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21
00020 이중살인 =========================================================================
용산서 앞에 막 도착하자 서 앞에서 초조하게 해경을 기다리고 있던 이주가 달려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눈 밑에 푸르스름하게 그늘이 드리워진 채였다.
“목격자는 도착했습니까?”
해경의 물음에 이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경이 이주와 함께 서로 들어가자 해경을 알아본 택문이 자리를 권했다. 해경은 주변을 살폈다. 이주 외의 다른 가족은 함께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혼자 온 겁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입원해 계시고, 어머니와 함께 왔는데 어머니는 도저히 못 보시겠다고 하셔서……잠시 근처에 계시겠답니다.”
그 말에 해경은 이주가 자신을 급하게 부른 까닭을 눈치챘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초조하게 손끝을 뜯고 있던 이주는 택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개를 돌렸다. 해경도 문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경찰서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커먼 장옷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차림을 보고 해경은 그가 순영임을 곧 알아차렸다. 부녀자들이 장옷을 입지 않게 된 지도 이미 십 수 년은 된 데다 눈을 끌 수밖에 없는 차림이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택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는 순영을 인도해 심문실로 향했다. 해경은 이주와 함께 택문의 뒤를 따랐다. 순영이 심문실 안의 의자에 앉았다. 이주는 순영을 처음 본 탓인지 그 묘한 행색에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 순사들의 손에 이끌려 심문실로 들어온 영석이 순영의 맞은편에 앉혀졌다. 택문이 영석과 순영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계신 목격자께서는 이십이일 밤에 인도교에서 남녀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지요. 김명희 씨는 사망하였으니 당시의 여자인지 알 수 없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구분할 수 있다고 했기에 오시라 하였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네.”
녹슨 금속판을 긁는 듯한 순영의 목소리가 장옷 사이로 새어나왔다. 이주가 움찔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 없는 행색인 데다 그 목소리가 기묘한 탓에 심히 놀란 모양이었다. 해경은 팔짱을 낀 채 순영의 등을 보았다. 영석은 창백한 얼굴로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택문이 말했다.
“용의자는 이름과 나이, 직업, 주소를 대시오.”
“……이름은 서영석이고 나이는 이십사세입니다. 직업은 경성제이고보의 수학 교사이며, 주소는 경성부 청운동 구십이번지입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알겠습니까?”
택문이 물은 말에 순영은 잠시 침묵했다. 몇 초도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 시간이었지만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피가 마를 터였다. 해경은 이주를 슬쩍 보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쥔 이주가 바짝 마르는 입술을 물었다. 순영이 대답했다.
“네.”
영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택문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남자의 목소리가 이십이일 밤에 인도교에서 들은 그 남자의 목소리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말도 아니 됩니다! 그 시간에 나는 거기 있지도 않았소!”
순영의 조용한 대답에 곧 쓰러질 것 같던 영석이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순사들이 바로 달려들어 강제로 영석을 앉혔다. 해경은 눈썹 사이를 약간 좁혔다. 순영의 진술에는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이 사건의 증거들과 순영의 증언이 짜맞춰졌다.
“어두운 밤이라 얼굴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진술서에는 몸을 숨겼다 했지만 그 남녀가 목격자를 보지 못한 모양이니 거리도 좀 있었을 텐데 정말 확신할 수 있습니까?”
택문이 반은 안심하고 반은 아직 의구심이 어린 듯한 말투로 물으며 순영을 보았다. 순영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이 먼 자가 듣는 소리는 성한 사람들의 것과는 비견할 수 없습니다.”
“직업이 무엇입니까?”
“구워진 옹기를 두드려 불량한 것을 찾아내는 일을 합니다. 성한 자들은 속이 빈 옹기를 잘 가리지 못하지요.”
부들부들 떨던 영석이 자신을 붙잡고 있는 순사들의 손을 뿌리치려 기를 쓰며 외쳤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목소리가 매우 비슷한 자일 것이 분명해요! 나는 정말 그 시간에 인도교에 있지도 않았으며 명희를 살해하지도 않았습니다!”
발버둥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영석을 흘끗 본 택문이 고갯짓으로 순사들에게 데리고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석이 아니라고 비명처럼 외치며 심문실에서 끌려 나가자, 택문이 뒤에 서 있던 해경과 이주를 보았다.
“목격자의 증언도 그러하고, 서영석이 부정(不貞)을 저지른 것이 사실이라면 다툼 끝에 강에서 떠밀어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겠군요.”
해경은 그 순간, 머릿속에서 짜맞춰진 이야기의 한 조각이 자기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유서다. 최초에 이 사건은 유서 때문에 자살로 보도되었던 사건이었다. 살해당한 자가 유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유서가 있지 않습니까.”
해경의 말에 택문이 멈칫했다. 해경은 벽에 기대선 채 내뱉었다.
“누가 봐도 김명희 씨의 글씨임이 명백한 유서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살해당할 것을 알고 유서를 준비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이 분의 말이 사실일 수 있습니다. 실제 서영석 씨가 부정을 저질렀고, 그래서 인도교 위에서 크게 다투었을 수 있지요. 여자의 비명이 나올 정도로 폭력을 휘둘렀거나 심지어 살해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것이 서영석 씨가 살인범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 내가 너를 살해할 테니 자결한 것처럼 보이도록 유서를 쓰라고 강요했을까요? 말도 안 되지요. 그보다는 다툼 끝에 홧김에 투신하여 자결했다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이지 않습니까? 즉 그 말은 목격자가 무언가를 착각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해경은 마지막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혹은, 목격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악의는 때로 선의보다도 훨씬 선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악의라면 그 동기를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증언은 영석을 파멸로 몰아가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나, 장님 여인과 경성제이고보의 젊은 교사 사이에는 어떤 연결점도 찾을 수 없는 까닭이었다. 택문이 해경의 말에 멈칫하더니 순영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당신이 들은 목소리가 서영석의 목소리가 확실합니까?”
“네.”
“장담할 수 있겠소?”
“목소리가 몹시 비슷한 남자일 수도 있으나 저로서는 알 길이 없지요.”
순영의 대답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택문도 그토록 확실한 순영의 증언에 더 이상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애초에 남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했고, 영석의 목소리가 확실하다고 증언했지만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는 이상 목소리가 아무리 비슷하다 해도 그것이 정말 영석인지 아닌지도 확신하기는 어려운 탓이었다. 잠시 사이를 두고 택문이 짧은 한숨을 쉬었다.
“돌아가도 좋겠습니다.”
순영이 세워 둔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팡이로 앞을 더듬어 문을 찾은 그녀가 심문실을 나섰다. 열린 문으로 복도를 울리는 지팡이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때까지 하얗게 질린 채 자리에 서 있던 이주가 문 밖으로 달려 나가서는 앞서 걸어가는 순영의 장옷 자락을 잡아챘다.
“당신이 그날 정말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은 겁니까?”
거의 비명처럼 터진 이주의 목소리와 함께 순영이 뒤집어쓰고 있던 장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주가 헉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쪽을 쳐다본 경찰서 안의 사람들이 모두 숨을 들이키며 얼음처럼 굳어졌다. 뒤따라 나온 해경과 택문 역시 잠시 말을 잃었다. 장옷 아래서 드러난 것은 마치 괴물 같은 얼굴이었다. 반쪽 얼굴은 온통 붉은 살이 올라온 채였다. 이목구비가 있던 자리조차 부정확할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해경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운 그 얼굴에서 유일하게 오른쪽 눈만이 정상인의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크고 검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찰서 안에는 숨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음 순간 해경은 몸을 숙여 바로 바닥에 떨어진 장옷을 주워들고는 순영의 머리 위를 덮었다.
“죄송합니다. 숙녀분께 큰 실례를 범했군요.”
나지막한 해경의 목소리에 순영은 잠시 멈춰 있다가 장옷 자락을 갈무리하며 다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침묵에 빠진 경찰서 안에서 바닥을 울리는 지팡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닫히자, 해경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주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주의 손바닥은 차가운 땀으로 온통 젖은 채였다.
“……저런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주가 간신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해경은 순영이 나간 자리를 뚫어지게 보았다. 속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무언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해경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이주를 내려다보았다.
“이순영이라는 이름을 들은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요?”
“전혀 없습니다.”
이주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확실히, 저런 인물이라면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누구라도 기억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영석이 순영과 어떤 관련이 있었다면 보자마자 알아보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해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김명희 씨와 관련된 물건들 중 집에 남은 것이 있습니까?”
“할아버지께서 누나의 방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셔서 물건은 모두 그대로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네, 그야……하지만 대부분이 책이라 특별한 것은 없을 겁니다.”
이주가 이제 조금 진정이 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사건의 실마리가 누구도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여기저기 얽힌 채였다. 그러나 누군가 실을 묶었다면 반드시 실이 시작된 자리가 있을 것이었다. 해경은 머릿속으로 순영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유독 선명하던 그 검은 눈동자가 뇌리를 찌르듯 되살아났다.
소화는 문 앞에 ‘新木 盲人 女子 夜學 修了式(신목 맹인 여자 야학 수료식)’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나붙은 강당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료식은 거의 막판인 모양이었다. 양장을 한 초로의 남자가 교단에 서서 자랑스러운 신목 여자 야학의 학생들이 어쩌고 하며 연설을 하고 있었다. 신문 기자들인지, 사진기와 수첩을 든 사람들이 잔뜩 몰린 사이를 파고들어 앞으로 향한 소화는 목을 빼 보았다. 교단 앞쪽에 나란히 놓인 의자에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 이 야학의 학생들인 모양이었다.
소화는 학생들의 가족인 척 뒤에 서서 가만히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분명 기사에는 학생이 열 명이라고 했는데, 의자에 앉은 여인들은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뒷줄에 앉은 여인들은 단발에 양장 차림을 한 것으로 보아 야학의 교사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학생과 같은 복장을 한 여인들은 찾을 수 없었다. 소화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출석부의 이름들을 뇌어 보았다. 김말선, 김숙자, 김화숙, 박순주, 박영순, 이경자, 이숙미, 장순자, 천말년, 허양숙. 열 사람 중 이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은 누구일까. 남자의 연설이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치고는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학생들의 뒷줄에 앉아 있던 교사로 보이는 여인이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얼른 그녀를 붙들었다.
“저어, 말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여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소화를 내려다보았다. 소화가 물었다.
“오늘 수료식에 오지 않은 학생들이 있나요?”
“그런 것을 왜 묻지요?”
여자가 경계하는 빛으로 되물었다.
“연희정의 김명희 선생님 댁에서 왔습니다. 이곳이 김명희 선생님이 일하시던 곳이 맞지요? 선생님께서 수료식을 몹시 보고 싶어 하셨는데 보지 못하게 되셔서…….”
소화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거짓말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혹여 거짓말이 들통나면 어쩔까 싶어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그러나 여자는 명희의 이름을 듣자 곧 얼굴색이 변해 소화에게 말했다.
“가족분들도 매우 심려가 깊으시겠습니다. 명희처럼 훌륭한 교사를 잃게 되어 저희도 몹시 애석하다고 꼭 전해 주세요. 내년에도 같이 일하기로 이야기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생겼는지……경자가 뜻밖의 사고로 죽었을 때 몹시 애통해하더니 정작 명희가 그리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여자의 말에 소화는 귀를 쫑긋 세웠다. 경자, 이경자. 출석부에 있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경자는 올해 열세 살 된 아이인데 석 달쯤 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습니다. 끝까지 수료하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되어……한동안 명희가 매우 울적해했답니다. 명희는 학생들에게 아주 애착이 많았어요. 그래서 명희가 죽고 난 뒤에 오지 않게 된 학생도 있고요. 오늘은 올 줄 알았는데 오지 않았네요.”
“그러면 한 자리는 이경자 씨의 자리이고, 다른 한 자리는…….”
“천말년 씨의 자리입니다.”
“아아, 그렇군요.”
소화는 머릿속으로 이경자와 천말년이라는 이름을 되새겼다. 여자가 학생들이 떠나 빈 자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말년 씨는 몹시 독특한 학생이라 명희가 가르치며 고생깨나 했는데, 충격이 컸는지 명희가 그리 된 것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야학에 나오지 않더군요.”
“그랬나요?”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녔고 오래 가르쳤는데도 글을 배우지 못했어요. 명희 말로는 말은 또박또박 잘 한다 하던데 저희는 목소리를 들은 적도 거의 없답니다. 나이도 잘 알 수 없고……아마 마흔쯤 되었을까요. 야학에서도 늘 외톨이라 명희가 많이 챙겨 주었지요.”
소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저, 혹시 김명희 선생님의 물건이 남아 있다면 댁으로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가 소화를 데리고 강당 바깥으로 나와 옆 건물로 들어섰다. 본래 창고로 썼던 듯한 작은 교실 문을 연 여자가 문 앞의 자리를 가리켰다.
“짐이 많지는 않지만 명희가 생전에 수업했던 자료 같은 것들이 남아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소화는 책상 위를 보았다. 학생들의 과제물 같은 것인지 종이 묶음이 몇 개씩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화는 그 종이 뭉치를 넘겨보았지만 제법 두꺼운 것인데도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게 무엇인가 싶어 종이 뭉치를 이리저리 살피는 소화를 본 여자가 웃었다.
“훈맹정음(訓盲正音)으로 되어 있어 보통 사람은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훈맹정음이요?”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글자입니다. 만져 보시면 튀어나오고 들어간 것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볼 수 없는 이들은 이것으로 글을 읽습니다.”
“아……그러면 저희는 가져가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겠군요?”
“그렇지요. 보통 이것을 점자라 하는데, 점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빈 종이일 뿐이니까요.”
이런 것을 가져가도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해경이라면 점자도 읽을 수 있을지 몰랐다. 소화가 일단 그 종이뭉치를 챙기려 한쪽으로 밀어 놓았을 때, 누군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고는 반색을 했다.
“화숙 씨, 어찌 이리 오셨어요? 곁에는 따님이신지?”
화숙 씨라고 불린 여인은 흰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입었고,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아까 앞줄에 앉아 있던 학생 중 한 사람인 듯했다. 마흔 대여섯쯤 된 듯한 모습이었다. 곁에서는 젊은 여인이 화숙을 부축하고 있었다. 화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 하니 아까 교무실로 가시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 않겠어요.”
“어머나, 그러셨군요. 김명희 선생님 댁에서 손님이 오셔서요.”
“김 선생님 댁에서요?”
화숙이 윤곽이 흐릿한 잿빛 눈을 크게 뜨고는 주위를 살피듯 눈동자를 움직였다. 최 선생이 소화를 보며 대답했다.
“네, 수료식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셨는지 모른다고요.”
“저런……젊은 사람이 참으로 안되었습니다.”
화숙이 허공에 대고 합장을 하듯 손을 모아 보였다. 소화도 얼결에 네에, 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숙이 혀를 차며 최 선생에게 말했다.
“말년이 그 년은 오늘도 오지 않았지요?”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하루도 빠지지 않던 분이 그러셔서 나쁜 생각이 드네요.”
“내가 그러지 않았어요, 마지막 수업 있던 날에 그 년이 김 선생님과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마지막으로 한 짓이 그리 열심히 가르친 선생님에게 언성 높이는 짓이었으니 나 같아도 마음에 걸려서라도 안 와요.”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화는 용기를 내어 화숙에게 물었다. 소화의 목소리에 퍼뜩 놀란 화숙이 소화 쪽을 보고는 곧 대답했다.
“그게, 그, 김명희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수업을 한 날이……그리 되신 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년이라는 년이 본시 좀 이상한 년이었는데, 그날 마지막까지 교실에 있었어요. 내가 우리 딸이 그날따라 늦어서 교실 앞에서 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년이가 김 선생님에게 무슨 말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더니 김 선생님이 한참을 있다가 그러지 마시라 하는데 말년이가 선생님이 무엇을 아냐고 언성을 마구 높이지 않겠어요. 그 년이 원래 입을 잘 열지 않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어찌나 놀랐는지……무슨 지옥에서 끌려나온 악귀 같지 뭐예요. 중간에 딸이 도착해서 집에 갔는데, 그 다음 주에 오니 김명희 선생님이 그리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그 년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줄 알았어요.”
그건 뜻밖의 이야기였다. 소화는 재빨리 화숙에게 들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적어 넣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로 다투셨는지 아십니까?”
“나도 잘은 모르겠고, 무슨 편지가 어쩌고 하는 것만 얼핏 들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원…….”
안됐다는 얼굴로 혀를 찬 화숙은 퍼뜩 정신이 든 듯 손뼉을 쳤다.
“아이고, 내 주책 좀 봐. 뭐 좋은 얘기라고 동네방네 이 소리를 해. 하여튼, 이 말을 하려고 하던 것이 아니고요. 최 선생님, 우리 딸이 떡을 좀 해 왔답니다. 선생님들과 나누어 드시라고요. 가서 맛 좀 보셔요. 강당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최 선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곧 갈게요. 김 선생님 물건은 챙겨서 가져가시면 됩니다.”
소화에게 말한 최 선생은 화숙과 그 딸의 뒤를 따라 교실을 나갔다. 소화는 책상 위의 종이 뭉치를 안아들고 재빨리 자리를 떴다.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나서 전차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소화는 방금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다시 한 번 새겨 보았다.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어야 할 텐데, 하고 중얼거린 소화는 품 안의 종이 뭉치를 추슬러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