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1
00011 사라진 반지 =========================================================================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훈이 다소 높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해경은 성훈을 마주보다 시선을 내렸다. 성훈의 품에 안긴 영채는 겁을 먹은 표정으로 해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해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김영채씨께 직접 들어야겠습니다.”
“당신 누구야?”
영채가 벌벌 떨자 애처가로 소문난 이답게 성훈이 벌컥 화를 냈으나, 해경은 아랑곳하지 않고는 소파를 가리켰다.
“관객들은 모두 앉아 주시지요. 이제부터 돈 주고도 못 볼 공연을 보시게 될 겁니다.”
성훈이 해경에게 달려들려 하자 성국이 사장님, 하며 재빨리 성훈을 제지했다. 성훈은 씩씩거리면서도 보안과 형사인 성국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영채를 먼저 앉히고는 그 곁에 앉았다. 해경이 눈짓으로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 소화와 성국 역시 머뭇거리다 소파에 앉자 해경은 연극적인 동작으로 양 팔을 벌려 보였다. 거실에서 서 있는 사람은 해경과 상준뿐이었다. 해경은 상준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양 마치 변사처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사건이 시작된 건 보름 전쯤입니다. 여기 계신 박소화 양은 김영채 씨의 심부름을 가게 됐지요. 김영채 씨는 그날 아침부터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 이것 때문이었지요.”
해경은 이 대목에서 품을 뒤져 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영채가 받았다는 협박 편지였다.
“김영채 씨는 협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해치는 것이 싫다면 결혼반지를 내놓으라는 편지였지요. 그가 언제 어떻게 그 반지를 가져가겠다는 말은 이 편지에 단 한 마디도 없었지만, 김영채 씨는 겁에 질린 나머지 반지를 어딘가 안전한 곳에 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는 전당포의 금고에 반지를 맡기기 위해 박소화 양에게 심부름을 시켰지요. 맞습니까?”
해경이 영채를 내려다보자, 영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경은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박소화 양은 전당포로 가는 길에 괴한에게 습격을 당합니다. 이때 난투를 벌이다 반지가 든 가방을 떨어뜨리게 되지요. 죽음의 고비를 간신히 빠져나온 박소화 양은 서둘러 가방을 찾아 전당포에 맡겼지만, 전당포에서 확인한 결과 반지는 그 안에 없었습니다. 그 귀한 결혼 반지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도 알 수 없게 아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죠. 그런데 며칠 뒤, 박소화 양의 방에서 이 반지가 나오게 됩니다. 청소를 하던 중 김영채 씨가 발견한 것이지요. 김영채 씨는 박소화 양을 절도범으로 고발했고, 박소화 양은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소화 양이 훔쳤다고 주장한 그 반지는 사실 유리알이 박힌 가짜였죠.”
“거기까진 이미 다 아는 얘기요.”
성훈이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내뱉었다. 해경이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성훈의 말을 막았다.
“성격이 무척 급하시군요. 지금부터가 진짜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제가 의문점을 가진 것은 여기니까요. 박소화 양이 습격을 당했던 그 때, 저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소화 양을 습격한 그 놈은 돈을 노리는 놈 같지도, 부녀자를 노려 나쁜 짓을 하려는 놈 같지도 않았습니다. 마치 원한이 있는 사람처럼 이 어린 아가씨를 매우 심하게 때렸는데, 잘 아시다시피 박소화 양은 딱히 원한을 살 사람이 없었지요. 처음에는 반지를 가져간 자가 그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는 곧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 반지 때문이지요.”
해경은 다시 품 안에서 반지 상자를 꺼내 열어서는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상준을 돌아보았다. 반지를 본 상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해경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웃었다.
“이 반지는 의심할 수 없는 진품입니다. 조선 팔도에 같은 물건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이게 바로 사장님께서 선물하신 그 반지지요.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성훈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반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탁자 위에 놓인 과도로 다이아몬드 위를 긁어 보기까지 한 성훈은 반지가 진품임을 깨달았는지 다시 내려놓았다. 해경은 그 과정을 지켜보다 말을 이었다.
“김영채 씨가 박소화 양을 심부름 보내기 며칠 전, 이 반지를 이미 손에 넣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오?”
“거짓말이에요!”
성훈과 영채의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영채가 사기꾼, 거짓말쟁이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해경을 가리켰지만 해경은 영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며 상준을 가리켰다.
“이십여일쯤 전 한 사내가 경성역 금신당에 들러 이 반지를 맡기고 백 원을 받아 갔습니다. 이 반지는 화순전당포로, 그리고 다시 상진전당포로 갔지요. 상진전당포에서 한 묘령의 여인이 이 반지를 알아보고 무려 천 원 가까운 거금을 내어 사들였습니다. 아마 그 사내는 상진전당포에서 반지 값을 받아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묘령의 여인에게 이 반지를 잠시 빌린 것이고요. 이 반지를 맡긴 사내가 누구냐 하니, 경성 최고의 배우 한상준씨란 말입니다.”
상준의 얼굴이 밀랍처럼 경화됐다. 성훈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영채와 상준을 번갈아 보았다. 영채는 거의 졸도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상준의 번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와 번들거렸다. 해경은 소파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진짜 변사라도 된 양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이게 웬일입니까? 왜 김영채씨의 반지를 한상준씨가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보니, 제 성격상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잠이 오질 않아서요, 개인적으로 조사를 좀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재미있는 사실들이 밝혀지더란 말입니다. 반지 심부름을 보내기 전 이미 반지는 전당포에 가 있었으니 그 가방은 원래부터 비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김영채씨입니다. 그런데 김영채씨는 여기 계신 박소화양에게 도둑이라는 누명을 덮어씌웠습니다. 본인이 주장하면 경찰이 의심하지 않을 것임을 악용해서 가짜 반지를 만드는 치밀함까지 보였지요.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김영채씨는 박소화양을 죽이고 살인자가 반지를 가져간 것처럼 꾸미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박소화양이 살아서 돌아왔지요.”
거실 안의 공기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바짝 긴장했다. 거실에 있는 이들은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해경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 다 거짓이에요……어찌 저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세상에, 여보, 저 사람 좀 내쫓아 주세요, 제발요…….”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채 눈물까지 가득 고여 더듬거리는 영채의 얼굴은 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을 그대로 끄집어낸 듯 처연히 아름다웠으나, 해경은 그 얼굴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제가 없었더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김영채씨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깝게도 저는 그 자리에 있었고, 박소화양을 습격한 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제가 놈을 다시 만난 건 며칠 전입니다. 무대에 서 있더군요. 살인을 할 뻔한 놈이 고개를 버젓이 쳐들고 무대에서 돌아다니더란 말입니다. 김영채씨, 당신의 사촌 동생인 김정호 말입니다.”
김정호의 이름이 해경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성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가 그 아름다운 가면 뒤에 무서운 살인 교사자의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남자가 어디 있으랴만, 성훈은 특히나 이 상황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듯 보였다. 그 얼굴은 여전히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으나, 움켜쥔 주먹에서 튀어나온 뼈마디는 희게 질려 있었다. 해경은 이 대목에 이르러 상준을 한 번 돌아보았다.
“김영채씨는 사촌 동생인 김정호를 시켜 박소화양을 습격하게 했습니다. 반지를 강도당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자신의 하녀를 죽여도 좋다고 교사했지요. 그러나 정작 이 반지를 그 전에 전당포에 팔아치웠던 건 여기 계신 따그라스 한 되시겠습니다.”
“……증거를 대시오.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상준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이마를 훔치며 애써 태연자약히 내뱉었다. 해경은 상준을 빤히 마주보았다.
“증거라면 천변 근처의 마작장 노름꾼들이 대 줄 것입니다. 당신은 노름빚이 몇천 원에 달하자 내연 관계의 김영채씨에게 손을 벌렸고, 김영채씨는 큰 현금이 없어 우선 반지를 빼 주었지요. 언제든 비슷한 것을 구하거나 되사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김영채씨가 받았다는 그 의문의 협박 편지입니다.”
해경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반이 찢겨 나간 포스터 뒤에 왼손으로 급히 갈겨 쓴 예의 편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상준씨가 김영채씨에게 돈을 빌리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협박편지를 꾸며 써서 돈을 뜯어내려 한 것일까도 의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김영채씨는 너무나 순순히 그 귀한 결혼반지도 아낌없이 내주었지요. 때문에 굳이 이런 편지 따위를 쓸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혹시 자작극이 아닐까요? 반지를 박소화양에게 맡겨야만 했던 까닭을 만들기 위해 김영채씨가 꾸며 쓴 것은 아니겠냐 이 말입니다.”
해경이 편지를 앞뒤로 뒤집어 보이자 성훈이 영채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여보, 말해 봐요. 이 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오? 당신이 그 반지를 저 놈에게 준 게 맞느냔 말이야!”
경성에서 제일가는 애처가로 소문난 성훈이니만큼 자신의 한정없는 사랑이 배신당했을 때의 분노와 좌절감은 더욱 클 것이었다. 영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영채의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성훈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떨어뜨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영채씨, 서로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영채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고 숨소리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해경은 문득 자신의 손에 쥐어진 편지를 다시 보았다. 한참이나 그 편지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해경이 막 영채를 일으키려는 성국을 제지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하다 영채의 팔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해경은 몸을 숙여 영채의 눈앞에 그 편지를 보여 주었다. 영채가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해경은 거의 코앞까지 그 편지를 바짝 들이댄 채 물었다.
“이 편지의 윗줄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습니까?”
뜻밖의 말에 거실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해경을 보았다. 영채의 눈이 흔들렸다. 해경은 재차 영채를 다그쳤다.
“이 편지의 내용은 이게 전부가 아니지요? 다른 내용이 있었을 겁니다. 뭐라고 써 있었습니까?”
“모, 몰라요! 나는 모른다구요!”
해경은 글씨가 써 있는 면을 가리켰다. 찢어낸 부분 바로 아래 적힌 서툰 글씨는 모두가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이 포스터는 아주 급하게 찢어냈습니다. 찢어낸 면이 바르지 않지요. 그런데 글씨는 이 찢어낸 부분에 바투 붙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종이를 찢어 무엇을 적을 때 이렇게 바투 붙여 쓰지 않습니다. 이 윗줄에는 당신이 숨기고 싶은 내용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급히 찢어야만 했고, 아랫줄만을 공개한 거지요.”
영채는 침묵했다. 해경은 탁자 위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 편지는 왼손으로 썼습니다. 글씨를 왼손으로 쓰는 것은 필적을 숨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처음 한상준씨를 의심한 것은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나 전당포의 장부에 적힌 그의 글씨와 이 편지의 글씨가 서로 달라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때문에 김영채씨가 경찰에 들키지 않기 위해 이 편지를 자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방금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해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큰 그림을 보려다 작은 그림을 놓칠 뻔한 스스로에 대한 자조 같은 것이었다. 해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퍼졌다.
“이 편지의 윗줄에는 아마도 김영채씨와 한상준씨의 사이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남편에게 알리겠다는 내용이 있었을 겁니다. 김영채씨는 이미 불태워 버렸다는 이전 편지에 이 편지를 보낸 이가 남편을 해꼬지하겠다고 했고, 이 편지에서 반지를 요구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협박을 하는 내용과 요구사항을 따로 보낸다고요? 왜 그렇게 할까요?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 부호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고 신고한다면 당장 경찰들이 달려올 텐데 누구라도 그런 위험 부담을 감수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편지를 보낸 이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김영채씨가 이 편지를 경찰에 신고할 수 없다는 것과 김영채씨와 한상준씨가 불륜의 관계라는 것. 그런데 왜 하필 돈도 아니고 처분하기 어려운 반지를 요구했을까요?”
해경은 거실 안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다 한 곳에 시선을 주었다. 해경의 시선이 머무른 자리로 다른 사람들의 눈도 따라 움직였다. 해경의 시선이 멈춘 곳은 조성훈이었다. 해경은 성훈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성훈의 서늘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 편지를 보낸 이는 이미 김영채씨의 수중에 그 반지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조성훈 사장님?”
영채가 완전히 혼이 빠진 얼굴로 천천히 성훈을 돌아보았다. 성훈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해경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애정이 없다 한들 남편의 글씨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부인은 없을 겁니다.”
“여보……여보, 설마……아니지요? 아니지요?”
영채가 성훈에게 매달려 애원하다시피 물었으나 성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경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성훈 사장께서는 김영채씨의 공연이 시작되면 사무실과 건물 내에 포스터로 도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흔한 종이인 포스터의 뒷면에 왼손으로 협박 편지를 써서 보낸 겁니다. 어쩌면 애정을 시험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지요. 김영채씨 본인이 잘못했다고 뉘우친다면 용서할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김영채씨는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을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며 사람을 죽이려는 중죄를 지었습니다.”
거실 안은 삽시간에 침묵으로 잠겨들었다. 영채와 상준에 대한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었으나,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된 편지가 실은 성훈이 쓴 것이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탓이었다. 여자의 바람이 들통났을 때 맨몸으로 가진 것 하나 없이 쫓겨나는 경우는 밥먹듯 흔한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 협박 편지를 쓰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금까지 연기를 해 온 성훈이 영채에게는 맨몸으로 내쫓기는 것보다 더욱 무서울 터였다.
“……무엇을 원하시오?”
성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경은 성국을 슬쩍 보았다. 성국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성훈이 해경을 올려다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영채가 나를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겁니다. 소화를 죽이려 한 건 아내의 실수요. 영채는 재능 있는 여배우입니다. 살인교사로 체포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입니다. 배우 생명이 끝날 겁니다. 원하는 대가는 무엇이든 지불할 테니 없었던 일로 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대답한 해경이 소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화는 어쩔 줄 몰라하다 겨우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저는 누명을 벗은 것으로 괜찮습니다.”
“관대한 아가씨로군요. 저였다면 당장 감옥에 처넣어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요.”
농담 반 진담 반의 말투로 대꾸한 해경이 성훈을 마주보았다.
“김정호씨의 일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처남에 관해서는 내가 알아서 할 겁니다.”
성국은 입을 다문 채 성훈의 눈치를 보았다. 경찰 고위직과도 관계가 있는 성훈이었다. 애초에 절도 건으로 신고되었던 사건의 실상이 밝혀지자 절도범이 없으니 체포할 사람도 없었고, 살인교사로 영채를 체포하자니 피해자인 소화가 누명을 벗은 것으로 족하다고 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것이었다. 해경은 탁자 위에 놓아 두었던 반지를 집어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겠군요. 이 반지는 이미 어떤 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반지를 되찾으시려거든 반지 값을 돌려주셔야겠습니다.”
성훈이 협탁의 서랍을 열어 수표책을 꺼내서는 펜으로 무언가를 적은 뒤 해경에게 내밀었다.
“일금 천이백원의 수표입니다. 반지 값으로 결코 적은 돈은 아닐 겁니다.”
해경은 그 수표를 적어 안주머니에 넣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정도라면 그 분도 만족하시겠군요. 박소화양은 누명을 벗었고, 김영채씨는 반지를 찾았고, 형사님께서는 범인을 알게 되었으니 모두에게 좋은 결말이라고 해야 할까요? 경성 최고의 배우들이 등장하는 재미있는 연극 한 편 잘 본 셈 치겠습니다. 소화 양, 그만 가실까요? 아, 두고 간 짐도 챙겨 오십시오.”
해경이 소화에게 살짝 눈짓을 하며 먼저 현관을 나섰다. 소화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서 있다가 거실 안의 사람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황급히 자신이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충주댁이 챙겨 놓은 듯 보따리 두어 개가 빈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서둘러 보따리를 든 소화는 해경을 따라나섰다. 해경의 뒤를 따라가던 소화는 해경에게 말했다.
“저, 저어,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해경이 소화를 돌아보고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돈 한 푼 안 될 것 같았던 일인데 덕분에 어려운 이도 돕고 떡고물도 좀 얻었으니 나쁠 건 없지요. 돌아가는 길이니 차로 모시겠습니다.”
대문에 세워진 경찰차를 지나 큰길가로 나선 해경이 택시를 잡았다. 소화와 함께 택시를 탄 해경은 향운정입니다, 하고 말하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화는 치맛자락 위에 놓인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성훈과 영채가 어찌 될지 궁금한 마음이 생겼으나, 그것은 소화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일 터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렵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소화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채의 흰 손이 떠올랐다. 그리 아름다운 손에 귀하고 비싼 반지를 끼어도 그 마음까지 곱지는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자 무섭고 슬픈 마음이 들었다. 한양 가면 눈 뜨고도 코 베어 가는 이들이 있단다, 하고 어린 자신을 무릎 위에 앉히고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얼굴을 되새긴 소화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소화의 한숨 소리에 해경이 소화를 보았다.
“잊은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저어……할아버지께서 예전에 경성 사람들은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는 놈들이라고 하셨던 것이 생각나서요.”
해경이 그 말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누군가 눈 뜨고 있는데 코를 베어 가거든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다시 찾아 드리지요.”
거기에는 무심한 듯 장난기가 어려 있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말이기도 했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알아채지 못한 채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맑은 날이었다. 멀리서 전차의 종소리가 평화롭게 울리며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