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ampire went to Murim RAW novel - chapter (87)
87화
“주군께서 너를 잘 보신 모양이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입니다.”
갈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걱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 이른 새벽 먼 길을 떠나셨다. 며칠 돌아오지 못하실 거라 하더구나.”
“그 말은…….”
끼이익―
그때 문이 열리고 독고결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신이 들었다는 전갈을 받고 왔소.”
독고결이 음살문주와 눈인사를 나눈 후 갈위 앞에 섰다.
“내가 불렀다. 그리고 장춘은 걱정 마라.”
음살문주는 갈위의 손을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말들 나누시게.”
음살문주가 나가고 독고결은 의자를 당겨 침상 옆에 앉았다.
“어찌하실 생각이시오?”
“무얼 말이오?”
“당신.”
“…….”
“당신이 빠져준다면 음살문을 수월하게 거둘 수 있을 거요.”
갈위를 쳐다보는 독고결의 눈빛은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자정을 훌쩍 넘긴 새벽.
야현은 남화루 지붕에 앉아 혈랑문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애초의 계획은 적랑 기사단을 비롯한 언데드를 이끌어 문파를 멸문시키고 무공을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다.
손쉬운 먹잇감으로 적당한 문파를 찾으니 그들이 가진 무공이 눈에 차지 않았고, 무공에 눈을 맞추니 상대하기가 벅찬 곳이었다.
그러던 차에 혈랑문이 야현의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여느 곳보다 상대하기 힘든 문파다.
그때 흑오가 한 말이 야현의 흥미를 자극했다.
“혈랑문의 무공으로 사도련을 상대를 상대한다. 필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하려면 무공만 빼내야 하는데.’
재미가 있는 만큼 일은 복잡해졌다.
야현이 노리는 무공은 아수혈랑권과 아수혈조강.
문주 구염부와 소문주 사극유만이 익히고 있는 혈랑문 독문 상승 무공이었다.
야현은 핏빛 기운을 풀었다.
앵앵앵앵앵―
핏빛 향기에 취한 모기 십여 마리가 야현 곁으로 모여들었다.
‘적을 치려면 적을 알아야겠지.’
야현은 피로 이어진 모기를 혈랑문으로 날렸다. 십여 마리의 모기떼가 조용히 혈랑문 담을 넘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송충이 눈썹이 한껏 치켜선 젊은 사내, 혈랑문 소문주 사극유가 한가득 쌓인 서류를 살피다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총관이 찻잔을 내왔다.
“책상에 앉아 있는 건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군.”
“그래도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알아. 아니까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이지.”
사극유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그나마 조금은 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담 달이지?”
“정확히는 이십칠 일입니다.”
“끄응. 그렇다면 스승님이 나오시려면 족히 이십 일은 남았다는 말이군.”
사극유는 앓는 소리를 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주님은 슬슬 문의 일에 손을 놓으시려는 거 같아 보였습니다.”
“뭐?”
사극유가 인상을 화락 찌푸렸다.
“젠장.”
사극유는 갑자기 목이 탔던지 뜨거운 차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익숙해질 겁니다.”
총관이 빈 찻잔에 다시 차를 채우며 능글맞은 웃음을 보였다.
“이번에는 벽을 넘어서야 하실 텐데.”
“넘어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야지. 하지만…….”
사극유는 문주 구염부가 작년에 벽을 깨기 위해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가 가벼운 주화입마에 빠진 사실을 떠올렸다. 그로 인해 매년 열리는, 백대문파 서열을 새로이 결정하는 백문대전에서 밀려 문파 서열이 십육 위로 뚝 떨어진 상태였다.
“이번에는 별일 없이 무사히 나오셔야 할 텐데.”
사극유는 걱정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 모기 한 마리가 조용히 붙어 있었다.
“폐관 수련에 주화입마라.”
야현은 눈을 뜨며 하얀 송곳니를 드러냈다.
* * *
팡! 파방!
상의를 탈의한 반백의 머리카락과 흡사 장비를 연상케 하는 반백의 뻣뻣하게 뻗은 수염을 가진 사내가 허공을 할퀴고 차고 있었다. 한 마리 늑대처럼 표홀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은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우람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 * *
지붕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야현은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눈꺼풀 속에 감춰진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수혈랑권과 아수혈조강이라 했었지?’
야현의 시야에 반백의 장년 사내의 움직임이 비춰지고 있었다. 야현이 보고 있는 장년 사내는 혈랑문의 문주 구염부였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다르면서도 같다.’
구염부가 펼치고 있는 아수혈랑권과 아수혈조강을 살피며 느낀 감정이었다.
“베라칸,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야현 옆에 앉아 있는 베라칸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붉은 피가 맺혀 있었다. 야현의 피를 매개로 베라칸 역시 야현과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즉, 혈랑문의 무공이 자신과 적랑 기사단의 무력을 한 층 더 높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왜 혈랑문 문주가 주화입마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지도 알겠습니다.”
베라칸의 무공이 구염부보다 높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베라칸이었기에, 늑대 인간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본인도 그대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만 지금은 알아보겠군. 왜 혈랑문 문주가 벽에 가로막혀 있는지.”
이유는 단 하나.
혈랑문의 무공은 늑대의 움직임에서 가져왔다.
사람과 늑대는 골격과 근육의 양과 질이 다르다. 또한 사람이 늑대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수는 없다. 문제는 아수혈랑권과 아수혈조강이 지나치게, 어떻게 보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본연의 늑대의 움직임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닌 듯싶은데…….”
몇몇 동작에서 무리한 몸놀림으로 관절에 무리가 가며 기혈이 꼬이는지 구염부는 상당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무공의 창시자는 신체 구조가 저희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특이한 신체를 타고나는 이들이 간혹 있지. 대부분 그런 자들이 만든 무공은 후대에서 빛이 바래지만.”
“수련이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같습니다. 언제 주화입마에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야현의 말에 베라칸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구염부의 수련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일 내로 기회가 오겠군. 안 되면 만들어야겠지만.”
* * *
“컥!”
팔과 어깨 관절이 무리하게 꺾인 구염부는 팔을 부여잡으며 고통에 찬 신음을 삼켰다.
“젠장!”
구염부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입술을 자근 씹었다.
구성(九成)의 경지에 오른 지 언 십 년.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인생은 승승장구였다.
역대 어느 문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무공 성취는 빨랐다. 아수혈랑권과 아수혈조강을 창시한 개파조사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십성의 경지도 그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여느 전대 문주들처럼 십성의 벽에 막혀 버렸다.
십 년 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
왜 십성에 오르지 못하는지 그 이유도 이제는 명확히 안다.
하지만 자신은 무인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쿵!
구염부는 폐관 수련실 벽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정녕 이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오리까?”
사도련 내에서 입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자신의 무공은 십 년째 답보 상태였지만 밑에서는 매섭도록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슬슬 서열 십 위권 유지도 벅찼다.
“끄으.”
주화입마가 가까이 다가온 터라 감정의 기복이 심해졌는지 구염부는 입술을 깨물며 낮은 울음을 삼켰다.
“개파조사와 같은 기연 없이는! 그들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이상에는 대성은 정녕 불가능한 것이오이까? 이 땅에 정녕 낭인족(狼人族)이 살고 있기는 한 것이오이까?”
구염부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 * *
“낭인족?”
야현이 눈이 번쩍 떠졌다.
“흠.”
동시에 베라칸의 입에서 진중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낭인족, 낭인족.”
야현은 고개를 돌려 베라칸을 바라보았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시선을 마주했다.
“어찌 생각하나?”
“옛 고서에 동방에도 소수의 반인반수(半人半獸) 혈족이 존재한다고 적혀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혈족에 낭인족은 없었습니다.”
“있을 확률은?”
“고서에 내려오는 문헌일 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에서는 서방과 동방 간에 교류가 있었던 모양이군.”
“아마도 그런 듯싶습니다.”
“늑대 인간 족의 고문헌에도 없는 낭인족이라. 아마도 늑대 인간의 일족일 확률이 크군.”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혈랑문의 개파조사가 하프 블러드, 그러니까 반혈(半血)이었던 모양인데.”
뱀파이어는 피로 후대를 남긴다.
하지만 늑대 인간은 아니다.
늑대 인간은 여느 생물들처럼 생식 활동으로 일족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런 늑대 인간들 집단 내에서도 특이한 종족이 있었으니 바로 하프 블러드, 그러니까 반혈의 존재들이었다.
반혈은 늑대 인간에게 물려 반인반수로 다시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늑대 인간이면서도 늑대 인간이 아니었다.
후대를 낳을 수 없으며, 힘 또한 순혈 늑대 인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늑대 인간 종족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반혈을 만들지 않았다.
“이거 이거, 재미있어지는군.”
야현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베라칸.”
“예, 주군.”
“가장 무서운 적이 누구라 생각하나?”
“…….”
“가장 무서운 적은 말이야.”
야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아군 속에 몸을 숨긴 적군일세.”
* * *
구염부가 가부좌를 튼 상태로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심상이나 내공 수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을 뿐이었다. 주화입마에서는 벗어났는지 그의 얼굴에 고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씁쓸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구염부는 시선을 내려 간이 서탁에 놓인 낡은 죽편과 한 권의 서책을 내려다보았다. 죽편은 개파조사가 남긴 글이었고, 서책은 그 글을 옮긴 후 전대 문주들의 짧은 글들을 남긴 것이었다.
죽편에 적힌 개파조사의 원본을 읽는 구염부의 눈동자에 체념이 담겼다.
‘이제는 포기해야 하는가?’
구염부는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말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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