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122
00103 위험한 초대 =========================================================================
소화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며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해경과 함께 일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이상하고 위험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해경이 직접 다친 것이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었으나, 모든 일이 몰아치는 눈보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리 보려고 애를 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계영은 도대체 어떤 자고 와타나베의 정체는 무엇인지, 권중만의 속셈이 무엇인지, 누가 허진남을 죽였는지 등등 무엇 하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없는 탓이었다.
이 호텔 안의 많은 사람 중 누구도 와타나베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 역시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제 발로 들어왔다면 귀신이 아닌 이상 틀림없이 누군가 그를 보았을 터였다. 호텔의 복도로 지나다니는 종업원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살인 미수 하나와 살인 하나. 고작 이삼일 사이에 한 장소에서 벌어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일이었다. 다음번 목표는 누가 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들이 그처럼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접수대 앞에는 벌써 몇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와글대고 있었다. 소화는 그들의 뒤로 다가갔다.
“통신이 연결됐다면서요? 도로는 언제부터 뚫린다 합니까? 지금 평양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소?”
“평양서에서는 무엇을 하는 게요, 어서 경찰들을 보내지 않고! 살인자가 여기 있는데 어찌 이 호텔에 하루라도 더 있으라는 거요? 당신들 미쳤소?”
“전화라도 쓰게 해 주시오. 경성에 연락을 해야 해요.”
저마다 앞다투어 자기 말만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소화는 초조하게 그들 뒤에서 발돋움을 하며 접수대 쪽을 기웃거렸다. 제복을 입고 앉은 두 명의 여직원이 쩔쩔매며 기다려 주십시오, 하는 말만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었다. 도저히 이 소란이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소화는 얼른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파고들자 얼결에 떠밀린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 계집애는 뭐야?”
중년의 남자가 투덜거리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느 집안의 영애일지 모르니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소화는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여직원들에게 물었다.
“혹시 와타나베 이사오라는 분이 기억나셔요?”
여직원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더니 소화의 눈치를 살폈다. 소화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누구도 와타나베의 얼굴을 몰랐고, 사카모토는 올 때도 그와 따로였으며 음악회장에서도 그를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사카모토 역시 와타나베를 잘 모른다고 했으니 음악회장에서 본 일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와타나베로 의심되는 이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일본군 군인은 사카모토와 와타나베 단 두 사람이었으므로 제복을 입고 있었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터였다.
“이백칠호에 묵으시는 분이에요. 일본군 장교이고 아마 혼자서 오셨을 거예요. 다른 손님들이 오시기 전이나 모두 오신 후에 오셨을지도 몰라요. 전혀 기억이 안 나시나요?”
일본군 장교라는 말에 오른쪽의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굴렸다.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는 표정이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여직원이 대답했다.
“삼백일호라면, 행사 전날 도착하신 일본군 장교님 같습니다. 중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한 분이었어요.”
“나이가 어느 정도였나요?”
“모자를 쓰고 계셔서 얼굴은 잘 보지 못했습니다, 아가씨.”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었나요? 말투라든가 목소리라든가요.”
소화가 다급하게 묻자 여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특이한 점은 없었답니다. 초청장을 확인하고 열쇠를 드렸어요.”
여직원은 책상 위에 놓인 장부 같은 것을 뒤적이다 아, 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묵는 동안 청소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물건을 만지는 것을 몹시 싫어하신다고요.”
“그러면 방으로 들어가신 이후로는 보신 적이 없나요?”
“네. 저는 접객 담당이 아니라서…….”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소화의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나 여직원의 눈앞에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여직원이 깜짝 놀라 움찔하며 고개를 들어 소화의 등 너머를 보았다. 동시에 소화 역시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중만이었다. 중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소 흥분한 듯한 말투로 여직원에게 물었다.
“이 사진 속의 남자였소?”
“네?”
“사진을 잘 봐요, 이 남자냐고 묻지 않소!”
얼떨떨한 얼굴로 되묻는 여직원에게 윽박지르다시피 하자 여직원은 곧 사색이 되어 중만이 내민 것을 보았다. 소화는 저도 모르게 접객대를 붙들고 앞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중만의 손에 들린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짧은 머리의 남자들이 여러 명 함께 찍혀 있었다. 여직원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누,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제일 오른쪽에 선 자요. 이 자가 맞소?”
여직원이 떨리는 손으로 중만의 손에 들린 사진을 가져가 뚫어지게 보았다. 그리고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그, 그런 것도 같습니다. 얼굴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틀림없군. 이런 제기랄!”
중만은 여직원의 손에서 사진을 낚아채며 분통을 터트렸다. 영문을 모르는 소화는 그를 빤히 마주보았다. 중만이 허리에 한 손을 짚고는 다른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리고는 인상을 쓴 채 여직원에게 말했다.
“전화 한 통만 쓰겠소.”
“아니, 이보시게. 우리도 지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 하는 게야?”
뒤에서 누군가 불평 섞인 말투로 짜증을 내자 중만은 그를 돌아보며 내뱉었다.
“살인 사건의 범인이 지금도 여기 있을지 모르는데 그까짓 전화 한 통 기다릴 시간이 대수입니까?”
중만은 여직원의 대답도 듣기 전 접수대 뒤로 돌아가서는 수화기를 들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건 중만은 초조한지 입술을 뜯으며 전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리더니 곧 어어, 하고 입을 열었다.
“나 권중만이오. 그래. 부엉이가 죽었소. 아니,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계획을 들었나? 중간에서 전달하며 무어 들은 것이 있다면 다 말해 주어요. ……이보게, 나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야. 여기 있는 사람들 목숨이 다 경각이라고! 그래, 그래.”
누구에게 거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소화는 부엉이가 허진남을 지칭하는 말임을 곧 알아차렸다. 허진남과 권중만을 동시에 아는 자,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계획’에 대해 아는 자라면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조선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인 것은 분명했다. 중만은 한참 동안 전화 너머에 귀를 기울이더니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탄식 같은 한숨을 뱉었다.
“……과연 그자다워. 부엉이가 덫에 걸렸군. 알겠소. 어서 몸을 숨기도록 해요. 그쪽도 위험할 테니. 길게 통화할 수 없소. 인천에 돌아가면 연락하지.”
전화를 끊은 중만은 곧 침착해져 여직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합니다. 약간 흥분했소.”
여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중만의 눈을 피했다. 소화는 중만에게 물었다.
“사장님께서는 아까 와타나베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 사진 속의 남자가 와타나베라면 왜 거짓말을 하셨지요?”
그 질문을 듣고서야 소화가 거기 서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는지, 중만이 멈칫하며 눈썹을 약간 좁히더니 곧 웃는 표정을 했다.
“퍼뜩 생각난 것이 있어 확인하러 왔는데 아가씨께서도 때마침 탐문을 하고 계시기에 조금 실례를 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여직원을 윽박지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중한 태도였다. 소화는 대답 대신 중만을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중만은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이쪽에 쏠려 있는 것을 보고는 소화의 팔을 잡아끌어 한쪽으로 비키게 했다.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리다 다시 접수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자신의 팔을 움켜쥔 중만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알아차린 소화는 그 손을 밀어냈다. 당황스러운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까닭 없는 불쾌감이 더 컸다. 중만이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양쪽 손을 들어 보였다.
“아아, 죄송합니다. 약혼자도 있는 아가씨께 함부로 굴었군요. 일단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하지요.”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아니하셨는걸요.”
소화가 빤히 쳐다보며 대꾸하자 중만이 코끝으로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사진을 내밀었다.
“호기심이 대단히 많으시군요. 계속 의심하시는 것 같으니 일단 말씀을 드리지요. 이 자는 와타나베가 아니라 오계영입니다.”
“네?”
생각도 하지 못한 말에 순간 머릿속을 떠돌던 생각들이 하얗게 지워졌다.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을 했는지 중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복도 쪽을 가리켰다.
“우선 내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무심코 중만의 뒤를 따라 한 걸음 옮기던 소화는 멈춰 섰다. 자기 혼자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화는 걸음을 멈춘 채 두어 걸음 앞서 가는 중만의 등에 대고 말했다.
“다른 분들이 계신 곳에서 듣고 싶군요.”
중만이 뒤를 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제가 돌아가면 제 약혼자와 이환 씨에게 말씀을 드릴 텐데, 굳이 저를 거쳐 이야기를 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소화는 중만이 무어라고 말을 덧붙이기 전 서둘러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중만이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마지못해 소화의 뒤를 따라왔다. 소화는 등 뒤를 좇는 중만의 기척에 문득 한기를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감각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소화는 애써 그를 경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해경과 눈이 마주쳤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해경이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소득이라도 좀…….”
그러나 해경은 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중간에 멈췄다. 뒤따라온 중만을 본 탓이었다. 중만은 소화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는 방금 소화에게 보여 주었던 사진을 품에서 꺼내 해경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해경이 사진을 보다 중만에게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해경이 묻자 중만이 사진 오른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자가 와타나베입니다.”
“와타나베라고요?”
소화는 해경 역시 자신처럼 당황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때까지 열려 있던 문을 서둘러 닫은 소화는 앉아 있던 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중만은 뚫어져라 사진을 보는 해경에게 마했다.
“그리고 오계영이지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는 뜻입니까?”
해경이 침착함을 되찾아 물었다. 중만은 검지를 들어 보이고는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팔짱을 끼며 한쪽 다리를 꼬아 올린 중만이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해경이 소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화는 얼른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제가 접수대에 있는 분에게 와타나베를 혹여 보신 적이 없냐고 물었어요. 일본군 장교라고 하니 기억을 하시더군요. 그 전날 도착했는데 중키에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람이었고 모자를 써서 얼굴은 잘 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자기 물건에 손대는 것을 몹시 싫어하니 본인이 있는 동안은 청소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대요. 초청장을 확인하고 열쇠를 내어 주었는데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권 사장님께서 이 사진을 가져와 혹시 이 사람이 아니었냐 하시니 그 직원분이 확실치는 않지만 맞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권 사장님이 전화를 쓰셨고요.”
말이 저절로 빨라졌다. 숨도 쉬지 않고 자신이 알아낸 것을 이야기한 소화는 곧 입을 다물었다. 창가 쪽에 있던 환이 이쪽으로 걸어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해경은 선 채로 소화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다시 중만에게 물었다.
“전화는 어디로 하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이 사진의 인물이 와타나베고 오계영이라고 하시고서는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 아니라고요?”
다소 높아진 해경의 목소리에 중만이 진정하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중만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병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몹시 침착하신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성격이 급하시군요. 천천히 설명을 하지요. 말씀드렸던 대로 허 변호사는 내부의 이중 첩자를 통해 조선공산당 평양지부 안의 정보를 유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의심을 받지 않도록 허 변호사 역시 우리 쪽의 정보를 어느 정도 제공했지요. 그 과정에서 명단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도 이미 아시는 부분일 테고요. 그런데 명단을 입수한 평양지부 측에서 여기에 잠입하기 위해 초청장을 위조한 겁니다. 와타나베에게 갔어야 할 초청장은 와타나베의 부대에 도착하기 전 빼돌려진 게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와타나베라고 믿었던 인물이 실은 오계영이고 진짜 와타나베는 자신이 여기에 초청을 받은 것조차 모른다는 말씀이십니까?”
“정확합니다.”
이야기를 듣던 해경이 묻자 중만이 즉각 대답했다. 해경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방 안을 두어 걸음 서성거리다 멈춰 섰다.
“와타나베인 척을 한 오계영이 행사 전날 이곳에 왔고, 거사를 치르기 위해 기다렸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음악회장에서의 저격 소동은 이상하군요. 누군가가 아주 좋은 때에 조명을 껐습니다. 총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고요. 조명을 끄는 스위치는 들어오는 입구 쪽에 있었지만 총소리는 그쪽에서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불이 켜졌고 닫혀 있던 창이 열린 뒤 창 너머에서 범인이 총을 쏘았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을 그 혼자서 해냈다?”
마지막 물음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중만이 두 손을 마주 비볐다.
“누군가를 이용한 거지요.”
“공범이 있다는 말입니까?”
“오계영은 아주 악독한 자입니다. 조직을 배신한 자가 목숨을 부지한 일은 거의 없지요.”
중만은 마치 모든 답을 알면서 스무고개를 하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해경은 중만을 빤히 보다 말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일을 벌인 공범은 허진남 씨겠군요. 오계영에게 이중 첩자로 의심을 받아 죽지 않으려면 협조하는 수밖에는 없었을 테지요. 허진남 씨가 약속된 때에 맞추어 불을 끄고 장내를 소란하게 만들어 오계영이 거기서 빠져나갈 시간을 번 뒤 다시 불을 켠다, 그리고 창을 열어 밖으로 빠져나간 오계영은 유유히 이쪽을 저격하고 사라진다…… 그럴듯하군요.”
소화는 해경의 말투가 확신에 찬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해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소화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해경은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두꺼운 커튼이 쳐진 창가를 바라보고 선 해경은 혼잣말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허진남 씨가 한때 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면 오계영은 그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오계영은 그를 이용해 어쩌면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렸을 수도 있겠군요. 조직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지요. 문제는 첩자가 누구냐일 뿐이니까요. 오계영은 권 사장님이 조직을 밀고한 것을 아는 상태에서 이 친목회의 초청 명단을 매우 쉽게 손에 넣었습니다. 쥐를 잡을 덫이라는 것을 그때 눈치 챘을지도 모르지요.”
해경은 덫이라는 말에 약간 힘을 주었다. 중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경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해경은 다시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배신자를 색출하고 밀고자를 암살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고 하면 모든 것이 말이 됩니다. 조직에서는 보통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니 허진남 씨의 지병과 먹는 약도 알고 있었을 테고, 그걸 이용해 그를 죽이려 한 거지요. 그러다 생각보다 약의 효과가 나타나는 시간이 늦어졌다거나 해서 몸싸움이 벌어졌을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런 경위로 허진남 씨가 죽게 되자 오계영은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죽은 자의 등에 총을 쏘았습니다. 베개가 없어진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소리를 줄이고 피가 튀는 것을 막기 위해 베개를 대고 총을 쏜 뒤 그것을 가지고 창문으로 도망친 겁니다. 허진남 씨의 방은 1층이고 바깥은 아직 폭설 때문에 교통이 막혀 오가는 이가 없으니 도주하기에는 최적이니까요.”
“과연 경성 제일가는 탐정 소리가 헛소리는 아니군요.”
중만이 감탄하는 투로 말했으나 해경은 그 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중만을 마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실을 아셨습니까? 오계영의 사진은 어떻게 가지고 계셨고요?”
“사진은 허 변호사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형사들에게 오계영의 얼굴을 보여 주기 위해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방으로 돌아갔는데 문득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이 나지 뭡니까.”
“예전에 들은 이야기?”
해경이 되묻자 중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계영은 일본어가 매우 능숙한데, 연해주에 있을 때도 일본군으로 위장 잠입해 소대 하나를 전멸시킨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와타나베를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라 혹시나 하고 종업원에게 사진을 보인 것입니다. 때마침 소화 양께서 탐문을 하고 계시기에 잠시 실례를 했지요.”
“전화를 하셨다는데 누구에게 하신 것입니까?”
“허 변호사에게 정보를 주었던 이중 첩자입니다. 혹시 그의 안위까지 위태로워질지 모르기에 일단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그 자에게 허 변호사가 죽었다고 전하니 몹시 놀라더군요. 오계영이 몹시 집요한 자이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아서 다른 계획을 들은 것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의 말로 오계영은 실패할 것을 미리 계획에 넣었다고 했습니다. 폭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만, 아무튼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면 사람들이 겁에 질려 앞다투어 돌아가려 할 테니 규모가 커지더라도 그때 다시 한 번 노릴 거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결국 오계영은 이 주위에서 떠나지 않고 있겠군요.”
“떠날 수도 없지요.”
중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소화가 얼른 문으로 달려가 누구세요, 하고 묻자 바깥에서 균철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평양서의 백균철입니다.”
소화는 문을 열었다. 열린 문으로 차가운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는지 균철의 뺨은 빨갛게 언 채였다. 균철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방 안의 사람들에게 보였다. 균철의 손에 들린 것은 가운데 구멍이 뚫린 흰 베개였다. 호텔의 침대에 놓인 것과 같은 종류였다. 뚫린 구멍 사이로 솜이 삐져나온 채였다. 균철은 그 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앞면은 군데군데 검댕 같은 것이 묻기는 했어도 깨끗했으나 균철이 뒤집어 보여 준 쪽은 그렇지 않았다. 뚫린 구멍의 주변으로 검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피였다. 균철이 입을 열었다.
“베개를 발견했습니다. 건물 뒤편 음식 찌꺼기를 태우는 소각장 안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급하게 버리고 간 모양입니다.”
해경은 그 베개를 받아들어 유심히 보다 내려놓고는 중만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씀대로라면 오계영은 끝까지 사장님을 노릴 텐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화는 그 말을 들은 중만이 입꼬리를 슥 말아 올리는 것을 보았다. 소화가 퍼뜩 그가 웃는 것일까 생각하기 무섭게, 그 표정은 마치 착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중만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정월에는 논두렁에 불을 놓지요.”
“쥐불놀이 말입니까?”
“쥐를 잡기 위해 논두렁 전체에 불을 지르는 겁니다. 덫에 걸리지 않는 놈이라면 그렇게 불을 지르는 수밖에는 없지요. 머리가 좋고 집요한 놈이니 절대 실패하지 않으려 할 테고, 판을 키워 끌어들인다면 놈은 분명히 옵니다.”
해경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중만이 균철을 보았다.
“통신이 뚫렸으니 평양서에 지원을 더 요청할 수 있겠나? 눈길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교통이 가능하지 않소?”
“연락은 넣어 보겠습니다.”
“가능한 많은 인원을 요청하되 인원이 움직이는 것은 티가 나지 않게 하고, 대신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목회 행사는 예정대로 마칠 거라고 소문을 내시오. 최대한 빨리. 그리고 내일 저녁에 음악회장에 남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읍시다. 놈은 분명히 나타나요. 호텔 안팎으로 인원을 배치하고 놈을 기다리지요.”
“쥐를 잡는 데 목숨을 거시겠다는 겁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환이 처음으로 말을 내뱉었다.
“본인의 목숨을 거는 건 자유겠지만, 권 사장님을 노린 총에 내 친구가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거야말로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입니다.”
“그리 소중한 친구를 쏜 자를 덮고 넘어가셔야 하겠다면 공의 의견 역시 존중합니다.”
중만의 말은 묘하게 조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환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 듯 눈썹을 잠깐 좁혔다. 중만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혼자서도 일개 소대를 섬멸한 자입니다. 덫을 치지 않고서는 잡을 방도가 없고, 이보다 더 좋은 덫도 없지요. 어차피 그가 노리는 건 저입니다. 제가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있다면 오계영이 다른 사람을 노릴 필요가 없지요.”
환이 무어라고 말하려는데 해경이 손을 들어 환의 말을 막았다.
“좋습니다. 말씀대로 하지요. 대신 이 작전이 끝나면 모든 손님들이 즉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합니다.”
“정 군!”
환이 목소리를 높여 해경을 불렀으나 해경은 대답 대신 중만과 균철에게 말했다.
“저도 무언가 더 좋은 방법을 궁리해 보지요. 두 분은 가셔서 논두렁에 불을 놓을 준비를 해 주십시오.”
중만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를 하고는 균철과 함께 방을 나갔다. 환은 문이 닫히기 무섭게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며 해경을 마주보았다.
“무슨 생각인 거요? 오계영이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오래 깨어 있었더니 조금 피곤하군요. 잠시 누워 있겠습니다.”
해경은 침대로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워 눈을 감았다. 환이 허, 하고 기막혀하더니 고개를 젓고는 소파에 다시 걸터앉았다. 소화는 가까이 있던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침대에 누운 해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동안 조금 뒤척이던 해경은 곧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소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이 오르내리는 규칙적인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소화는 해경이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소화는 문득 아까 중만이 팔을 움켜쥐던 감촉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팔을 만지며 어깨를 웅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