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rate journalist becomes a tycoon RAW novel - Chapter 175
177화
청와대를 나와 차에 올라탄 재환은 묵은 숨을 뱉어냈다.
기분탓이겠지만, 전보다 힘들다는 느낌을 절절하게 받았다.
“회장님, 오늘도 몸 상태가 안 좋으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정신적으로 지쳤지만, 이틀 연속으로 일을 쉴 순 없다.
오늘은 TBS의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서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재환을 바라보다가 운전대를 잡았다.
TBS로 가는 동안 재환은 오늘 회의 내용에 대해 미리 생각하고 대응까지 염두해뒀다.
꼼꼼하게 준비를 해둔 덕에 회의 자체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
“그럼 채널 분리 자체는 동의하는 걸로 하고, 그 빈 시간을 메울 프로그램들을 미리 계획해서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제작해 보도록 하죠. 단기간에 할 일은 아니니 1년의 여유를 두고 진행하도록 하세요.”
재환의 정리 말로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실로 올라가는 재환의 옆에 한결이 곧바로 따라 붙었다.
“얘기 좀 하자.”
“선배, 바쁘지 않아? 오늘 회의에서 나온 사안들 정리하려면….”
“네가 그랬잖아. 여유두고 천천히 진행하라고. 당장 급한 것도 아니니까 커피나 한잔 하자.”
“급하지 않다고 한 건 채널 분리 건이고….”
재환이 하는 말을 자른 뒤 한결은 막무가내였다.
저 상태가 되면 뭔 말을 해도 안 먹힌다는 걸 알기에 재환은 양손을 들고 고분고분히 대표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뭔데.”
“뭔데는 내가 할 말이고 임마. 너 뭔 일 있어?”
재환의 속까지 꿰뚫어 보는 눈빛에 괜찮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괜찮다고 말해도 믿지 않을 선배다.
“일이 좀 있긴 했어.”
“또 뭔데, 무슨 큰 건인데.”
“그런 건 아냐.”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한결에게 다가갔다.
“선배, 오늘 옛날 기분 좀 내볼까?”
“갑자기 뭔 엣날 기분이야.”
“자꾸 내 말에 토 달지 말고 그냥 와.”
한결을 데리고 대표실에서 나온 재환은 서진에게 말했다.
“오늘은 다른 일 없죠?”
“네, 다른 일정은 조정해놨습니다.”
“그럼 빨리 집에 들어가세요. 저도 오늘 좀 쉬게요.”
서진을 조기 퇴근 시킨 뒤 재환은 한결과 함께 한강 둔치로 갔다.
“맥주 2캔하고 오징어 하나요.”
“KG 그룹의 회장이 한강에 앉아서 오징어 물고 맥주 깐다는 소리 들으면 다들 난리가 날 거다.”
“이미 난리가 난 것 같은데, 뭐.”
재환의 얼굴은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황이었기에 지나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재환을 알아봤다.
그들이 뭐라고 하든 재환은 아랑곳 않고 매점에서 산 맥주를 한결에게 건넸다.
“안 마셔?”
“마신다, 마셔.”
예전에 늘 앉던 자리로 가 두 사람은 맥주를 깠다.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킨 뒤에 한결이 다시 물었다.
“뭔 일인데, 이렇게 폼까지 잡냐.”
“폼은 무슨. 옛날 기분 좀 내는 거지.”
재환은 맥주를 홀짝이고 다리 하나를 더 씹었다.
한결은 참다못해 재환의 손에 든 맥주를 뺏어들었다.
“자꾸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답이나 해. 뭔 일이 있길래 그래.”
“에휴. 말하자면 좀 길어.”
재환은 한결의 손에서 맥주를 되찾은 뒤 천천히 말했다.
“선배,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잖아.”
“목숨이 두 개인 사람도 있냐?”
“난 몇 개 더 있었어.”
다소 엉뚱한 말에 한결의 표정이 묘해졌다.
애가 드디어 맛이 갔나 싶은 표정이었는데, 농담을 한다기엔 재환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선배, 혹시 내가 회사 사무실에서 자다가 혼냈던 날 기억나?”
“무슨 회사, TBS?”
“TBS 설립 전에. 오늘의 신문에 있을 때. 아직 나나 선배나 그냥 취재기자이던 시절에 말야.”
“아, 그 때? 너가 갑자기 밖으로 튀었지.”
“그래. 그 날.”
재환은 그 때부터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이야기 해 나갔다.
기억이 흐릿한 부분도 있었지만, 한결이 설명을 보태준 덕에 이야기는 막힘없이 진행됐다.
한참을 이야기 한 뒤 재환이 말했다.
“그 여벌 목숨이 사라졌어.”
“참…. 믿을 수가 없네.”
한결은 투덜거리면서도 지금 한 말이 어느 정도 진실이란 느낌을 받았다.
노빠꾸 직진을 하던 재환은 항상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목숨 줄이 몇 개는 되는 줄 알았다.
“진짜로 목숨이 몇 개 더 있어서 그 짓거릴 했던 거냐?”
“그런 셈이지.”
죽을 위기에 처하면 미래를 바꿀 기회를 얻게 된다는 걸 알게 된건 나중의 일이긴 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좀 무서워진 거 같아. 전처럼 하는 게.”
“너도 무서운 게 있긴 하구나.”
“사람을 뭘로보고.”
“근데 그건 너답지 않지.”
한결은 빈 맥주캔을 흔들며 말했다.
“잘 생각해봐. 처음에 넌 죽어도 살아날 줄 몰랐다며. 근데도 죽을 각오를 하고 특종을 내려고 한 거 아냐.”
“그랬지.”
“그래. 지금하고 다를 게 없는 상황이야. 달라진 건 네 마음가짐뿐이라고.”
한결은 재환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근데 상황은 훨씬 좋지. 지금 너한텐 KG 그룹이 있고, TBS가 있잖아. 네가 카르텔을 위협하기 위한 무기였지만, 지금은 널 지키기 위한 든든한 방벽이 되어줄 거라고.”
“반대로 그것들 때문에 위험해지지 않을까.”
한결은 한참을 들어주다가 재환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냥 맘대로 해. 네가 하던 대로 하면 문제 될 거 없어.”
“끄응….”
“쫄리면 그냥 다 던지고 기자나 해. TBS에 자리 하나 마련해 줄게. 그게 아니면 그냥 저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나 짓던가.”
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환을 내려다봤다.
“어차피 인생 한 번 사는 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벌어놓은 돈도 많으면서 자꾸 앓는 소리나 하고 있어.”
“어디가?”
“맥주 사러! 어우, 갑갑한 놈.”
한결이 잠시 자리를 뜬 동안 재환은 깊이 생각해봤다.
계속 생각해 왔지만, 이 자리에 있는 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다란 느낌을 계속 받는 것 같다.
그렇다면 처음 예정대로 기자로 돌아가는 게 좋을까.
이 해답은 그날 늦게까지 맥주를 마셔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우, 술 냄새.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그냥 선배하고 한 잔 두 잔 기울이다보니 그렇게 됐네.”
예희가 매서운 눈으로 재환을 보다가 등짝을 때렸다.
“이젠 애도 둘인데 나잇값 좀 해. 언제까지 이팔청춘인 줄 알아?”
“흐흐.”
“왜 웃는 것도 그렇게 웃어. 술을 얼마나…. 스톱! 냉장고에서 맥주는 왜 또 꺼내!”
“우리 마누라랑 한 잔 하려고.”
재환이 웃으며 맥주를 흔들자 예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맘 같아선 당장 재우고 싶은데, 직감이라는 게 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뭔가 일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란 직감이 든 것이다.
예희가 맥주를 받자 재환은 신나서 맥주캔을 기울였다.
한참을 마시다가 재환이 물었다.
“예희야, 내가 다 때려치고 기자한다고 하면 어쩔 거야?”
“왜, 힘들어?”
“아니, 뭐. 힘들다기보단…. 부담스럽다? 그런 거?”
언제 또 위험한 일을 겪게 될지 모르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 다친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물론 지금은 그 때와 많은 게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불안하다.
“그럼 그만 둬.”
“어?”
“그만 두고 기자하면 돼.”
예희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옷장 깊숙한 곳에서 통장 몇 개를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꽤 많은 액수의 금액이 찍혀 있었다.
“당신이 오늘의 신문 대표도 되고, KG 그룹 회장도 되고 하면서 돈 많이 벌었잖아. 근데 언젠가 기자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긴 했어. 그래서 내 나름대로 돈을 모아두긴 했지.”
“여보.”
“지금 집 팔면 돈도 넉넉히 나올 테니까. 굳이 돈 걱정할 거 없어. 그냥 예전 기자 시절에서 로또 두 번 정도 당첨됐다 생각하면 되는 거지.”
예희는 웃으면서 재환의 뺨을 꼬집었다.
“그러니까 우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마. 당신 생각만 해.”
“내 생각?”
“그래. 지금 일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 떠나면 아마 다시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터다.
갑의 위치에서 을, 병의 위치로 내려갈 거고, 세상의 불합리함이 닥쳐와도 아무것도 못할 터다.
그 때가서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꽤, 상당히 어려운 일일 거다.
“참, 괜한 걸 걱정하고 있었나 싶기도 하네.”
“당신은 잘하고 있어.”
그날 밤 예희는 재환에게 괜찮다, 잘하고 있다는 위로의 말을 끊임없이 들려줬다.
다음 날 재환을 데리러 온 서진은 슬쩍 웃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으신 모양이군요.”
“네, 걱정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뇨, 회장님의 상태가 좋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
차에 탄 뒤 재환은 서진으로부터 스케줄에 대한 내용을 쭉 들었다.
“당분간은 여러 행사자리에 얼굴을 비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해외 행사에도 참석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습니다.”
“인지도가 높아지니 이런 일도 들어오는 군요.”
“강연에 대한 내용도 있었는데, 이건 시간 관계상 패스했습니다.”
재환은 일정에 대한 내용을 수첩에 기록하려다 멈칫했다.
그동안 쓰던 수첩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니까.
“저, 비서실장님.”
“네.”
“가까운 문구점, 아니 중고서점에서 수첩 하나 구해주실 수 있나요?”
“중고서점에서요?
“네, 펜도 같이요.”
서진은 다소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수첩과 펜을 구해왔다.
재환은 수첩을 받아 막연한 기대를 품고 맨 뒷장을 펼쳤지만, 어떠한 문구도 적혀 있진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두 번이나 우연이 생기진 않았다.
“혹시 찾으시는 수첩 디자인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뇨, 괜찮아요. 이거면 돼요.”
재환은 수첩을 받아든 뒤 스케줄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나갔다.
서진이 깔끔하게 정리해 놨을 테니 굳이 재환이 할 필요는 없었지만, 오랫동안 해온 습관을 없애는 것도 힘든 일이다.
“앞으로는 외부로 돌아다니는 일이 많겠군요.”
“맞습니다. 아, 경호의 수는 전으로 돌려도 괜찮을까요? 제 생각에는 아직 유지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뇨, 강대국들과는 원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물론 앞에선 하하 호호하고 뒤에선 칼을 갈고 있을 수도 있지만 당장 칼을 드러내진 않을 터다.
당분간은 묘한 협력관계가 유지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오랜만이군요. 강재환 회장. 직접 다시 보니 반갑군요.”
KG 그룹 본사에 도착한 순간 재환을 기다리고 있던 이가 있으니 다름 아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으나 서진이 곧바로 답해줬다.
“그저께 한미 공동 훈련을 직접 보겠다는 명목으로 왔습니다. 어디까지나 명목이고 회장님을 만나 뵈러 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째서죠?”
“전에 말했던 일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에 말했던 일이라면.
“강재환 회장, 제가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과 달리 공식적으로 여쭤보는 겁니다.”
가볍게 흘려 넘겼던 말이 부메랑마냥 돌아와 재환의 가슴팍에 박혔다.
“미국으로 넘어오실 생각 없으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대통령님, 이건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내용입니다.”
인재 유출이란 명목 하에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물었지만 그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 대통령은 자신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하….”
재환은 그 대통령의 면상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재환이 떠나주는 게 무조건 좋을 테니 그런 제스쳐를 취한 걸 터다.
“어떠십니까.”
그의 질문에 재환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