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Follicle Exhibition RAW novel - Chapter 88
87화 정원, 불의한 자가 되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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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은 단목예가 건넨 서신부터 펼쳐들었다.
– 왕 현제는 보시게.
하진 대장군이 비명횡사하고, 경사의 새 주인이 된 동탁은 경쟁자의 존재를 지우려 들 걸세. 아마 자네에게 이미 동탁이 수차례 사자를 보내 조정에 입조하라 말을 전했을 테지.
현제도 알겠지만 입조하면 그 날로 현제의 목숨은 없네.
이 우형이 현제를 아끼는 바, 현제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네. 삭주의 여포 장군에게 귀부하게. 지금 그의 세력은 미약하나 북대영의 주인인 장양과 서하의 군벌 엄상, 남흉노의 여덟 부 중최소 다섯 부가 그의 휘하에 들어갔네.
게다가 동탁과는 대등한 관계에서 연수를 맺었지.
우형은 그에게 협력하고 있네. 자초도 마찬가지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하네.
일천의 강노수를 여포 장군에게 보내게. 그럼 현제와 현제의 수하들 중 누구도 역적으로 몰리는 자는 없을 걸세.
자세한 얘기는 예아와 하게.
왕광은 서신을 난롯불에 넣어 태워버리고는 단목예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를 일이구나. 어찌 백개 형이 한낱 변방의 무장에게······.”
왕광은 여포의 이름을 몇 번인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평성전투에서 오환병들을 격퇴시키고, 장성을 넘어온 흉노병들을 고림에서 몰살시켜버린 일로 그의 무명이 널리 알려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변방의 일. 이미 집지키는 개가 되어버린 오환이나 이제는 빛바랜 과거의 영화를 놓지 못하는 흉노의 무리를 패퇴시킨 것에 불과하다 여기며 여포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왕광에게 여포는 그저 ‘변방의 무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에 불과했다.
하지만 단목예는 여포의 진가를 알고 있었다.
“왕숙, 여포 장군은 그저 변방의 무장이라 칭할 수는 없는 사람입니다. 모르시겠어요? 채숙과 제 아버지가 그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으시잖아요?”
유림에서 그 이름이 태산보다 높은 채옹, 상계의 거두이자 진상의 후신인 영보상단의 주인 자초가 여포를 보좌하는 것은 다 그만한 계산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여포가 패업을 이룰 영웅임을 알아보고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목예는 왕광이 이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예아야, 머리로는 이해가 되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백개 형이나 네 아비가 나를 도와주었다면 내가 경사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채숙은 왕숙이 대장군부연 자리를 맡았다는 소식을 듣고 왕숙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하셨어요. 주인이 던져 주는 먹이에 길들여지면 늑대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게 된다고······.”
‘대장군부연’은 대장군을 곁에서 돕는 속관으로 관품에 비해 그 권세가 대단한 자리였다. 하지만 대장군의 시중을 드는 일이라 하여 부연 자리에 오르는 것을 치욕스럽게 여기는 자도 있었다.
왕광은 부연 자리를 출세의 지름길로 여겼고, 채옹은 후자로 여긴 것이다.
단목예의 말에 왕광은 이를 꽉 깨물며 볼을 씰룩였다.
“이 왕광 공절이 견자 소리를 듣게 되다니······!”
“왕숙······.”
단목예가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왕광은 손바닥을 펴보이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차피 동탁이 경사의 새 주인이 되어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다. 견성의 방비가 튼튼하다고는 하나 이곳에 언제까지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견성은 그 크기는 크지 않으나 방어력은 ‘동(東) 자기(紫氣)’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대단했다. ‘동 자기’란 동쪽의 자기관이라는 뜻인데 자기관은 함곡관의 별칭이니 동쪽의 함곡관이라는 말이다.
여포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의 세상에서 견성은 한 때 조조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며, 연주 남부의 최고 요충지이기도 했다.
왕광이 이런 곳을 떠나려 한다는 것은 그에게서 이미 패업의 꿈이 물거품처럼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숙, 채숙은 왕숙의 군대가 이대로 흩어져서는 안된다고 하셨어요.”
“서신에도 그리 쓰여 있더구나. 하지만 군량은 이제 한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적의 무리가 되어 이곳저곳을 약탈하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지.”
“채숙도 아버지도 왕숙이 함께 대업을 도모하기를 바라고 계세요. 군량이 걱정이라면 그것도 해결될 거예요. 왕숙, 제발 채숙의 말씀대로 하세요. 채숙의 말씀이 한번이라도 틀렸던 적이 있었나요?”
단목예가 거듭 청하자 왕광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일천의 강노수를 먼저 보내마. 아무래도 네가 이끌고 갈 수는 없을 듯한데······.”
“오십 리 밖에서 태사 장군이 기다리고 계세요.”
“자초 형의 객장이라면 믿을 수 있지. 그의 자도 ‘자(子)’자를 쓰느냐?”
왕광의 물음에 단목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깊은 신뢰의 미소였다.
* * *
여포는 초선의 곁에 앉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초선은 여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간에 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초선이 채염과 소옥을 데리고 군리 일을 돕기 시작한 후로 군현의 일은 걱정이 없었다. 그녀들 하나 하나가 몇 사람 몫을 하기 때문에 서황도 예전처럼 매일같이 밤을 셀 필요가 없어졌다.
초선은 죽간을 말아 묶고는 기지개를 켰다.
“끝났느냐?”
여포가 환한 얼굴로 묻자 초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급한 일은 끝났어요.”
“그러면 잠깐 나가자.”
그리 말하고는 초선의 손목을 덥석 움켜쥔다.
“오라버니, 어디 가게요?”
“날도 좋고 해서 적토와 함께 달려보려는데, 너도 같이 가겠느냐?”
여포는 초선을 꼬아 적토를 타고 나들이를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초선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아직 일이 남았는데······.”
“급한 일은 끝났다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잠시 나가 말을 타고 오면 일이 더 잘 될 거다. 가자.”
초선도 여포를 따라 나가고는 싶으나 남아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여포는 장내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반 시진쯤 나갔다 올 테니 너희들도 좀 쉬고 있거라.”
결국 초선과 함께 적토의 등에 오른 여포는 바람을 가르며 치달렸다. 황하를 따라 달리며 강과 주위로 펼쳐진 넓은 농토의 풍경이 이들을 반겼다.
“달리니까 좋지?”
“······.”
초선이 대답을 하지 않자 여포는 적토를 멈췄다. 서서히 걸음을 늦춰 완전히 멈춰 섰을 때 여포는 먼저 내려 초선의 얼굴을 보았다.
파랗게 질린 초선의 얼굴이 보이자 여포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그는 급히 초선을 내려주었는데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초선아, 왜 이러느냐?”
“오······ 오라버니!”
“그래그래, 말해보거라. 어디가 아픈 것이냐?”
여포가 묻자 초선은 간신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너무 빨라요! 속이······ 속이 울렁······. 우읍!”
아무래도 적토의 속도를 즐기는 일은 초선에겐 무리였던 듯했다.
적토가 피땀을 흘리며 달릴 때의 속도는 여포조차도 누가 몸을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을 느끼게 만들 정도였으니 이 같은 속도감을 초선이 어찌 즐길 수 있으랴.
한참동안 가슴팍을 두드리고 난 후에야 초선의 낯빛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오라버니, 걸어갈 테니 먼저 가세요.”
초선은 적토를 타고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던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좀 걷겠느냐?”
“그게 좋겠어요.”
여포는 초선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여포는 행복이라는 글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초선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슬쩍 초선이 한 걸음 앞서 나가도록 한 다음 자신의 품속에 손을 넣었다.
보자기에 싸인 딱딱하고 길쭉한 것의 정체는 바로 한 쌍의 비녀였다. 천자가 하사한 보검의 겉면에 붙은 보석을 떼어다가 비녀를 일곱 빛깔로 장식해 칠채비녀를 만들었다. 여포가 초선에게 줄거라 하여 진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걸작이었다.
여포는 초선에게 선물할 기회를 노렸으나 둘만의 시간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원과의 일전을 앞두고 군략, 군량, 병기 등등 준비할 일이 많다보니 서로가 분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일은 칠채비녀를 초선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여포는 여인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무쌍이었다.
그 어떤 목석같은 여인도 여포 앞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방심을 품었고, 아무리 콧대가 높은 여인이라 해도 여포에게 사랑을 구걸했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초선을 향한 진심어린 연정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여포는 초선의 앞에서는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미숙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칠채비녀를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실행에 옮기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떨릴까?’
천군만마가 눈앞을 가로막아도 두려울 것이 없는 여포였건만 지금의 이 떨림은 쉽사리 억누를 수가 없었다.
‘까짓 거 한번 해보자. 비녀를 주면서 정혼해 달라고 하는 거야. 길일을 택일하고 이것저것 준비하다보면 몇 달은 걸릴 테지만 빨리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해를 넘기게 될······.’
여포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앞서 걷던 초선이 갑자기 훽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
“응? 어찌 그리 보느냐?”
“저한테 할 말 있죠?”
여포는 일순간 의중을 꿰뚫렸다는 느낌을 느껴야만 했다.
‘아직 어려도 여인은 여인이구나.’
여포는 여인의 직감이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다시 품속에 손을 넣어 비녀를 꺼내려 했다.
“초선아.”
여포가 낮게 목소리를 깔고 지그시 눈빛을 보내는데 초선은 엉뚱한 곳에 관심을 두었다.
“오라버니, 저기 누가 와요! 어떡해······.”
초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안타까워하자 여포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는 말 한 마리가 등에 축 늘어진 사람 하나를 싣고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진동이 전해져 말등에 실린 사람의 몸이 출렁였다.
얼굴을 볼 수도 없었고, 옷도 엉망진창이었건만 왠지 여포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의록!”
여포는 한달음에 달려가 말등에 실려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봉두난발의 헝클어진 머리털을 붙잡아 들자 팅팅 붓고 멍이 든 얼굴이 들어났다.
이래서야 알아보기가 어려울 듯했지만 그가 실눈을 떴다.
“의록이냐?”
대답대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여포는 의록을 들쳐 엎고 적토에 타며 초선에게 말했다.
“의록이 많이 다쳐 먼저 가야하니 저 말을 타고 돌아오도록 해라.”
“예, 오라버니. 먼저 가세요.”
진의록의 등장으로 고백의 순간을 망쳐버렸지만 여포는 그를 살리려는 생각 하나로 다시 적토가 피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 * *
여포는 조충의 치료를 받고 잠든 진의록의 곁을 지켰다. 달이 질 때쯤 진의록이 정신을 차렸다.
“장군.”
입안의 상처 때문에 발음이 영 신통치 않았지만 여포가 알아듣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의록, 정신이 좀 드느냐? 이게 몇 개로 보이느냐? 잘 보아라.”
손가락 세 개를 흔들어 보이며 묻는 여포에게 진의록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 제가 성공했습니다.”
“수급만 돌아왔으면 대성공이었을 텐데······.”
“농으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꼼짝 없이 맞아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 정 자사의 속은 잘 긁어주었느냐?”
“열불이 나서 뒷목을 붙잡고 쓰러지길 바랐으나 아직 정정하더이다. 인수는 받아왔는데 병부는 끝까지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정원이 병부를 내주지 않았다는 말에 여포는 혀를 찼다.
“그 노인네, 죽으면 관 속에 병부를 넣어주어야겠다. 하여간 욕심이 너무 많아.”
“정 자사는 장군이 아니라 북대영을 노리고 있습니다.”
진의록은 정원과 만나는 자리에서 그곳에 걸린 지도와 군략회의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에 정원이 장양의 정양영을 노릴 것임을 여포에게 알렸다.
“정 자사는 장양 형님이 없으면 이 여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모양이군. 혹시 곡창은 어디에 두었는지 보았느냐?”
“지도를 보니 ‘소점’에 뭔가를 표시해 둔 듯했습니다.”
“소점이라······.”
‘소점’은 병주성에서 북쪽으로 삼십 리 쯤 떨어진 곳으로 무제 때 북방을 공략하면서 곡창을 세웠던 곳이다.
흉노 공략을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꾸리고 이를 위해 곳곳에 곡창을 세운 것인데 이후로는 쓸 일이 없었다. 곡식을 곡창에 쌓아둘 만큼 병주는 풍요로운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킬 것이 없는 소점에는 둔영을 두어 병주성의 북쪽 방어선 노릇을 시켰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원은 이곳 소점의 곡창을 보급기지로 쓸 생각이었다. 장양과의 전쟁이 빨리 끝난다고 하더라도 삭주의 여포까지 토벌하려면 제법 기간이 소요될 터였다.
천정관이나 호관에 군량을 그대로 둔다면 보급선이 길어질 것이니 병주성 인근의 소점이 보급기지로는 적격이었다.
“정 자사가 정말 한판 거하게 벌려볼 참이로군. 수고했다, 의록. 쉬도록해라.”
여포는 진의록의 팔을 두드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밖으로 여포가 나서자 그의 수하제장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포는 그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운중으로 군영을 옮긴다. 모두 준비해라. 정 자사의 수급을 취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여포의 말에 무장들은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소리 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