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109
109
혈염제검은 그가 기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전혀 엉뚱한, 날벼락 같은 소리를 했다.
“대라쌍검문 출신이라고?”
“……!”
탁좌량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자신이 대라쌍검문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비성검문 제일검밖에 없다. 물론 그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허나 그런 약속을 믿는 바보는 없다.
그가 알고 있으니 주한극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주한극은 적대적인 입장이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한다고 해도 믿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는 자신의 비문(秘門)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혈염제검이 그 말을 꺼낸다.
“어느 놈이 그런 말을……”
파앗! 파파파팟!
혈염제검의 눈가에서 싸늘한 냉기가 일렁거렸다.
혈염제검이 손이 툭 떨어지더니 검에 닿았다. 군장의 손도 허리춤 검 곁에 머물렀다.
두 사람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흘렀다.
혈염제검은 무언의 말을 한다. 까불지 마, 다 알고 있어.
군장도 말한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검을 뽑으려면 뽑아보고. 사양할 생각 없어.
군장의 의지가 이글거리는 눈빛에 섞여나왔다.
자신이 대라쌍검문 출신이라는 점은 극비 중에 극비다.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이 기껏 쌓은 모든 공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다.
검군 군장 자리를 취할 수 없다. 청천맹에 몸을 담을 수도 없다. 아니,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청천맹 무인들에게 추살을 당할 게다.
그럴 수야 있나. 혈염제검의 무공이 얼마나 고강한지 몰라도 여기서 끝장내는 편이 낫지.
‘너무 궁지로 몰지 마!’
쥐새끼도 궁지로 몰리면 고양이에게 덤빈다.
탁좌량은 그런 심정에서 검을 툭툭 건드렸다.
혈염제검이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군장 자리는 내놔야겠어. 하지만 체면은 보존해주지. 내 뜻은 아니고 맹주님 뜻이야.”
맹주님 뜻!
다 끝났다. 맹주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검군 군장 대신에 맹주님이 요긴한데 쓰는 것으로…… 그런 식으로 처리가 될 테니까 경거망동하지 마라. 아! 그리고 다음에 또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면 후후후! 넌 죽는다.”
철컥!
혈염제검이 검을 살짝 뽑았다가 다시 넣었다.
“맹주님께서 부르십니다.”
혈염제검의 방문이 끝나기 무섭게, 맹주의 시종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왔다.
“맹주께서?”
“지금 하시던 일 모두 내려놓고 당장 오시랍니다.”
맹주는 수하들과 인사를 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딱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전격적으로 처리해서 뒤탈을 줄이려는 게다.
검군은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다. 그가 맹주와 적대 입장으로 돌아서는 상황이어도 그의 편에 서서 검을 들어줄 사람이 삼 할은 넘어선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미 끝난 것 같은데. 청천맹에 미련을 둬서는 안 될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검군을 동원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맹주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어디까지 빠져나갈 수 있을까?
자신은 주한극이 아니다. 그처럼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사마소가 굴복했고, 혈랑도객 도주가 숨 죽였다. 이런 마당에 검군을 데리고 무엇을 하겠나.
그는 말했다.
“알았다. 바로 가지.”
시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쯧! 얼굴이 많이 상했군.”
맹주는 친아들을 대하는 듯 포근한 눈빛으로 그를 반겼다.
“검군 군장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래, 그래. 그건 보고 받았어.”
맹주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군 같은 거 수십 개 가지고 있어봤자 뭐해? 남자라면 야망이 커야지. 안 그래?”
“……?”
그는 맹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대라쌍검문의 후인을 어디에 써먹으려는 것인가. 무엇을 하라는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마인들이라는 낙인이 찍혀서 사라져버린 마문의 후인을 어디에 쓰려는가.
“자네를 조금 더 요긴하게 써먹을 생각인데, 따라주겠나?”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교빈이, 교빈이를 수련시켜.”
“네?”
“허허허! 놀라기는. 우리 서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새삼스러운 척 하지 마세. 교빈이가 마공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않나.”
“알고 있었습니다.”
“난 교빈이가 자네와 같이 잔다는 사실도 아네.”
탁좌량의 낯빛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대라쌍검문에, 자신의 첩과 내통한 사내.
죽음이 돌아와야 마땅하다. 헌데, 수교빈을 수련시키라고 한다.
그녀에게 어떤 수련이 필요한지 안다. 마공은 극성까지 연성하고 있지만, 그녀는 실전감각이 매우 부족하다. 무공은 강하지만 십분 사용하지 못한다.
투혼을 일으켜야 한다.
“그 아이와 자네를 실종시킬 참이야.”
“네?”
“청천맹에서 벗어나야지. 마녀가 마공을 수련했는데, 청천맹 이름으로 돌아다닐 수 있나. 자네가 데리고 나가서 잘 다듬어봐. 뒤는 안심하고.”
“수교빈이 수련한 것은 혼천음양마공입니다. 살생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 무공을 더 연성시키면……”
불가분 살인이 일어난다.
무림의 희대의 여살성이 탄생한다.
의지로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 아편에 중독된 사람처럼 살인에 중독이 되어 버린다.
살인보다 염려해야 할 것은 색욕이다.
그녀는 색욕에 물들어서 사내를 취할 것이다. 그리고 교미 후에 수컷을 잡아먹는 사마귀처럼 정사를 나눈 후에는 사내를 죽임으로써 살인의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런 일을 막을 수 없다.
지금 이 상태에서 멈춘다면 강한 무인으로 써먹을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가면 인연을 끊어야 한다. 그때는 도저히 정도와 같이 갈 수 없다.
맹주가 웃었다.
“그래서 자네와 함께 실종시킨다는 거야. 뒤는 잘 보살펴 줄 테니까 안심하고 수련시켜. 그리고 교빈이가 하고 싶은대로 하게 이끌어주고. 내 말 뜻 알겠나?”
수교빈을 마녀로 만들어서 무림에 내놓아라!
“이 일이 끝나면 혈염제검이 맡고 있는 자리를 주지. 아, 그건 믿지 못하나?”
마출성은 서랍을 열고 책자 하나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탁좌량이 날아오는 책자를 받았다.
– 적성날수강기(寂成辣手罡氣)
여섯 글자가 비급 표지에 적혀 있다.
순간, 탁좌량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이, 이, 이건!”
“그것만 수련하면 나에게도 검을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맹주님, 어찌 그런 황망한 말씀을!”
탁좌량은 급히 부인했다.
황망한 말? 무엇이 황망한 말인가. 맹주의 말이 맞다. 이것만 수련하면 세상에 무서운 사람이 없다. 마출성이나 주한극 같은 거성이 될 수 있다.
적성날수강기는 대라쌍검문의 비전절공이다.
대라쌍검문의 핵심 중에 핵심으로 오직 문주만 수련할 수 있는 절공이다.
문주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던 절공.
이것이 자신의 손에 쥐어졌다.
자신이 수련한 모든 절기를 당장 두 배, 세 배로 급신장시켜 줄 수 있는 절기 중에 절기가 손에 들어왔다.
수혼검사가 자신의 절기를 내놓았다면 이토록 들뜨지 않았을 게다. 그런 무공을 어디에 쓰겠는가. 자신의 무공을 버리고 수혼검사의 무공을 다시 배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성날수강기는 자신의 무공이다.
자신이 수련한 무공이 일맥상통하는 무공이며, 잊어버리고 있던 근원이다.
“알겠습니다. 맹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탁좌량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검군이고, 청천맹이고, 정도 무림이고…… 자신의 신분, 위치, 야망…… 모든 것을 버렸다.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시 바삐 적성날수강기를 수련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맹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 길로 맹을 나서도록 해. 암협(巖峽)에 가면 교빈이가 있을 거야. 그녀를 데리고 가.”
5
암협은 청천맹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협곡이다.
협곡, 암협이라고는 하지만 골이 깊지는 않다. 주변이 모두 황량한 바위산이라서 바위 암 자를 붙였고 골짜기라서 협 자를 쓰기는 하지만 사실 협곡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평범한 길이다.
수교빈은 화려한 옷에 진한 화장을 하고 앉아있었다.
“늙은이가 뭐래?”
그녀는 탁좌량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순간, 눈앞에 수천 송이의 백합이 만개한다. 하연 꽃잎에서 진한 향기가 뿜어진다.
‘윽!’
탁좌량은 욕기(慾氣)가 급하게 치솟았다.
참을 수 없는, 지금 당장 터트리고 싶은 갈망!
수교빈의 살내음을 맡는 것만으로도 욕정이 치민다. 그녀를 껴안고 나뒹굴고 싶다. 지금 있는 곳이 길 한 복판이지만 상관치 않는다. 아니, 길에 서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껴안고 싶다.
한 순간, 이성이 마비되면서 욕정이 온 몸을 휘어감는다.
‘더 지독해졌어!’
탁좌량은 급히 진기를 이끌어 일주천시켰다.
진기를 느낀다. 정신을 온 몸에 휘도는 진기에 집중시킨다. 욕념에서 휩쓸린 마음을 가다듬고, 진기의 차분함을 지켜본다.
‘휴우!’
진기가 단전으로 스며들면서, 들끓던 그의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수교빈의 마공이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더불어서 또 한 가지, 이 여자는 자신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몸뚱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자가 웃는다.
자신을 향해서 웃는 게 아니다. 자신이 좋아서 웃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웃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익숙한 몸뚱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음욕을 가득 채워 줄 강력한 양기 덩어리가 굴러오기 때문이다.
탁좌량은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또 다시 욕정이 치밀지 못하도록 단단히 주의를 붙잡고 있을 생각이다.
수교빈이 그에게 집착하는 현상은 매우 위험하다.
자신이 여자를 통제할 수 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도 있고, 조금 더 바란다면 수교빈이라는 여자를 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수교빈의 수위가 자신보다 높아질 때 생긴다.
여기서 수위한 단순히 무공적인 측면에서만 논해도 무방하다. 힘으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을 때, 모든 상황이 일시에 변할 수 있다. 그럴 여지가 충분하다.
수교빈이 자신을 통제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때는 연인이 될 수 없다. 수하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는다. 수교빈의 허락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노예가 될 게다.
수교빈의 영혼을 제압해야 한다.
무공 수위도 자신보다 높아지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잡혀 먹힐 수는 없지.’
“그 늙은이가 뭐라고 했냐니까?”
수교빈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가왔다.
“너랑 멀리 가라고 하더군.”
“호호호! 그럴 줄 알았어. 여기로 가있으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해서 대충 짐작은 했어.”
수교빈이 확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럼 이제 우리 같이 사는 거야?”
“그래.”
“청천맹에서?”
“아니. 나 이제 군장이 아냐.”
“어멋! 군장 자리…… 내놓은 거야?”
수교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탁좌량이 검군 군장 직위까지 내놓은 줄은 생각하지 못한 듯 하다. 하지만 싫은 표정은 아니었다. 무척 감격한 듯 두 손을 가슴에 모았다.
“나랑 같이 있으려고 군장 자리를……”
‘그런 미친놈은 없지.’
탁좌량은 속으로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건 기회니까. 예전에 널 한 번 놓쳤어. 널 놓치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해.”
“정말이구나! 정말로 나와 살기 위해서, 나와 같이 있기 위해서 군장 자리를 내놓은 거야?”
“그래.”
“나…… 울 것 같아.”
“하하하! 울면 우는 거지 울 것 같은 건 뭐야?”
“울고 싶은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안 울래. 울면 감격이 쓸려내려 갈 것 같아. 이 감격 영원히 간직할래. 당신이 싫어질 때마나다 오늘 일을 되새기면서 사랑할래.”
“그래? 하하하!”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 나 오늘 정말 잘해줄게.”
그녀가 팔을 꼈다.
“하악! 학! 하악!”
그녀의 뜨거운 숨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딱딱한 암벽에 등이 배긴다. 날카로운 돌부리가 등을 긁는다. 바위가 부셔져서 쌓인 굵은 모래는 살을 쓸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