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 After the Withdrawal of the Warrior Party RAW novel - Chapter 56
EP.56 내 차례 – 1
“오늘 일정은 뭐야? 눈 밟는 건…”
“그건 밤에. 오늘 밤은 만월이라 설원이 볼만할거야. 그리고 낮에는… 일단 공주님 대회 등록하고 예선부터 치뤄야겠지?”
“으… 어제 연습을 못했어요…”
어제 거나하게 취해버려서 루실은 결국 연습게임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 또한 루실의 선택일 뿐이다.
만약 이 대회에서 루실을 우승시켜야 했다면 취중 듀얼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계속 시켰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좀 시간이 남는데 한번 하시겠습니까?”
난 덱을 꺼냈고 루실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씻고 올게.”
듀얼에는 별 관심이 없는 베로니카는 가볍게 기지개를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난 쿠키를 하나 입에 문 채 뽑은 카드를 내밀었다.
“일단 산중의 오두막을 발동시키겠습니다.”
카드 한장이 놓이자 루실은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가디언 카드를 배치했다. 그리고 쿠키를 한입 오물거리다가 문 쪽을 보았다.
아까 전, 레벤티아가 서 있던 곳이었다.
“레벤티아님… 왜 거기서 서 계셨던 걸까요? 뭔가를 계속 보고 계셨던 것 같은데.”
“글쎄요.”
그녀가 보고 있던 것은 내가 짠 목도리였다. 지금은 루실의 목에 걸려 있는 것과 비슷한.
그것을 보고 과거라도 추억했나보지. 아니면 자기 걸 잃어버려서 새로 받고 싶다거나.
물론 새로 만들어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저거 만드는 것도 꽤나 귀찮은 일인지라.
“…탐나셨던 걸까요? 하지만…누구에게도 줄 생각 없어요.”
루실은 고급 털실로 만들어진 목도리를 꼬옥 쥐고 날 응시했다. 마치 절대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녀를 향해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파괴되지 않는 이상 잃어버릴 일은 없을겁니다. 거기 있는 주술진 있죠? 그게 주인을 찾기 위한 주술진입니다.”
“어? 그래요?”
“예. 어제 밤에 공주님의 머리카락 한올을 받아갔습니다.”
“그, 그러셨어요?”
붉은색 비단실 같은 긴 머리카락을 한올 받아가 태워 주술을 완성시켰다. 그렇기에 저 목도리는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루실의 주변으로 이동된다.
“그런 주술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그렇게 어려운 주술은 아니죠.”
“…스승님. 용사파티분들에게도 이런 거. 만들어주셨었죠?”
“음. 예. 지금은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구나.”
루실은 뭔가 깊게 생각하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 게임에 집중 안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난 새로운 카드를 뽑아 뒤집어 배치하고 턴을 종료했다. 잠시 배치를 응시하던 루실은 또다른 가디언을 올려 놓고 마법카드를 발동시켰다.
“마법카드, 천둥의 일격으로 리버스된 카드를 공격할게요.”
듀얼을 배운 이후로 루실과 꽤 많이 게임을 했었고, 그럴 수록 그녀의 방식이 듀얼에 녹아나고 있었다.
루실은 카운터 속공마법을 좋아한다.
나도 주로 쓰는 방식으로 속공마법 콤보에 제대로 걸리면 상대방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라이프가 줄어들게 되어버린다.
나를 흉내내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그녀 자체가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 뭐,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리버스 카드 오픈. 마법 무효화를 발동시키겠습니다. 필드 내 모든 마법카드는 파괴됩니다.”
“마법카드가 파괴된 순간 선명한 예지자의 효과 발동. 듀얼리스트들은 각자 보유한 카드를 전부 무덤으로 보내고 현재 무덤에 있는 카드 수만큼 카드를 뽑습니다.”
이런. 손패가 되돌아가며 콤보가 막혔다. 루실은 싱긋 웃으며 새로운 카드를 손에 쥐었다.
“괜찮아요. 누가 뭘 하려고 하든.”
“흠…”
“절대 아무것도 못하게 할테니까.”
항상 기가 죽은 채, 방에서 나오지 못하던 약한 공주님은 이제 루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금 카드를 들고 있는 루실은 그 어느때보다 빛나보였고, 어떤 적이 오더라도 당당하게 맞설 것 처럼 보였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루실은 성장했다. 과거보다 더. 그 말은 S급 스승 달성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이기에 난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듀얼만큼은 질 수 없습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후우…”
촉촉해진 은색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으며, 평소 입는 검은색 수녀복이 아닌 편안한 검은색 셔츠와 반바지만 입은 채 베로니카가 맨발로 걸어나왔다. 하얗고 탄력적인 다리를 움직이며 거실로 나온 그녀는 쇼파에 축 늘어져 있는 루실을 보며 물었다.
“공주님 왜 이래?”
“후후후. 아직 멀었다는 증거지.”
어딜 감히 듀얼로 날 이기려고 그래?
청출어람은 아직 멀었다.
“으… 스승님은 정말 강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순간에 필요한 카드가 딱딱 맞춰서 나오는 거죠?”
“후후.”
“…그래도 반드시 스승님을 넘어설거에요.”
“꼭 그래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정도면 예선 정도는 쉽게 통과하시겠군요. 씻고 나오시면 등록하러 가시죠.”
“네에…”
비척거리며 일어난 루실이 욕실로 향한다. 그런 그녀를 힐끔 본 베로니카는 쇼파가 아닌 내 앞에 앉으며 말했다.
“나 머리 좀 말려줘.”
“안에 건조장치 없었어?”
“난 그것보다 사람이 말려주는게 좋은데. 그리고 머리가 너무 길어서 건조장치로 말리긴 힘들어.”
“교회에 있을 때는?”
“수녀들이 말려줬지. 나 추기경이야. 추기경. 그정도 특권은 있다고.”
혀를 날름거린 그녀는 아예 등을 내 다리 쪽에 기대버렸다. 안 말려주면 이대로 계속 앉아 있을 기세라 난 빗과 드라이기 형태의 건조장치를 가져왔다.
“그나저나 네가 말려주는 것도 오래간만이네.”
“그러게.”
백은 마을에서 베로니카를 처음 만난 이후로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는 와중에, 그리고 내가 업적작을 하던 와중에도 베로니카와 같이 움직인 적이 몇번 있었다.
그때 몇번 같은 숙소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녀의 머리를 말려 준 적이 있었다.
은을 녹여서 만든 것처럼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은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엉킨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난 빗을 이용해 그녀의 머리를 쓱쓱 빗기며 말려주었고, 너머의 거울로 비춰진 베로니카를 보았다.
눈을 감은 채 콧노래로 성가를 흥얼거리는 그녀는 꽤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좋으십니까? 손님?”
“응. 좋네. 평생 내 머리 정리해주는 사람으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로.”
“현자인 이 몸을 그런 일에 쓰려고 하다니. 성직자가 그런 과한 사치를 부려도 되냐.”
“성직자도 사람이야. 사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난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전에 엘프의 숲에서 만든 약 중 하나였다.
“뭐야?”
“헤어 에센스. 매력을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몸가짐이 필수지.”
남성이나 여성 캐릭터들이 사용하면 매력수치가 올라가는 약으로 꾸준히 사용하면 영구적으로 매력 수치가 올라간다.
“어. 그런데 성직자에게는 필요 없으려나?”
“다시 말하지만 성직자도 사람이고… 나도 여자라고. 예뻐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야.”
“흠. 그래?”
“…왜?”
“아니. 용사파티 애들은 딱히 원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다보면 매력수치가 필요할 때가 많았다.
매력 수치가 높으면 교섭이나 선택지의 수가 많아지니, 그에 관련된 스킬이 없는 용사파티 애들에게 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 매력수치를 올릴 방법을 가르쳐 줬었다.
물론 걔들이 제대로 미용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수련광인 레벤티아는 말할 것도 없고 에반젤린은 완벽한 엘프가 왜 그런 몸가짐이 필요하냐고만 했었지.
클레어는… 몇번 해주고 가르쳤지만 영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별 의미가 없더라.
“그래?”
“응.”
“후후…”
작게 미소지은 그녀는 살짝 턱을 들었다. 자연스럽게 밑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날 올려다보더니 두 눈을 감았다.
“뭐. 난 그들과 다르니까.”
준비가 끝나자 루실은 내 로브 자락을 꼭 잡았다. 꽤나 불안한 모양이다. 나름대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먼 것일까?
아니겠지. 아닐 거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선은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요.”
“…하, 하지만 제가 지면… 스승님께 누가 될까봐…”
“제가 보증합니다. 공주님이라면 반드시 예선을 통과하실 겁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우효오오옷! 리버스카드 오픈! 울프스 하울링 발동! 상대 필드의 수인 가디언은 모두 패로 돌아간다! 연계 함정카드 푸른 눈의 드레이크의 효과로 상대의 마법카드는 모두 무효화가 된다! 핫핫핫! 과연 당신이 내 다음 턴의 하울링 버스트 스트림을 막아낼 수 있을까?!”
“저정도로 과할 필요는 없지만.”
윌커스 녀석도 예선을 치루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앞에 있는 레이드닌의 수인족 직원은 인상을 왕창 구기고 있었다.
원래 듀얼할 때는 좀 조용히, 예의바르게 하는 것이 매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매너가 좋은 건 아니잖은가.
“우하하하! 이겼다! 이겼어! 역시 나의 늑대덱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하하하!”
“거 애새끼가 더럽게 시끄럽네! 주둥이로 듀얼하냐?! 응?!”
“뭣?! 내가 시끄러운지 아닌지 듀얼로 판가름하자!!”
예선을 통과한 윌커스가 다른 예선 통과자와 듀얼을 하는 것을 보며 루실은 땀을 삐질 흘렸다. 저 녀석, 수다만큼이나 자신감이 참 대단하긴 하지.
“그, 그럼 저도 갔다올게요.”
난 루실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저 자에게 가시죠.”
방금 전 윌커스에게 털린 감독관을 가리켰다. 그의 수다에 걸려 혼이 빠진 듯한 닭 수인은 힘겹게 카드를 정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이 약할 때 찔러야죠.”
물론 루실이라면 예선 통과 정도는 간단하게 하겠지만, 그래도 더 확실하게 이기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내 말에 루실은 가만히 날 응시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뇨. 스승님 말씀이 맞네요. 적이 약할 때 공격을 해야 하는 법이죠…”
그러더니, 힐끔 입구 쪽을 응시했다. 저기 뭐가 있나?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레벤티아였다. 쟤는 여기 왜 온거지? 카드에 관심도 없을텐데?
자세히 보니 예선장 안쪽에 있는 세실과 함께 온 모양이다. 베르문드와 뭔가 중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세실을 무시한 채 이쪽을 보는 레벤티아를 루실은 잠시 응시하다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
“예?”
“승리를 기원하는 의미에서요…”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망설이던 루실은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잇!”
그리고 내 품에 폭 달라붙어버렸다. 내 가슴에 머리를 가져가 콩콩 기댄 루실은 살짝 고개를 들고 배시시 웃었다.
“저. 이길게요.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상대한다 하더라도.”
“하하. 예.”
긴장감이 많이 풀린 듯한 루실은 윌커스를 상대한 감독관에게 향했다. 그렇게 그녀가 멀어지자 내 옆에 서 있던 베로니카는 내 팔을 살짝 잡으며 약간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좋아?”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답지.”
“호오. 그럼 친구가 친구를 아끼는 모습은 더 좋겠네?”
히죽, 고양이처럼 미소지은 그녀는 내 팔을 아예 끌어안고는 느긋하게 말했다.
“이따가 시간 남으니까 수영장이나 가자.”
가볍게 말한 그녀는 레벤티아와 세실, 그리고 루실까지 번걸아 바라 본 후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사파이어 같은 깊고 푸른 눈을 번뜩인 채 선고하듯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말물말물입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추석이네요 ㅎ 다들 한가위 잘 보내시기바랍니다
그럼 내일 만나요!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