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d rate samurai with a carreer break RAW novel - Chapter 28
00026 특별한 의뢰인 =========================================================================
환은 다다미가 깔린 기숙사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 몸을 일으켰다.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교교했다. 환은 본래 제대 의학부와 멀지 않은 숭삼동(崇三洞: 명륜동 3가)에 사가(私家)를 마련해 지내고 있었는데, 가와타의 살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격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숙사에 들어오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신변 보호지, 사실은 창살 없는 감옥에 가둬 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문 앞에 일본인 경찰을 세워 둔 것도 모자라 어딜 가나 경찰을 대동하도록 한 탓에 분함을 참지 못한 환이 항의했으나 경찰은 건성으로도 듣지 않았다. 기숙사는 6인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학교에서 특별 배려라며 방을 하나 통으로 비우고 들어오게 하여 텅 빈 방 안에는 속풀이를 할 상대조차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환은 마른 얼굴을 문지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와타와의 다툼이 이런 사건으로 번지리라고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제대의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는 언제나 미묘한 긴장감이 존재해 왔다. 매년 정원 중 조선인 학생들은 채 50명도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조선인이 일본인에 비해 입학 성적의 상한선이 매우 높은 데다 학생들의 학구열도 엄청나 예과 문이과를 통틀어 수석부터 3등까지는 모두 조선인 학생들의 차지였다. 당연히 조선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과 일본인 학생들의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2년 동안 이과 수석을 한 번도 놓친 일 없이 의학부에 진학한 환은 조선인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존재였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일본 황실로부터 왕공족(王公族) 작위를 받아 환 역시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리 조선인이라 해도 장사치 집안 출신이 많은 일본인 학생들 역시 환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환은 본인의 출신을 썩 기꺼워하지는 않아, 같은 조선인 학생들이 자신을 어렵게 대하는 것을 싫어했다.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의 친일 성향 때문임을 아는 탓이었다. 환은 누가 자신에게 ‘공(公)’을 붙여 부르는 것을 절대 하지 못하게 했다.
다만 환은 이 시대에 자신의 신분을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환이 나서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없었다. 그날 가와타와의 다툼도 가와타가 조선인들을 욕한 데서부터 시작한 일이었다. 가와타는 기숙사를 관리하는 요장(寮長)이었는데, 이전부터 조선인을 멸시하는 것이 심하고 품행이 나빠 조선인 중에는 그를 싫어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건이 벌어진 건 그날 오후였다. 복도에서 초조하게 환을 기다리던 예과 후배 김대진이 의학부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던 환을 붙들었다.
「이환 형, 지금 기숙사로 같이 가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일이지?」
「기숙사에서 가와타가 최광문 형과 크게 싸우고 있습니다.」
「광문이와?」
환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광문은 철학과 1학년생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평양 공자(孔子)’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광문은 평양 한학자 집안 출신의 장손으로, 오랫동안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검정시험으로 고보 졸업자격을 따고 제대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때문에 한문 시간에 일본인 교수들이 틀린 점을 매번 집어낼 만큼 한학에 능했다. 예과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다치바나[立花] 교수 같은 경우는 아예 수업 시간에 광문에게 자기 대신 독해를 시키곤 했다. 한학을 오래 배워서인지, 광문은 성품이 매우 온화한 데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지 않았고 말 한 번을 크게 하는 일이 없었다. 별명이 평양 공자인 까닭도 누군가 농담으로 ‘광문이는 공자의 환생이 틀림없다’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교수들조차 그 별명을 알았고, 수업 시간에 광문을 이름 대신 평양 공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런 광문이 누군가와 싸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환은 서둘러 대진을 따라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식당에서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인 광문이 평소답지 않게 시뻘겋게 열이 오른 얼굴로 씩씩대고 있었다. 가와타가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환은 다른 학생들을 헤치고 들어갔다. 육척 장신의 환은 조선인 학생들은 물론이고 체구가 왜소한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욱 눈에 띄었다. 환은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학생들을 돌아보다 광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광문은 분을 참지 못하는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가와타를 가리켰다.
「식당의 그릇이 몇 개 없어졌는데, 가와타가 그걸 우리 조선인 짓이라고 했어.」
환은 가와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 기세가 등등하던 가와타가 환의 서늘한 표정에 한풀 꺾인 듯 입을 다물었다. 환은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가와타를 내려다보았다.
「가와타, 증거가 있나? 왜 조선인 짓이라고 했지?」
「조선인 짓이라고 한 적 없다.」
조금 머뭇거리다 대답하는 가와타를 보고 곁에 서 있던 대진이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요보노 시와자(ヨボの 仕業)’라고 말했잖아!」
‘요보노 시와자’라는 말은 ‘조선놈들의 짓’이라는 뜻이었다. ‘요보(ヨボ)’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흔히 쓰는 멸칭이었다. ‘여보’라는 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늙은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요보요보(よぼよぼ)’와 발음이 같은 것을 이용해 ‘늙다리 같은 조선 놈들’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간혹 일본인 학생들끼리 조선인 학생들에게 요보라고 수군거리는 것을 듣기라도 하는 날은 패싸움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환이 눈썹을 찌푸리자 가와타가 변명했다.
「너희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조선 양반들에게 요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이 아랫동네 사는 천한 조선인들에게 한 말이야. 지난번에도 부랑자가 들어와 식기를 훔쳐 간 적이 있다고.」
비열한 변명이었다. 환은 가와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다 내뱉었다.
「조선에서는 갑오년에 신분제가 철폐됐다는 걸 모르나? 네가 화족(華族) 출신은 아닌 걸로 아는데 조선에서 네 신분이 뭐라고 천한 조선인들 운운하지? 그렇다면 나는 일본 황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니, 학교에 너처럼 천한 자와 함께 수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냐?」
학교에서 환이 조선 황실가 출신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작위까지 받은 귀족이라, 이렇게 나오면 장사치 집안 출신이 대부분인 일본인 학생들은 환 앞에서 찍 소리도 하지 못했다. 환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 식당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 취사부 소속이 누구지?」
식당 운영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학생들이 직접 조직한 취사부에서 맡아 하고 있었다. 영문과의 미타니[三谷]가 주저하다 손을 들었다. 환은 품에서 지갑을 꺼내 지전 몇 장을 미타니에게 내밀었다.
「없어진 그릇이 몇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돈이면 새로 사기 부족하진 않을 거다. 만약 부족하다면 내 앞으로 청구하도록 해.」
미타니가 가와타의 눈치를 보았다. 가와타가 잠시 서 있다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미타니에게 턱짓으로 받아 넣으라는 표시를 했다. 미타니가 머뭇거리다 그 돈을 챙기자, 가와타가 턱을 들며 환에게 내뱉었다.
「너희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조선인들이 보통 게으르고 요행만 바란다는 건 사실 아닌가? 미개한 천민들에게 도덕관념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가와타의 말에 조선인 학생들의 안색이 변했다. 환은 앞으로 나서려는 광문을 제지하고는 팔짱을 끼며 가와타를 내려다보았다.
「게으르고 요행만 바라는 조선인들에게 개교 이래 수석 차석을 매번 뺏기는 일본인들은 도대체 어떤 민족인지 모르겠군.」
「이환!」
가와타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해 고함을 질렀으나, 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조선인 부랑자가 식당의 식기를 훔친 게 사실이라면 경비가 형편없다는 이야기겠지. 교문 앞에 서 있는 건 일본인 경비 아닌가? 돈을 받으면서 일하는 주제에 부랑자가 기숙사 안까지 들어와 그릇을 가져갈 때까지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는 건데, 누가 누구더러 게으르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나뿐인가?」
평소에는 냉철한 편이었으나 한 번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환의 성격은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환이 웃으며 말하지만 슬슬 화가 나고 있다는 걸 식당 안의 대부분이 눈치 채고 있었다. 미타니를 비롯한 다른 일본인 학생들이 가와타를 말렸다.
「가와타, 그만하자.」
그러나 가와타 역시 보통 성미는 아니었다. 팔을 붙잡는 미타니를 뿌리친 가와타가 환에게 삿대질을 했다.
「망한 나라 왕족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잘난 척이야! 우리 대 일본제국 천황께서 배려해 주셔서 너 같은 놈도 귀족 행세를 하는 거다!」
「가와타!」
그 말에 더 사색이 된 일본인 학생들이 가와타를 만류했으나, 잔뜩 흥분한 가와타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와타는 자신을 둘러싼 일본인 학생들에게까지 고함을 질렀다.
「내 말이 틀렸나? 너희도 모조리 똑같은 놈들이야! 저런 조선놈이 뭐가 두려워 눈치를 본단 말이야! 부끄럽지도 않나?」
가와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환은 눈썹을 좁히며 내뱉었다.
「지금 그 말, 다시 한 번 해 봐.」
「하라면 못할 것 같으냐? 망한 나라 왕족 주제에……!」
다음 순간 환에게 멱살을 잡혀 끌어올려진 가와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콜록거리며 발버둥치는 가와타를 향해 환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라가 망했다고 긍지까지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 번만 더 조선인 학우들을 도둑으로 몰거나 멸시한다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거야. 네 말대로 그 위대하신 너희 천황께서 황송하게도 내게 작위까지 하사하셨으니, 너 같은 놈 하나 죽이는 것쯤으로는 처벌도 받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나?」
환은 가와타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눈치를 보던 일본인 학생들이 시뻘개진 얼굴로 목을 만지며 기침을 하는 가와타를 부축해 사라졌다. 학생들이 빠져나가 조용해진 식당에는 몇 명의 조선인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다. 주먹을 꽉 쥔 광문이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을 보았다. 환은 광문의 어깨를 툭 쳤다.
「평양 공자, 그렇게 억울하냐?」
광문은 잠시 말없이 서 있다가 대답했다.
「……가와타 같은 놈들이 조선인을 멸시할 수 있는 상황이 억울한 거다.」
「그러니 놈들의 콧대를 꺾어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 주란 말이야. 다들 가자. 스키야키 한턱 낼 테니, 든든히 먹고 죽도록 공부하라고. 알았어?」
남은 학생들을 이끌고 스키야키집으로 간 환은 그날 식사비를 모두 내고 밤늦게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에 다시 잠시 들르긴 했으나, 의학부에서 노트 필기를 잘 하기로 이름난 엄정훈이 자기 필기를 빌려 주겠다고 해서 기숙사로 함께 가 가족 행사로 수업을 빠졌던 날의 노트를 받아 온 것이 전부였다. 자정이 넘어서야 숭삼동 사가로 돌아온 환은 정훈의 노트를 베껴 정리하고 잠이 들었다. 누군가 찾아온 건 아침 나절의 일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환은 집사가 당혹한 목소리로 자신을 조심스럽게 깨우는 통에 잠에서 깼다. 이제 막 날이 밝은 참인 데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굳이 환을 깨우는 일이 없었으므로, 환은 부스스한 몰골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종로서에서 순사들이 찾아왔습니다.」
「순사들이? 무슨 일로?」
집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환은 기억을 더듬었으나 순사들이 자신을 찾아올 만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간혹 클래스회를 열었다가 만취하여 거리에서 고성방가를 하는 제대 학생들 때문에 경찰서로 민원이 들어오는 일은 있었으나, 어제의 모임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다들 스키야키집에서 저녁을 먹고 반주 한두 잔을 한 뒤 카페에 갔다가 헤어진 것이 전부여서 순사가 이 아침부터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었다. 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현관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종로서의 마츠다 히사오[松田 央生]입니다.」
「고등계요?」
환은 마츠다를 경계하며 물었다. 반일 분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몰아 잡아넣는 고등계 형사들은 조선인들에게 그리 반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나 환은 자신이 조선 황족 출신으로 작위까지 받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향은 반일 분자에 가까워 총독부가 요주의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포의 대상인 고등계라도 함부로 작위를 가진 왕공족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고, 더구나 환을 잡으러 올 이유도 없었다. 설마 어제 식당에서 벌어진 다툼 때문일까 생각했으나 그 정도 다툼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마츠다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사법 경찰입니다.」
사법 경찰은 일반적으로 법을 어긴 범죄자들을 다루는 경찰이었다. 환은 사법 경찰이라는 말에 더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사법 경찰이 무슨 일로?」
「어젯밤에 어디에 계셨습니까?」
「저녁에 종로 스키야키집에서 급우들과 스키야키를 먹었고, 진고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소. 왜 그런 걸 묻는 거요?」
「경성제대 학생이시라고 하던데, 밤에 학교에 간 일이 있습니까?」
「아니오.」
무심코 대답했던 환은 기억을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학부 급우인 엄정훈의 노트를 빌리러 기숙사 앞에 잠시 들른 일은 있소만.」
「법학과 가와타 유사쿠 군과는 어떤 사이셨습니까?」
계속해서 이어지는 마츠다의 물음에 환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가와타의 이름까지 등장한 이상 더더욱 그랬다. 이건, 취조다. 고작 식당에서 그 정도로 다툰 일을 가지고 사법 경찰이 집까지 찾아와 취조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환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냥 학우요.」
「그렇습니까? 어제 식당에서 가와타 군과 몹시 심하게 다투셨다던데요.」
「왜 취조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유가 뭐요? 무슨 혐의로 내게 찾아온 것이오?」
불쾌한 빛을 숨기지 않는 환의 되물음에 마츠다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이환 공께서는 지금 살인 혐의를 받고 계십니다.」
「사, 살인이라고요?」
환의 뒤에 서 있던 집사가 기절할 듯 놀라며 되물었다. 환 역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살인? 누구를 말이오? 내가?」
「오늘 새벽 경성제대 기숙사 뒤편 언덕에서 가와타 군이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망 시간은 자정 근처로 추정되는데, 어제 이환 공께서 가와타 군과 다투며 살인을 예고했다는 증언을 들었습니다. 또 그 시각에 기숙사 부근에서 이환 공을 보았다는 학생도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기가 차서 내뱉은 환이 헛웃음을 웃자, 마츠다가 뒤에 서 있던 경찰들에게 눈짓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공의 몸에 함부로 손대시면 아니 됩니다!」
집사가 환을 체포하려는 경찰들 앞을 막아섰다. 경찰들이 난처한 얼굴로 마츠다를 보았다. 마츠다 역시 조선 황족을 체포하는 것은 처음인지라, 우선 체포하라고는 했으나 함부로 귀족의 몸에 손을 댔다가는 불똥이 잘못 튈 수도 있어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환은 집사에게 말했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것 같으니 우선 본가에 연락을 해요. 별 일 없을 겁니다.」
사색이 된 집사가 벌벌 떨다가 달려 나갔다. 환은 침착하려 애쓰며 마츠다에게 말했다.
「조사를 받을 것이 있다면 내 발로 갈 테니 체포할 필요 없소.」
환은 형사들을 따라 종로서로 향했다. 환이 종로서로 간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운현궁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일본인 변호사로 집안의 고문을 맡고 있는 나카모리[中森]였다. 급히 들어온 나카모리가 환을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살인 혐의라니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마츠다 씨, 일단 저와 잠시 이야기를 좀 나누시지요.」
의연한 환의 태도에, 나카모리가 마츠다를 불렀다. 마츠다와 함께 잠시 나갔다 돌아온 나카모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환에게 말했다.
「……일단 조사 기간 중에는 구류를 피하실 수 없을 듯합니다. 제가 마츠다에게 이야기를 해서 서에 구류하는 것은 피해 달라고 했습니다. 서에서는 그렇다면 사가는 곤란하다며, 제대 기숙사에 경비를 세우고 그 곳에 계시면 어떻겠냐고…….」
「구류라니, 내가 범죄자입니까? 왜 아무 죄도 없이 예비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합니까?」
환의 목소리가 커지자 나카모리가 당황해서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 일이 커지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모양이니, 하루 이틀 정도만 참아 주십시오. 바로 기숙사로 옮기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죄가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다. 풀려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한 환은 나카모리를 더 곤란하게 해 봐야 얻을 것도 없다고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기숙사로 옮겨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된 채 한나절을 보내게 된 것이었다. 환은 달빛이 스며 들어오는 창 밖을 바라보다 커튼을 쳐 버렸다. 방 안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잠겨들었다. 다시 침대에 누운 환은 어둠으로 물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와타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그건 당연히 말 뿐이었다. 환은 어떤 권력으로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그리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산에서 가와타가 시체로 발견됐다는 말을 듣자 마음 한구석에서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의 힘, 인가. 뒤척이던 환은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