 인물 유형이었다.
고고한 척하는 잘생긴 검사 따위의 자들.
대개는 갈사혁의 코앞에서는 감히 그 고고함을 보이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손님이면 손님답게 굴어야지. 맹의 무인을 해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소.”
“어쭈?”
만약 갈사혁이 아주 보는 눈이 없었다면, 그대로 흉성(凶性)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회한 맹수는 상대방의 기세를 알아보았다.
“……누구시라고?”
“백류산이라고 하오. 처음 뵙겠소, 녹림맹주.”
“아, 새 무림맹주셨구만.”
“아직은 아니오.”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일행의 상상 이상으로 거물이었다.
차기 무림맹주로 내정된 철혈무정 백류산.
갈사혁은 백류산과 만난 적이 없었다.
설마 부맹주씩이나 되어 나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 그는 그만 물러날 시기를 놓쳐 버렸다.
“내려놓으시오. 경고했소.”
“흐흐…….”
갈사혁은 맹세코 눈앞에 있는 부맹주와 싸워 격파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회합장에 도착하자마자 무림맹과 척을 질 수는 없었다.
그가 어떻게 체면을 유지하면서 물러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이.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호통을 쳤다.
“야 이 산적 놈아! 여기 와서 무슨 행패냐 또!”
“이건 또 무슨……!”
돌아본 갈사혁은 흠칫 놀랐다.
그곳에는 신승 무명대사와 소림의 일행이 서 있었다.
“오랜만에 봐도 성깔은 여전하구나!”
“스님도 오셨소……?”
“내가 불렀는데 내가 안 오련?”
“……커흠.”
신승과는 안면이 있는 입장이다. 갈사혁은 냉큼 무림맹의 무인을 내려놔 주었다.
“피차 오해가 있었나 보군. 나 먼저 들어가 보겠소이다. 괜찮겠소?”
“……들어가시오.”
백류산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곳까지 나온 것은 애초에 신승과 제 자식인 이강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갈사혁은 뻔뻔한 얼굴로 냉큼 입장했다.
그러면서 애꿎은 자신의 군사에게 왜 진작 안 알려 주었냐는 눈길을 줬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남은 백류산과 신승 일행.
잠시 합장과 포권이 오가고. 백류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강.”
“아버지.”
오랜만의 부자 상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