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2
00012 사라진 반지 =========================================================================
“사랑이 뭔지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리 돈이 많고 권력이 있어도 사람 마음 하나 제 마음대로 못하는 것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고…….”
인혜가 궐련 끝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허공으로 연기를 뱉었다. 해경은 짐짓 놀란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
“조선 팔도의 난다긴다하는 사내들이 몰려와 구혼을 해도 귓등으로도 들은 척 아니 하시는 향운정의 자련께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어머, 이이 좀 보라지.”
눈을 흘기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 샐쭉하니 웃은 인혜는 해경이 내민 수표를 받아들어 펴 보았다. 일금 천이백원이라는 숫자가 쓰인 수표를 본 인혜가 수표를 다시 내려놓았다.
“청년 부호답게 통은 큰 이로군요. 팔백 원에 샀는데 천이백 원을 쳐 주다니.”
“떨어질 떡고물은 좀 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떡고물 치고는 꽤 크군요. 먹다가 걸릴까 겁나네요.”
해경은 인혜의 말에 뼈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혜가 손가방 안의 지갑을 꺼내 백 원짜리 지전 네 장을 세더니 해경에게 내밀었다.
“과식을 하면 꼭 체하니, 내 몫이 아닌 건 미스터 정이 받아 두세요.”
“이 건에서는 최 사장님의 도움만 받았는데 돈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언젠가 미스터 정의 도움을 받을 일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내가 도움을 받을 일이라면 의뢰비가 그리 싸지는 않겠지요? 그 날을 대비하여 미리 투자를 해 둔다 치지요.”
해경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혜가 내민 돈을 받아 넣었다. 인혜와는 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해경은 그녀가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도 있는 법이었고, 이 돈 역시 인혜가 자신을 절대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기꺼이 투자하는 돈이었다. 인혜가 해경을 이용하려는 만큼 해경 역시 인혜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었고,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항이었던 것이다. 해경은 화제를 돌렸다.
“소화 양은 어딜 나간 모양이군요.”
손님 방 쪽으로 한 번 시선을 준 인혜가 대답했다.
“새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것 같았어요. 당분간은 이곳에 있어도 된다 했지만 영 마음이 불편하다며……새벽같이 일어나 청소도 하고 밥도 지으려 하는 바람에 미랑이가 아주 대경실색을 했답니다.”
“그렇습니까?”
“경력이 짧고 어린 아가씨라 아무 곳에나 들어갈까 좀 걱정이 되는군요.”
해경은 소화의 얼굴을 떠올렸다. 택시 안에 앉아 할아버지가 경성 사람들은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이들이라고 했다며 울적한 표정을 하던 것이 생각나 저도 모르게 피식 웃자 인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해경을 보았다. 해경은 입가를 손으로 슬쩍 가리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큰일을 겪었으니 아무나 믿지는 않을 것이고, 제법 총기가 있는 아가씨라 괜찮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시계를 본 해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인혜를 돌아보았다.
“혹시 소화 양이 돌아오거든 내일은 종로통 인력소개소 쪽에 한 번 가보라고 말을 좀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요.”
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화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더 지난 뒤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들어오던 소화가 인혜를 보고는 멈춰서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일자리를 구하러 갔었나요?”
“네, 그런데 쉽지가 않네요.”
풀이 죽은 얼굴로 대답하는 소화에게 인혜가 말했다.
“아까 미스터 정이 잠시 들렀다 갔는데, 내일은 종로통 인력소개소에 한 번 가보라 하더군요.”
“종로통에요?”
“일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스터 정이 그렇게 말했으니 속는 셈 치고 가 보아요.”
“네.”
대답한 소화는 방으로 들어왔다. 가정부를 구하는 집은 적지 않았지만, 일본어는 잘 하지 못했기에 왜인 집은 되도록 피하다 보니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은 가정부를 구하는 집이 보통이어서 반나절을 내내 발품 판 것이 무색하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어서 일자리를 구해야 인혜에게 민폐를 덜 끼칠 텐데 큰일이었다. 소화는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종로통의 인력소개소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머리가 희게 센 남자가 앉아 있다가 소화를 보았다.
“무슨 일이시오?”
“저, 가정부 자리를 구하고 있어요.”
“가정부?”
남자가 장부 같은 것을 몇 장 넘겨 보더니 돋보기 안경을 쓰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제 들어온 자리가 하나 있기는 한데, 글 읽을 줄 아나?”
“네, 한글도 읽을 수 있고 한문도 조금 읽을 수 있습니다.”
“잘 되었군. 청소를 하고 우편물 분류를 해 줄 하녀를 구하는 집이 있는데, 일이 크게 힘든 건 없을 거요. 잠시만 기다리시오.”
남자가 전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가 연결되었는지, 남자가 전화에 대고 말했다.
“종로 인력소개소입니다. 어제 부탁한……예, 예. 그 자리 맞습니다. 지금 딱 맞는 처녀가 하나 왔는데요. 예, 그러지요.”
남자가 전화를 끊고는 소화를 보며 말했다.
“주인집에서 이쪽으로 온다니까 한번 만나보시오. 거기 앉아 기다려요.”
“네, 감사합니다.”
소화는 구석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딱딱하고 오래된 의자는 몹시 불편했지만, 새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에 그런 불편함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십 분쯤 지났을까, 소개소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남자가 막 들어선 사람을 보더니 소화를 가리켰다.
“이 아가씨입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소화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박소화라 합니다. 올해 열여섯이고 한글과 한문 모두 읽을 줄 압니다. 집안일은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셔요.”
“그거 잘 됐군요.”
낯익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화는 잠시 멈칫하다가 눈을 들어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해경이었다. 눈을 크게 뜨는 소화의 얼굴에 해경이 입을 열었다.
“사무실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고 우편물을 분류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때마침 꼭 맞는 분이 있다고 해서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소화에게 해경이 몸을 약간 숙여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내일부터 나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그럼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대답한 소화는 제풀에 놀라 입을 막았다.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해경이 그것을 눈치챘는지 씩 웃었다. 아까 미스터 정이 잠시 들렀다 갔는데, 내일은 종로통 인력소개소에 한 번 가보라 하더군요. 어제 인혜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쩐지 부끄러워져 고개를 푹 숙이자 까만 고무신의 코 끝이 눈에 들어왔다. 공연히 고무신의 코 끝을 달싹이던 소화는 고개를 숙인 채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