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155
155
이러한 장치가 없었다면 홍화문은 진작 요절났을 것이다.
힘없는 여인이 염색(艶色)만 가지고 무림을 희롱하면 당장 사단이 난다. 수많은 사내들이 아귀처럼 달려들 것이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어느 칼에 죽는지도 모르게 죽을 게다.
이것이 과거 하오문 창기들의 운명이었다.
색염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무력이 있어야 한다. 보살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무기(舞妓)들은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다. 사내를 유혹하고, 목적을 달성하고, 그리고 미련 없이 빠져나온다.
뒷일은 기무영이 처리한다.
뒤쫓는 자가 있으면 기무영이 나서서 처리한다. 괴롭히는 문파가 나타나면 그들이 멸절시킨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홍화문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고, 소리 소문 없이 일만 처리한다.
허나 홍화문의 기무영은 다른 문파의 비밀 조직이나 비성검문의 수호자들처럼 집단적인 성격은 띄지 않는다.
홍화문은 하오문의 도기들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세력이 강해지고, 무력이 거세지면 어떤 야욕이 일어나는지도 봤다.
그래서 홍화문은 도기와 같은 성격의 기무영을 두되, 세력화는 시키지 않았다.
기무영은 철저하게 혼자서 움직인다.
홍화문에 기무영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문주밖에 모른다.
기무영은 어떤 일이든 혼자서 해내야 한다. 혼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일지라도 혼자서 한다. 그 수밖에 방법이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기무영 두 명이 연수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 힘들면 맡은 일과 함께 분쇄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어느 한 명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맡은 일과 함께 기꺼이 옥쇄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기무영의 선발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기무영은 강요나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떠밀려서 어둠으로 밀려든 사람들이 아니다.
기무영은 그런 식으로 인원을 선출하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기무영의 삶을 택해야 한다. 철저하게 자원(自願)이다. 자원했다고 다 기무영이 되는 게 아니다. 기무영의 삶을 살 수 있을지 없을 지를 심사한다.
심사라고 해서 거창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그런 게 아니다.
자원자가 나타나면 문주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밤낮동안 고민한다. 자원자의 자질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고독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목적과 함께 옥쇄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문주가 승낙하면 가습(假習)이라는 신분을 갖는다.
암암리에, 아무도 모르게, 어느 날 불쑥 모처로 압송되어서 본격적으로 수련을 받는다.
열 중 다섯, 여섯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죽음의 수련이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기무영이 된다.
기무영이 되면 어떤 영화가 있는가. 아무 영화도 없다. 어둠의 길이라는 게 부귀공명과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힘든 일을 하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기무영은 자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홍화문 문도의 삶을 살다가 마음에, 육체에, 혹은 삶에 지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게 기무영이다. 실연을 당했다거나 하는 비루한 상처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천붕(天崩) 정도의 상처는 당해야 한다.
세상에는 미련이 없다. 어느 때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다.
그런 사람만이 기무영이 되는 것이다.
또한 기무영이라는 신분은 해제가 없다.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기무영이라는 신분을 벗지 못한다. 만약 고의적으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때는 다른 기무영의 표적이 되고 만다.
한 번 기무영은 영원한 기무영이다.
‘기무영’이라는 옷을 걸치면 영원히 밝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기무영 비비.
비비는 기무영이라는 옷을 입었다.
홍화문 소문주의 신분이었지만, 홍화문을 이끌어갈 재목이었지만…… 그런 삶을 포기하고 검을 들었다.
“다른 사내와 살 섞기 싫어. 절대로!”
그녀의 선언은 철없는 소녀의 투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처녀는 아니다. 해과월과 살림을 차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었다. 홍화문에서 배운 모든 기법이 해과월에게 쓰였다.
그런 그녀가 탈기녀 선언을 했다.
단순하게 정조를 지키고자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정도의 기분으로 하는 말 같으면 무시해 버리고 만다.
비비의 선언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이걸 어떻게 할까? 받아들일까, 달랠까.
문주는 관례에 따라서 삼일동안 숙고했다. 자신의 딸이 아니라 똑 같은 홍화문의 문도로써 비비의 가치와 비비의 마음을 살폈다. 그녀가 어둠의 길을 살아갈 수 있을지 판단했다.
그녀는 천분의 아픔을 겪지 않았다.
그녀와 해과월이 겪은 정도의 별리(別離)는 홍화문 여인이라면 누구나 서너 번씩 겪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문주는 그녀의 기무영을 허락했다.
첫째, 비비는 기무영을 삶을 살 수 있다. 강단이 있다. 강하다. 아주 잘 할 것이다. 자신의 딸이라서가 아니라, 소문주라서가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여자다.
둘째, 비비의 삶은 고달프다. 해과월과 인연을 맺은 것이 실수다. 해과월이라는 새우가 마출성과 주한극이라는 고래 사이에 끼어서 등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하필이면 그런 자와 인연을 맺었다.
다른 사람과 맺은 인연이라면 어떻게 수를 써보겠는데, 전임 맹주와 현임 맹주의 싸움판에 정통으로 끼어든 형국이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럴 때는 깊이 숨는 것도 방책이다.
문주는 허락했다. 그리고 비비는 기무영이 되었다.
“혼청음양마공…… 음살문이 드디어……”
나직한 중얼거림이 풀잎으로 스쳐갔다.
그녀는 풀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서 다섯 사내가 한 여인에게 잡아먹히는 꼴을 지켜봤다.
저들은 꼭 사마귀 같다.
교미를 끝낸 암사마귀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숫사마귀를 잡아먹는다. 어떤 때는 한창 교미 중인데도 머리부터 뜯어먹는다.
숫사마귀는 머리가 뜯긴 사애에서도 교미를 한다. 종족을 번식시켜야 한다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다.
저들이 꼭 그렇다.
수교빈이 다섯 사내를 잡아먹고 있다.
비비는 속절없이 잡아먹히는 사내들을 안다.
여자 보기를 돌보듯이 하는 무정한 사내들이다. 여인을 보는 눈길이 너무 차서 피가 얼어붙은 자들이거나 아니면 하물(下物)이 잘린 고자들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그런 자들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인검이 완성 직전이야.”
그녀는 또 다시 중얼거렸다.
음살문이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하오문을 등지고 나와서 무림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순간부터 음살문은 인검을 향해 달려왔다. 그야말로 한 눈 한 번 팔지 않고 오로지 인검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 인검이…… 뜻밖에도 수교빈에 의해서 재현되었다.
‘수교빈이 요마상이었어.’
이것은 새로운 발견이다.
그녀가 요마상이었다면…… 이제야 비로소 예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이 줄줄이 풀린다.
청천맹주가 왜 그토록 수교군을 중히 여겼는지 알겠다. 수교빈을 죽이지 않고 애희로 만든 까닭도 알겠다. 청천맹 내에서 심상치 않게 거론되던 마공의 실체를 봤다.
맹주는 누구인가.
어떻게 사내이면서 음살문과 연관을 맺을 수 있는가.
음살문에는 사내가 없다. 음중사의 수련을 거친 자들이 존재하지만 사내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줄 보호장치에 불과하다.
맹주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런 자들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맹주와 음살문은 어떤 관계인가.
그녀는 세필(細筆)을 꺼내서 자신이 본 것을 적었다. 손톱만한 종이에 쌀톨만한 글씨를 썼다. 그리고 미풍만 불어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종이를 대나무 대롱에 넣었다.
수교빈은 마지막 사내를 떨궈냈다.
음중사의 수련을 거쳤다는 다섯 사내가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그것도 꼴사납게 알몸인 채로 나가떨어졌다.
수교빈이 일어난다.
그녀는 피로를 쫙 풀었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햇볕에 비친 그녀의 피부가 백옥처럼 반짝인다. 백옥 위에 붉은 물감을 들여놓은 것 같은 입술이 달콤한 향기를 뿜어낸다. 맑고 검은 눈이 흑요석처럼 반짝인다.
여인이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인은 섬섬옥수를 들어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옷에 묻은 마른 풀잎도 털어냈다.
그녀가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작열하는 태양을 쳐다본다.
그녀의 모습이 또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하에 다시없는 탕부였는데, 지금은 요조숙녀로 돌아왔다. 티 한 점 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에서 맑은 향기가 솟아난다.
그녀는 죽은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걸어갔다. 남쪽으로.
비비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수교빈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느낌으로 감지한다.
누군가 사람이 남아있다.
기무영은 홍화문 문도들의 뒤를 보살핀다. 그들에게 닥친 화근을 풀어준다.
그렇다면 기무영의 무공이 무척 고강해야 한다.
어떤 때는 일개 문파 전체와 드잡이질을 벌일 때도 있으니, 그런 점까지 감안하면 그야말로 절대무적검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살아남는다.
비비에게 그런 무공이 있나? 없다.
기무영은 도기가 아니다. 음살문의 고수가 아니다.
도기의 세력이 강해졌을 때, 그들은 무림을 석권하고 싶어 했다. 혼천음양마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세상을 치마폭에 휘어 감고 싶어 했다.
절대 무공은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래서 홍화문은 여전히 하오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오문과 전혀 연결된 점이 없어 보이지만, 심층부로 들어가면 맥(脈)이 같이 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기무영을 세력화하지 않는다. 기무영의 무공도 고강하게 높이지 않는다.
세상은 무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기무영이 죽음의 수련을 거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무공 수련이라는 법은 없다.
독을 배우고, 암기술을 배우고, 책략을 습득한다. 무공 이외의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무림을 횡행할 수 있다. 물론 제 한 몸을 보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공부는 필수적으로 수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 기본적인 공부 중에 기감열락술(氣感裂絡術)이 있다.
풀벌레의 울음소리, 잡초의 흔들림, 공기 중에 흐르는 냄새, 땅의 흔들림…… 자연이 만들어 준 다양한 기감을 받아들여서 주변을 읽는 방법이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다. 아니, 무공이다.
자신의 경략을 활짝 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무공이다. 하지만 진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기감열락술을 사용할 때는 전신에 진기를 유포시켜서는 안 된다.
세상이 흐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헌데 진기를 유포시키면 세상이 흘리는 소리보다 내부에서 흐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모든 감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내부에서 흐르는 진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 연유로 진기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정 반대로 진기를 완전히 풀어버리고 죽은 몸이 된다. 사자(死者)의 몸이 되어서 귓가로 스쳐가는 바람소리까지 듣는다.
기감열락술에 한 사람이 잡힌다.
그에게서는 퀴퀴한 쉰내가 풍긴다.
일명 노인 냄새라고도 하는데…… 아주 진한 노인 냄새가 바람결에 묻어난다.
사내, 그것도 노인이 있다.
수교빈을 지켜볼 필요가 있는 사람, 음중사의 수련을 거친 다섯 사내를 알고 있는 사람, 오늘 이 자리에서 벌어질 일을 관찰하고자 하는 사람, 그리고 노인…… 맹주다!
비비는 숨도 쉬지 않았다.
맹주에게 발각되면 불문곡직 척살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필요도 없다. 혼천음양마공을 본 사람이라는 것, 다섯 사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긴장을 하면 안 된다. 그러면 더 쉽게 당한다.
죽음의 수련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이것이다.
강적이 눈앞에 있다. 육신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다.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고, 눈에서는 핏발이 곤두선다. 입은 바짝 마르고, 입술은 타들어간다.
육신이 그런 반응을 보이면 마음은 더욱 다급해진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 어떤 수든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한다.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히는 순간, 기식(氣息)이 흘러나간다. 그리고 강적의 감각을 건드린다. 적이 경계를 하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 종적으로 드러내는 꼴이다.
그러면 평상심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기감열락술을 계속 펼치는 것이다.
사자의 몸이 되어서 듣는다. 본다. 느낀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판단하지 않는다. 적이 강할 것이라거나, 발각되면 죽을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을 하지 않는다.
소리만 듣는다. 느낌만 가진다.
‘후우우우우……’
가늘고 긴 숨이 소리 없이 흘러나갔다.
스읏!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인형이 일어섰다.
그가 누구인지는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그의 몸에서 노인 냄새가 흘러나온다는 것만 인지한다.
그가 떠나간다.
그래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라쌍검문도 이런 식의 술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군장의 아비가 그토록 은밀하게 숨어있을 수 있었던 게다. 하지만…… 그는 결국 부정(父情)을 이기지 못하고 하루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군장의 상태가 위중했기에 목숨 잃을 것을 알면서도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게다. 음중사의 수련을 거친 다섯 사내도 그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