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sand years old Heavenly Demon RAW novel - Chapter 373
373화
사무현이 의식을 되찾고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몸이 회복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디고 지루했다.
굳이 단월혁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고 혈도가 파혈된 탓에 운기행공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그저 간간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거나 문 앞까지 오가는 정도가 사무현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현은 깨어난 첫날 이후로 누구와의 만남도 갖지 않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누군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사실 사무현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종종 문 밖을 서성인다는 것은 알 만한 이들 사이에서는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저 사무현이 무언가 정리하거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 여기며, 그렇게 언뜻 평화로우면서도 지루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끼이익.
어둑한 밤 중, 사무현의 처소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음을 확인한 사무현이, 이내 어둠을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부웅.
스륵.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어두운 허공으로부터 술병 하나가 날아와 사무현의 손바닥에 안착한다.
술병에 적힌 죽엽청이라는 글귀를 흘깃 바라본 사무현이 이내 어둠 속을 향해 못마땅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이 새끼들은 매번 죽엽청이야. 다른 거 없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사무현의 중얼거림에, 잠시 후 저 멀리서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둠 속에서 새로운 술병 하나가 두둥실 다가온다.
거기에 소홍주라는 이름이 적힌 것을 확인한 사무현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대편 손으로 허공에 뜬 술병을 잡는다.
“좋아, 사람이 어떻게 매번 같은 술만 마셔? 적당히 열흘에 한 번 정도는 새로운 것도 가져오고 그래야지.”
양손에 술병 하나씩을 챙겨 든 사무현이 그대로 몸을 돌린다.
“들어가 봐. 괜히 밖에서 설치다가 걸리면 뒈진다.”
우우웅.
사무현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허공에서 기이한 바람 소리가 들려오더니 저 멀리 있는 창고 문이 닫힌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두 병의 술을 챙긴 사무현의 발걸음이 어둠 속을 비척비척 걸어 나갔다.
***
꼴꼴꼴.
“시원하냐?”
사천방의 장원 뒤 언덕배기에 위치한 수십 구의 무덤들.
일전에 음지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천신련도들과, 이번 마교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천방도들의 무덤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중 한 무덤 앞에 남은 소홍주를 모두 뿌린 사무현이, 그대로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걸터앉아 사천방을 내려다본다.
털썩.
“하아…… 이제 나도 좀 마시자.”
한 병 남은 죽엽청의 뚜껑을 연 사무현이 그대로 밤바람을 맞으며 병나발을 불었다.
벌컥벌컥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그가 이윽고 입술을 닦아 내며 술병을 내려놓는다.
“크으…… 좋다!”
탁.
휘이잉.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말려 준다.
사무현 정도의 고수가 고작 이 정도 언덕을 오르고 술을 뿌린 것으로 지칠 리는 만무.
이는 온몸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이겨 내며 몸을 움직인 소소한 대가였다.
“……거기는 좀 지낼 만하냐?”
조금 전 소홍주를 뿌린 무덤을 흘깃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사무현.
무덤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번 마교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천방도 무항(茂沆)이었다.
괴팍한 외모에 어울리는 걸쭉한 입담을 가진 놈이었지만, 나무에 앉아 쉬는 산새들이나 햇빛에 늘어진 산고양이 따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을 줄 알던 녀석이었다.
알게 모르게 정이 많고 식구들을 아끼던 녀석.
그래서였을까?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서 앞서 싸운 녀석은, 결국 마교도의 눈먼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의 무덤을 가만히 응시하던 사무현이, 이윽고 천천히 불 꺼진 사천방의 장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고맙다.”
세상은 말한다.
사무현이라는 사파의 천재가 천마의 목을 베고 중원을 지켰다고.
하지만 틀렸다.
그들을 지킨 것은 사무현이 아니다.
“네가…… 너희가 우리 모두를 지킨 거다.”
누군가를 지킨 것은 죽은 이들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그들로부터 지켜진 이들이다.
죽은 이들로부터 지켜졌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칭송하고 기억해야 할 이는 자신 따위가 아니다.
“……미안하다.”
나 혼자 이곳에 남아서.
너희가 있는 그곳에 내가 없어서.
너희를 지켜야 할 내가 너희를 지키지 못해서.
“나만은 너희를 기억하마.”
세상 모두가 너희를 기억에서 지우더라도.
그렇게 조용히 사천방의 전경을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이는 사무현.
그러던 그의 귓가에 귀에 익은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온다.
“아미타불…… 안주도 없이 그리 술을 마시면 속을 버리기 십상이오, 시주.”
“……신불 스님.”
고개를 돌린 사무현의 눈에, 언제나 그렇듯 술 한 병을 손에 쥔 신불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하하, 주객(酒客)이 다니는 곳에 딱히 이유가 있겠소? 오늘은 그저 평소보다 높은 곳에서 조용히 마시고 싶어 적당한 장소를 찾던 것뿐이라오.”
너털웃음과 함께 대답한 신불이 사무현의 옆으로 다가와 빙긋 미소를 머금어 보인다.
“한데 꼭 원하는 장소에 함께 술을 즐길 수 있는 벗까지 있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내가 발걸음을 잘한 모양이외다.”
“……여기서 술을 드시게요?”
사무현은 이유가 있어 이곳에 온 것이지만 사실상 여기는 사천방의 묘지다.
신불이 술을 마시기에 썩 좋은 장소라고 보기에는…….
“뭐 어떻소이까?”
뽁.
꼴꼴꼴.
술병의 마개를 뽑은 신불이 사무현의 뒤에 위치한 무항의 묘에 흠뻑 술을 뿌린다.
“먼저 간 전우들과 함께 잔을 나누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니오?”
“……스님.”
사천방의 전사자를 전우라 칭한다.
깊은 정이 느껴지는 신불의 말에 사무현이 미소를 머금자, 잠시 후 그의 옆에 철퍼덕 주저앉은 신불이 새로운 술병과 함께 품속에서 웬 천보따리를 꺼내 들었다.
“기왕 마시는 것, 안주도 좀 드시구려.”
“안주까지 챙겨 오셨어요?”
신불이 항상 술병을 파지하고 다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안주까지 들고 다니는 것은 실로 드문 일이다.
사무현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신불이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화 시주가 그러더이다. 환자는 잘 먹어야 빨리 낫는다고 말이오.”
“선자님이…… 어떻게…….”
“한동안 내공을 쓰지 못해 잊고 있는 모양인데, 시주가 아무리 인기척을 감추고 다녀도 장원 내에서 시주가 없어지는 것을 모를 이들이 아니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네요.”
신불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무현.
그의 생각이 짧았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당장 단월혁이나 단아란, 그리고 선자님까지 사무현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확인하고 떠나기 위해 사천방에 머물고 있다.
그런 이들이 그가 며칠 동안 몰래 장원을 빠져나가는 인기척을 놓쳤을 리 만무하다.
그저 그의 심정을 알기에 내버려 두던 것이겠지.
“……끝까지 모르는 척 좀 해주시지 않고.”
“아미타불…… 물론 시간이 약일 수 있지만, 때로는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게 오히려 위로가 될 때가 있는 법이니 말이외다.”
신불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사무현이 입을 다물자, 신불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안주를 향해 손을 뻗는다.
“자, 이럴 게 아니라 뭐라도 하나 드셔 보시오. 육포도 있고 만두도 있고…….”
사무현의 손에 만두 하나를 쥐여 주더니, 육포 하나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하는 신불.
그런 그의 모습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며 사무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육포 같은 걸 막 드셔도 되는 거예요?”
“쩝쩝…… 본승의 이는 아직 튼튼하외다, 시주.”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어차피 본승은 파계승이외다, 시주.”
씹고 있던 육포를 삼킨 신불이 이번에는 만두 하나를 집어 들어 입으로 밀어 넣는다.
“본승이 이립이 되었을 때 첫 살인을 경험했소. 상대는 마교도였지. 당시에는 중원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를 위한 살인이었소이다.”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저 내가 살기 위해, 그리고 죽은 동료들의 복수를 위해 마교도를 죽이고 있었소. 심지어 마교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민간인들의 고혈을 쥐어짠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파를 죽였지. 즉, 정신을 차려보니 본승은 어느새 훌륭한 파계승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외다.”
평소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던 신불의 과거 이야기에 사무현이 멍한 얼굴로 그를 응시한다.
흡사 넋두리 같은 이야기를 하며 새로운 육포 하나를 집어든 신불이 이내 헛헛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잇는다.
“그런 자가 이제와…… 고승 행세를 하며 위선을 떤다면 그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일도 없지 않겠소이까?”
그러고는 한 손에는 술병을 든 채 질겅질겅 육포를 씹는 신불.
언뜻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사무현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파계승은 파계승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울리다고 항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서 사무현이 잘 아는 누군가가 겹쳐진다.
과거에 결코 연연하지 않을 것 같은 호쾌함과 자유분방함을 가졌음에도, 과거의 후회 속에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스윽.
신불의 보따리에 들어 있던 육포 하나를 끄집어 입에 물은 사무현이 이윽고 조용히 신불을 부른다.
“……스님.”
“왜 그러시오?”
“부탁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음? 본승에게 부탁이라 하셨소이까?”
사무현의 말에 두 눈썹을 추켜올리는 신불.
그런 그를 향해 사무현이 무어라 말을 잇는다.
“…….”
휘이이잉.
사무현의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듯 두 눈을 추켜뜨는 신불.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제까지 묶여 있게 할 수는 없지.’
스스로 끊어 내지 못하는 족쇄라면 누군가가 끊어내 줘야한다.
위혜보가 사무현에게 그러했듯이.
‘그 녀석들도 마찬가지겠지.’
사무현에게, 사천방에게 묶여 있는 녀석들.
당장은 식구라는 이름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지만, 여기서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 이름은 머지않아 족쇄로 변할 것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는 대로 두어야 하는 법. 그것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다.’
언젠가 무당의 후기지수였던 허량에게 들었던 이야기.
당시에는 이해하기도 힘든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신불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사천방의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째잭, 짹, 짹.
산새가 지저귀는 사천방의 아침.
여느 때처럼 매일 같은 육체단련을 위해 사천방도들이 사천방의 정문 앞에 모였다.
마교와의 전쟁 이후에도 매일 같이 이어지는 수련이었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 이유인즉, 천마와의 사투 이후 한 달이 넘도록 요양 중이던 사무현이 아침 수련에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었다.
뚜둑 뚜두둑.
“끄으윽……! 아우 죽겠네……!”
몸 곳곳의 관절들의 비명과 함께 사무현의 입에서도 끙끙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흑의 무복 안으로 오늘 새로 감은 새하얀 붕대가 드러난다.
이제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인 것 같은데 격하게 관절을 풀고 있으니, 보는 이들로 하여금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지우게 할 수 없었다.
“저…… 형님.”
결국 보다 못한 막휘가 슬그머니 사무현을 부른다.
“끄으응…… 왜?”
“저…… 아무래도 몸이 덜 회복되신 게 아닌가…….”
“그럼 당연하지!”
조심스럽게 입을 연 막휘의 말을 끊으며 사무현이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무쇠인간이냐? 거의 죽다 살아났는데 한 달 만에 다 회복되게!”
“아…….”
“끄으응…… 그냥 병상에 누워 쉬어야 하는데…… 그래도 그런대로 운기는 할 수 있어 다행이네.”
금강불괴의 육신답게 단월혁이 했던 경고보다는 훨씬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이제는 운기를 통해 쥐꼬리만한 힘이라도 운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까.
잠시 후 대강 몸을 풀어낸 사무현이 이윽고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대충 몸들은 풀었냐?”
“예! 형님!”
“좋아, 그러면…… 막휘, 살암, 적사, 청사.”
“음?”
“너희들은 저쪽으로 빠지고 나머지는 저기 반대편으로 서라.”
“예?”
“지금이요?”
사무현의 말에 호명 받은 넷을 포함한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이렇게 무리를 나누는 건 보통 대련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련은 체력 단련을 끝낸 후에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사무현의 명이니 만큼, 이들은 곧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고 무리를 나누었다.
“좋아, 그럼 슬슬 시작해 보자.”
사무현의 입에서 어떤 지시가 나올지 궁금한 듯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
하지만, 뒤이어 사무현의 입에서 나온 답은 그들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사천방식 송별회(送別會)를.”
천마가 보여
지은이 : 보용도
발행인 : 손병태
발행처 : ㈜알에스미디어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춘의테크노파크 2차 201동 503호
전화 : 032-651-8576
E-mail : [email protected]
ISBN : 979-11-6602-6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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