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86
86화 엽사와 구름 (3)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내고, 의형제까지 맺었던 사람이 죽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청삼과 만덕의 마음은 찢어질 것 같은데, 그 와중에 카이루스가 도발까지 시전해버렸다.
“곱게 뒈질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죽일 자신은 있나보지?”
카이루스의 질문에는 대답 대신 화살 다발이 날아왔다.
소리의 벽을 넘어 날아드는 화살에는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맹독이 발라져 있다.
딱 봐도 화살촉의 색깔이 이상했기에, 카이루스도 눈치채고 있었다.
카이루스는 명멸을 휘둘러 화살을 쳐내는 동시에 서서히 앞으로 나아간다.
‘일레나는 이제 뒤로 빠졌으니까.’
카이루스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일어나 그의 몸을 휘감는다.
이제는 그가 제풍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다.
“활쟁이 친구들, 방금 전이랑은 좀 다를 거야.”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는 일레나의 제풍과는 달리 카이루스의 제풍은 완제품이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카이루스가 크게 검을 휘두르자 강렬하게 솟구치는 바람이 벽이 되어 날아드는 화살 수십 발을 막아냈다.
“누가 네 친구냐.”
“그냥 예의상 해준 인사말이야 새끼야.”
카이루스가 세워놓은 바람의 벽은 평범한 화살로는 뚫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까 날렸던 그 괴물 같은 화살이 또 날아오겠지.’
여섯근의 무게를 자랑하는 괴물 같은 화살.
한 번 그 위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기억이 있었던 카이루스로서는 당연히 몸과 마음의 준비를 해둘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뭐야.”
화살이 땅 아래에서 카이루스를 노리고 솟구친다.
카이루스의 코앞에 암녹색 액체에 적셔진 화살촉이 솟구치더니 그대로 천장에 박혔다.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저 맹독화살은 카이루스의 몸에 박혔을 거다.
“배틀기어는 너만 쓰는 줄 아나?”
장팔은 미처 배틀기어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일레나의 일격에 장작처럼 쪼개져 죽어버렸다.
그만큼 갑작스럽고 강력한 일격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카이루스를 상대하고 있는 두 엽사는 배틀기어를 사용할 여유가 있고, 반드시 카이루스를 죽여버리겠다는 살의도 충만하다.
“루카스 선생이 부탁한 일이었지만 말이야.”
“이젠 아니지. 둘째가 죽지 않았더냐.”
청삼의 말에 만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폰투스고 나발이고, 이제 이 두 명의 엽사가 최우선 목표는 뒤로 빠져 회복 중인 일레나다.
“우리도 지금은 꼭 좀 조져놓고 싶은 년이 있거든? 곱게 길을 비켜주면 댁한테는 손 안 댈 테니….”
청삼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옆으로 휙휙 털며 꺼지라는 신호를 카이루스에게 보냈다.
물론 동생의 죽음을 모욕한 카이루스도 곱게 살려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죽은 장팔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일레나의 죽음이 더 중요하다.
“이야, 뭐 좋은 계획이라도 있나?”
카이루스의 질문에 덕삼이 대답했다.
“혀를 뽑고 병신을 만들어서 나병촌에 시집보낼 거야.”
카이루스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내가 본의 아니게, 특별히 너희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거다.”
카이루스의 말에 청삼이 오호, 하는 소리를 냈다.
“길을 내줄 생각인가? 좋은 선택 했어.”
“아니, 필사적으로 막을 생각인데. 그게 너희한테도 좋아.”
시미드 캘로그의 외동딸 혀를 뽑은 다음 나병촌으로 시집보내겠다니.
만에 하나라도 저 계획이 성공하면 이 엽사 형제는 일레나보다 수십 배는 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두 명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움직이는 카이루스는 사실 엽사 형제의 구원자인 셈이다.
“염병. 방해하겠다면 네 녀석의 시체를 밟고 넘어가야 쓰겠어.”
슬프게도 대다수의 구원자가 그렇듯, 카이루스의 진심을 두 명의 엽사는 이해하지 못했다.
“삼연성이라고 했나? 너희들도 참 기구한 팔자다.”
캘로그 가문의 보복으로 죽거나, 아니면 이 자리에서 카이루스에게 죽거나.
이 두 명의 죽음은 확정되었기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빨리 끝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동생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내 마음의 반만큼이라도 좋으니, 부디 고통받아라.”
청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명의 엽사가 카이루스를 향해 수십 발의 화살을 쏟아낸다.
“좆까는 소리 하고 있네.”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는 카이루스의 눈이 섬뜩한 빛을 흘린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약한 새끼가 뒈지고 강한 녀석이 살았다. 그것뿐인 이야기에 슬퍼할 구석은 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똑같아.”
이번에도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강한 녀석이 살아남을 거다.
카이루스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얀 서리가 역병처럼 번져나가며 벽과 바닥과 천장을 하얗게 물들인다.
명멸의 출력을 활용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배틀기어의 사용에 능숙한 사람들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이 다음에 이어지는 현상이다. 카이루스는 슬쩍 일레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제발.’
이번 일의 성패는 어느 정도 일레나에게 달려있다.
“한꺼풀 벗어던져라.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 말을 끝으로 카이루스는 전력을 다해 명멸을 휘둘렀다.
“국지풍 미스트랄.”
영하 70도의 극한을 품고 초속 50m 이상으로 달려나가는 폭풍의 행진이 날뛰며 지하수로를 휩쓴다.
습한 지하에서 전투 중, 땀을 흘리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긴 시간 이어진 교전으로 인해, 두 엽사의 몸은 땀에 푹 절어있다.
그런 두 사람의 몸을 영하 70의 한기가 덮쳤다.
“으아아아아!”
땀에 젖은 옷이 하얗게 얼어붙은 다음 깨지고, 금속으로 된 장비는 닿은 살을 뜯어낸다. 온몸에 서리가 끼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서리가 낀 채 보라색으로 변한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두 명의 엽사는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중이었다.
‘제발.’
정작 미스트랄을 유지하는 카이루스의 신경은 온통 일레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이… 미친 새끼가!”
타냐의 치료를 받은 다음 쉬고 있던 일레나가 다급하게 색유리를 뽑아들며 외쳤다.
질주하는 미스트랄은 극한의 냉기를 품은 바람이다. 그리고,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래서 뒤로 빠지라고 한 거였어?! 개새끼! 씨이발새끼! 돌아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일레나는 50m/s를 자랑하는 극한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
그녀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데, 타냐와 멜빈이 살아남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내가 막아야 해!’
카이루스가 일레나를 뒤로 빼놓은 이유였다. 날뛰는 국지풍을, 일레나는 아직 미숙한 제풍으로 어떻게든 차단해야 한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못 하면 죽으니까. 일레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냄새나는 지하수로가 자신의 묘지가 되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런… 씨… 팔!”
어설픈 제풍으로 카이루스가 만들어낸 미스트랄을 막아내는 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촛불을 꺼뜨리지 않고 버티는 편이 더 쉽다.
“그래도.”
카이루스의 공격이 일레나를 노리고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레나가 막아내고 있는 건 미스트랄의 직격이 아니다.
덕분에 어떻게든 일레나가 서 있는 곳 뒤편으로 한기가 퍼지지는 않고 있다.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에어커튼.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공기의 벽을 만들어 찬바람을 막아내는 중이다.
활짝 열린 개활지라면 에어커튼으로 이 막대한 한풍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곳은 밀폐된 지하였다.
완전히 막아내는 건 불가능해도, 에어커튼을 이용해 냉기의 침범을 어느 정도 차단하는 것은 가능하다.
“으으으.”
신음하는 일레나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다. 일레나가 만들어낸 에어커튼의 풍압보다 미스트랄의 풍압이 더 강하다.
이따금 에어커튼을 뚫는 데 성공한 한기로 인해 기온이 팍팍 깎여나간다.
“….”
일레나의 입에서 뿌득하고 이 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가 막아내고 있는 건 미스트랄의 직격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미스트랄로 인해 발생한 여파일 뿐이다.
“개 씨발라먹을. 내가 찌꺼기도 못 막는다고?!”
카이루스가 만들어낸 제풍의 여파조차 막아내지 못하는 실력.
일레나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이 정도의 실력차를 실감하고서도 ‘더 노력해서 따라잡자!’라고 웃으며 말할 정도로 속 좋은 사람이 아니다.
“요령이 부족하다 그거지.”
이럴 경우의 대처법은 적엽기사단장이 회식 자리에서 말해준 적이 있다.
‘요령이 부족해? 힘과 속도로 때워.’
한 번 휘둘러서 안 되면 두 번 휘두르면 된다. 두 번 휘둘러서 안 되면 세 번 휘두르면 된다.
더 많이, 더 강하게. 요령을 모르고 깨달음이 없다면 그 빈틈은 몸을 고생시켜서 채운다.
“….”
기합을 넣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일레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식한 방법으로 에어커튼을 강화해나가는 중이다.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 머리가 나빠서 몸이 고생하는 중이니 당연한 일이다.
잠깐 사이 검을 쥔 양손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한다. 물집이 터져나간 자리에 다시 무서운 속도로 물집이 잡힌다.
새로 물집이 생길 때마다, 물집 안에 고인 액체의 색은 점점 붉어진다.
일레나는 지금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움직이고 있고,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두르는 과정 속에서 바람은 일레나의 통제에 따르고 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안정적인 상태에 진입한 에어커튼이 한기를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있다.
지금은 그거면 된다. 유지에 성공하는 동안에는 일레나는 물론이고 멜빈과 타냐 또한 얼어죽는 일은 없다.
“하, 덥네.”
일레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시야는 짙게 깔린 안개로 인해 완전히 가려졌다.
“…… 덥다고?”
그제서야 일레나는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지금 그녀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무지막지한 양의 안개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확실한 건, 일레나가 만들어낸 에어커튼은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냈다. 개 같은 새끼… 돌아오기만 해, 봐라.”
배틀기어의 출력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동시에 제풍을 시전했다. 어떻게 해낸 건지는 일레나 자신도 모른다.
일레나는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살필 수 있었다. 양손은 심각하게 아작나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중이다.
칼자루를 잡고 있던 손바닥은 살점이 뜯어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손의 살점이 뜯어져 나가 뼈가 보이는 고통.
그것조차 잊을 정도로 강렬한 황홀경 속에서 성공한 일이다. 다시금 정신을 차린 지금 일레나가 같은 일을 해내는 건 힘들다.
일레나는 탈진하기 직전 상태가 되어 그대로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고생했네.”
그리고, 두 명의 엽사를 통째로 얼려버리는 데 성공한 카이루스가 짙은 안개를 뚫고 나타나 일레나를 부축했다.
“너, 너….”
“제풍 완성 축하한다.”
일레나는 카이루스의 말에 잠깐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풍을 다루는 데 성공했다. 카이루스의 인증을 받았으니 확실하다.
‘이거 참….’
일레나가 해낸 일 덕분에, 카이루스는 아주 기묘한 방식으로 섭운으로 향하는 길을 어렴풋이 찾아 낼 수 있었다.
“바람을 짜올리고 구름을 움켜쥔다. 이를 일컬어 제풍과 섭운이라 한다.”
제풍은 바람을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마찬가지로, 섭운 또한 구름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지하수로 일대를 점령한 너무나도 짙은 안개는, 사실상 구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공기의 충돌. 그리고 지하수로라는 공간이 가진 풍부한 습기까지.’
우연과 노력이 겹쳐, 카이루스는 구름을 만드는 원리는 얼추 눈치채게 되었다.
물론 이게 섭운이 구름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의미 없는 발견이라는 뜻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