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Treasure Sword RAW novel - Chapter 43
43
“내일 아침까지 다 갈았으면 좋겠는데……”
귀사령 무인이 중얼거렸다.
3
“헉!”
맹주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가슴 상처가 굉장히 심한데, 꿈쩍도 하지 못할 처지인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파아아아앙!
혈황검에서 붉은 기운이 뿜어진다.
“요악한!”
귀사령주가 자신도 모르게 일갈을 내질렀다.
사람에게 한 말이 아니다. 혈황검을 보고, 혈황검의 붉은 빛을 보고 한 말이다.
해과월은 검을 뽑았을 뿐이다. 그런데 피 냄새가 진동한다. 단지 느낌이 아니다. 정말로 피비린내가 물신 풍긴다. 너무 비려서 인상까지 찡그려진다.
사방이 온통 피로 뒤덮여 있다.
“이게…… 혈황검인가.”
맹주가 중얼거렸다.
지이이이잉!
혈황검이 맹주의 음성을 듣고 문풍지 떨리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맹주가 손을 들어 까딱거려다.
이리로. 이리 가져와.
해과월은 혈황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맹주에게 가져갔다.
반검, 반 토막으로 잘라진 검.
혈황검의 사악함이 더욱 짙어졌다. 귀사령 무인들의 검을 갈았을 때처럼 무기(無氣), 기운이 없어진 게 아니다. 혈황검 특유의 사악함이 더욱 빛난다.
“천살검과 싸우면…… 허허! 묻는 내가 바보군.”
맹주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검을 녹이지 않았다고 가장 못마땅해 했지만 지금은 가장 만족스런 웃음을 띤다.
혈황검은 천하제일검이다.
혈황검을 본 사람은 이 검으로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또 실제로도 그렇다. 혈황검의 요기는 단지 요기로 끝나지 않는다. 무궁한 힘으로 폭출된다.
“잘 했다.”
맹주가 반검을 보면서 흡족해했다.
맹주만 흡족한 게 아니다. 모두 다 만족했다. 귀사령주, 지다성뿐만이 아니라 혈황검을 한 번 도 만져볼 일이 없는 귀사령 무인들까지도 좋아했다.
혈황검은 완벽했다.
그런데 맹주가 곧 인상을 찡그리면서 다시 말했다.
“나머지 검은 어찌 했나?”
“그대로 있어요.”
운벽슬이 대신 말했다.
“검으로 만들어.”
“……!”
“그쪽은 검선(劍先) 쪽이니까 검으로 만들기도 쉬울 거야. 자루만 만들어 붙이면 되잖아. 하하! 그 놈도 이놈처럼 잘 갈아봐. 아주 훌륭한 놈으로 말이야.”
“맹주님, 검은 한 자루면 됩니다.”
해과월이 사부에게 말하듯 편히 말했다.
모두들 그렇게 들었다. 무림의 초강자를 대하는 무서움이 없다. 청천맹 맹주를 대하는 예의도 없다. 그저 편하다. 옆집 아저씨에게 농을 건네듯 편하게 말한다.
“뭐라고?”
맹주가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서 되물었다.
“검은 한 자루면 됩니다.”
해과월이 또박또박 말했다.
“검은 한 자루면 된다…… 허허허! 네가 날 가르치는 구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혈황검은 사기제일(邪氣第一)입니다. 사검과 사검이 만나면 검극(劍劇)이 일어납니다. 서로가 질투하고 시기하죠.”
“검이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한다?”
“잘린 검은 동체(同體)가 아닙니다. 이미 두 부분으로 갈렸으니 한족 인연만 취하심이 옳습니다.”
“잘 들었다. 어디 네 말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
맹주는 해과월을 쳐다보지 않았다. 혈황검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주문 외우듯 말했다.
“언제까지 만들 수 있나? 내일까지면 될까?”
귀사령 무인들은 동굴을 나서지 않았다.
“무작정 나가는 것보다 사마소의 계획을 대충이라도 짐작하고 나가는 게 좋겠어요. 언제든 나갈 수 있으니까 출발할 준비를 갖춘 채 쉬세요.”
“세부적인 계획을 준비한 게 아니었나?”
“분산계(分散計)를 쓰려고 했는데 효과적이지 못한 거 같아요. 그 정도는 사마소도 짐작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신중해야겠어요.”
“평소 비망의 행동으로 보면…… 시간이 얼마 없어.”
“알아요. 하루나 이틀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운벽슬이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해과월도 장고 중이다.
검선 쪽 반 토막 검을 놓고, 어찌 해야 할지 망설인다.
장인은 참 많은 물건을 만든다. 쇠로 만들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장인의 손에서 탄생한다.
그럼 다시 묻자. 장인이 무엇을 만든다고?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한다. 정해진 숙명대로 이끌어줄 뿐이지 장인이 임의로 만드는 것은 없다.
해과월은 그렇게 배웠다.
“휴우!”
깊은 한숨만 새어나온다.
사검과 사검이 부딪치면 검극이 일어난다는 말…… 거짓이 아니다. 무엇하러 거짓을 말하겠는가.
혈황검을 또 한 자루 만드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만들어.”
그의 등 뒤에서 조용한 울림이 일어났다.
해과월은 뒤돌아봤다.
“맹주님 앞에서 했던 말, 믿어. 검극이 일어난다는 말도. 검극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한데…… 분명 좋진 않겠지? 좋지 않을 거야. 그러니 말렸겠지.”
“만들면 곤란해지는데……”
“곤란한 정도야?”
“그건 나도 모릅니다. 느낌이 그렇다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분명히 좋지는 않을 겁니다.”
“만들어.”
“좋지 않은 데도……?”
“지금은 맹주님 심기를 살피는 것이 좋아. 맹주님 명을 어기면 아주 안 좋아. 내 말뜻…… 알아들었으리라고 생각해.”
“휴우!”
“한숨 쉴 필요 없어. 만들면 돼.”
운벽슬이 눈을 좁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검이 부러지면 대부분 사검이 된다.
검 자체가 생기를 잃는다. 사기를 띈다.
그런데 혈황검은 다르다. 먼저 다듬어 준 하단부 쪽도 그렇지만 검선 쪽도 생기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 이 쇠…… 살려달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만들 수 없다. 두 검이 서로를 상잔할 게 뻔하기 때문에 만들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만들기 시작했다.
목숨이 아까워서? 그렇다면 혈황검을 녹였으리라.
부러진 혈황검이 살려달라고 생기를 내뿜어서? 그렇다면 검극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으리라.
운벽슬이라는 여인을 믿고 만든다.
그녀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귀사령주를 아는 것만큼 운벽슬도 안다.
그녀는 사마외도가 아니다.
그녀는 어려움을 뚫고 나가는데 희열을 느끼지만 외도를 걷지는 않는다. 어떤 방법인지 모르지만 자신이 우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손잡이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좋은 재료를 쓰지 못할 뿐이지 나무는 얼마든지 있다.
칼을 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단부를 갈았을 때처럼 검의 소리를 들으면서 숨결을 살린다.
***
“이해할 수 없군.”
사마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주에게는 운벽슬이라는 기막힌 여인이 있다. 청천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청천맹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꿰뚫어보는 지자가 있다.
그녀의 머리라면 지금쯤 삼비라고 일컬어지는 곳이 발각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쯤은 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방비가 없다.
극렬한 저항을 예상했는데, 슬슬 뚫린다. 아니, 아예 가로막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이건 비정상이다.
그녀가 쓸 수 있는 무인은 귀사령뿐이다.
귀사령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녀라면 귀사령의 전력을 네다섯 배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고, 진법(陣法)까지 구사하면 스무 명의 귀사령이 이백 명의 힘을 발휘한다.
그녀가 귀사령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면 청천맹 사웅(四雄)의 발길이 상당이 느려진다.
사웅이 고전을 겪는 동안, 맹주는 탈출을 시도한다.
이 부분도 거의 성공이다. 일단 지리(地理)는 그녀에게 있다. 그녀가 무창산을 먼저 선점했고, 요소요소를 파악했다. 이용할 곳과 불리한 곳을 잘 안다.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탈출을 시도하면 뒤따라갈 수 없다.
이 정도는 예상하고 들어온 길인데…… 아무 저항도 없다.
‘뭐지?’
그는 나아가지 못했다. 나아가라는 명을 내리지 못했다.
검군 군장 미면영검 탁좌량이 다가와서 말했다.
“맹주가 여기 있는 거, 확실해?”
“확실해.”
“그럼 뭘 망설여. 치자고.”
“서둘 문제가 아냐. 기다려.”
“운벽슬이 마음에 걸리는 거야?”
“지금쯤 공격이 있어야 해. 진형을 분산시킬 수 있는 공격…… 한 군데 집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공격…… 아무 공격도 없다는 건 비정상이야.”
사마소는 침착했다.
어차피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모든 것을 계산하고 퇴로를 차단했다. 운벽슬이 날고 뛸 것까지 모두 고려했다.
진룡대와 용권풍이 뒤를 막았다. 목을 차단했다.
벽력당 무인들도 동원했다.
수혼검사는 마뜩치 않게 생각했지만 뇌섬력이 없이는 일검견혼을 잡을 수 없다는 말에 화약잡이 몇 명 내주었다.
진룡대, 용권풍, 벽력당…… 그들이 막아선 곳은 맹주도 못 빠져나간다.
‘비정상이야.’
사마소는 미간을 찡그린 채 짙은 그늘이 뒤덮인 산을 노려봤다.
***
쉬익! 쉭! 쉬이익!
맹주의 그림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 열일곱 명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복면 일색이다. 등에는 두 자루의 쌍검을 엇갈려 맸다. 허리에는 요대 대신에 수리검이 가득 꼽힌 암대(暗帶)가 매여져 있다.
‘비성검문(飛星劍門)의 수호자……’
운벽슬은 그들을 단번에 알아봤다.
비성검문은 무림 삼대(三大) 검문(劍門) 중에 일문이다.
문파의 연혁은 신비에 가려져있으며, 문도들 역시 중원 출입을 일절 금하고 있다.
비성검문은 존재 사실만 알려져 있지, 실체는 드러낸 적이 없는 신비문파다.
그럼에도 비성검문이 무림 삼대 검문 중에 일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청천맹의 맹주, 일검견혼이라는 걸출한 검사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맹주의 무공이 비성검문에 근원을 둔다.
극사십절초(極死十絶招)라고 알려진 죽음의 초식들이 비성검문의 절학이다.
그녀는 언젠가 맹주가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비성검문에 절대 수호자가 있다.
그들 열일곱 명이 자신을 보호해주기만 한다면, 저승사자도 자신을 데려갈 수 없을 것이다.
열일곱 명!
삼비를 틀어막은 사람들이 비성검문의 수호자들인가.
맹주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비장의 한수가 비성검문이었나.
맹주는 지독한 사람이다. 자신들이 맹주를 따르겠다고, 돕겠다고 찾아왔는데도, 비성검문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그들 중 두 명이 들것을 가져와 맹주를 실었다.
맹주가 운벽슬을 쏘아보았다.
“왜…… 귀사령을 쓰지 않은 게냐?”
“시간착오를 했습니다.”
운벽슬이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맹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네가 그런 실수를 할 리 없지. 귀사령을 움직인다고 했을 때 움직였으면 시간을 벌 수 있었는데. 말해 보거라. 왜 그런 거냐? 왜 귀사령을 쓰지 않은 게야?”
그때다.
스스스슷! 스스스스……!
귀사령 무인 스무 명이 소리 없이 나타나 운벽슬 뒤에 늘어섰다.
운벽슬이 말했다.
“맹주를 잘못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잘못 찾아왔다?”
“옛날의 맹주는 천하를 오시하는 분이셨으나, 지금의 맹주는 한낱 마인일 뿐입니다. 혈황검의 마기조차 이겨내지 못하고 욕심과 살생을 거듭하는…… 맹주에게서 희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후후! 그렇다고 사실이 달라지지 않아. 너흰 어디로 도망가든 추격당하고, 도륙될 게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후후후! 허허허!”
맹주가 웃었다.
사나운 눈길로 운벽슬과 귀사령주를 쏘아보면서 입가에 잔인한 살소를 머금었다.
맹주가 말했다.
“해과월은?”
“놓고 가세요. 저희가 챙기겠습니다.”
“내 칼은?”
“해과월의 말은 사실이에요. 검극이 벌어집니다. 그러니 반쪽도 놓고 가세요.”
“후후후! 후후후후!”
맹주가 살소를 터트렸다.
“마출성은 날 벴다. 너희는 날 등졌다. 내 검도 가졌지. 이 빚…… 언젠가는 청산하겠지. 가자.”
쉬익! 쉬이이익!
맹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일곱 명의 비성검문 수호자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휴우!”
운벽슬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맹주로부터 벗어날 길은 딱 지금뿐이다. 사마소가 사웅을 이끌고 온 지금…… 귀사령과 비성검문 수호자들이 맞붙어서 싸울 만한 여유가 없는 지금.
양쪽이 맞붙으면…… 비성검문 쪽에 승산이 있다.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비성검문은 귀사령을 파악하고 있는데, 귀사령은 그들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