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ree Kingdoms Peace Biography RAW novel - Chapter 283
“가맹관 공략의 주장이 유비였고, 참군으로는 아마 법정이 출진했지요.”
방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신왕의 사신으로서 촉왕께 참군 법정의 파직을 요구할 것입니다.”
왕수의 말에 방희의 눈썹이 올라갔다.
“법정……? 유비가 아니라 법정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대체 그것은 어느 나라의 법례인가? 그대도 밝혔다시피 주장은 유비요. 법정은 다만 참군일 뿐. 만일 신왕께서 노리는 것이 유비라면 그를 공박해야 옳소이다.”
왕수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법정은 군부의 우두머리격인 황권의 모사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소.”
“그거면 됐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슨 말씀……”
방희는 혼란스러웠다. 물론 황권 역시 방희에게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뻗어오는 창칼보다 뒤통수를 노리는 화살이 두려운 법. 기실 물 밖에서 아웅다웅하는 황권은 방희에게 그다지 대단한 적수가 아니었다.
그는 독단의 권력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후의 정적을 제거한 신하는 군주의 정적이 되고 만다. 만일 황권을 정권에서 쳐낸다면 그에 필적하는 적수가 등장하든지, 아니면 촉왕 유장이 선제하여 방희를 잘라내고 말 터였다.
그런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황권과 적당히 권력의 덩어리를 나누어 가지는 편이 안전했다. 그런데 왕수가 대뜸 황권의 지낭인 법정을 쳐내겠다고 말하니, 그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방파서께 이로울 것이니.”
왕수는 그렇게 말을 던져놓고 방희의 앞에서 물러났다.
날이 밝고 왕수는 사신의 자격으로 촉왕 유장을 알현했다. 방희, 황권, 유비, 상존, 각 정파의 수뇌들을 비롯한 촉왕부의 조신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왕수를 맞았다.
가맹관 공략 직후 익남도독 장료의 동병과 더불어 예방한 사신인지라 꿀이 아니라 독 같은 말을 쏟아낼 것은 자명했다. 각 정파의 수장들은 그 독 같은 말이 자신을 향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왕수는 유장에게 예를 갖춘 뒤, 정다운 사담 없이 곧장 딱딱한 국사를 논했다.
“전하, 이번 가맹관 공략은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신왕의 즉위식에 성도령 동화를 보내 화호의 뜻을 비치시고는 이내 저버리시니 신왕께서는 참으로 당혹해하셨습니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에 유장은 살짝 얼었다.
“그, 그러하나 가맹관은 본디 우리의 강역이오. 빼앗긴 것을 되찾은 것일 뿐이올시다.”
왕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허면, 이제 화호의 껍데기는 치워버리고 창칼 아래 정을 나누고자 하십니까?”
“허어, 꼭 그리 극단적으로 여길 필요가 있겠소이까? 당분간 우리는 동병하지 않을 작정이오. 허니 가맹관까지를 우리의 강역으로 인정해준다면 우리도 더 신과의 화호를 해치지 않을 것이오.”
왕수는 점잖게 웃었다. 웃음은 다정하지 않고 냉혹했다.
“전하, 신왕께서는 이제 막 등극하셨습니다. 헌데 그 첫발부터 물렁하게 내딛는다면 어찌 천하가 신왕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지금 촉왕께서는 가맹관을 빼앗기고도 아무 보복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법정이 나서서 논박했다.
“그대는 참으로 희한한 말을 하는구려. 우리 촉왕부는 그대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가맹관과 백수관을 잃었소. 게다가 대역죄인인 장송이 신왕부에 귀부하는 것을 방관했소. 마땅히 힘과 힘으로 싸우는 난세가 아니오? 우리는 그것에 순응하였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옹색한 예도를 구하는가?”
왕수는 웃음을 흘렸다.
“그 말씀이야말로 이 몸이 하고 싶은 말이올시다. 힘과 힘으로 붙는 난세가 과연 맞소. 허면, 한번 힘과 힘으로 붙어보겠소?”
공공연한 협박에 촉왕부의 조신들이 아연실색했다. 유장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신왕부는 명실 공히 천하일통의 패업에 가장 근접한 세력이었다. 유비의 담왕부까지 먹어치운 신왕부와 붙는다면 승산은 매우 적었다.
“단순한 말싸움으로 여러 인명을 잡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좋게 논의합시다, 좋게.”
유장이 난색을 표하며 말하자 이에 중뿔난 황권이 격정을 토로했다.
“전하! 아국은 신의 속국이 아닙니다!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부디 고정하십시오! 이미 아국은 신과 싸워 승리한 전례가 있습니다!”
“어허, 경은 자중하라.”
“전하!”
황권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사달은 유비의 가맹관 공략으로 인해 생긴 터였다. 유비는 발언을 자제하고 눈치를 살폈다. 괜한 말실수를 저질렀다가는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왕수는 황권을 흘끗 바라보고 손을 모으며 유장에게 말했다.
“전하, 신왕께서도 전란은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체면치레가 필요할 뿐입니다.”
한결 누그러진 말씨에 유장도 협상의 여지를 느끼고 한결 부드럽게 말했다.
“좋소. 신왕의 마음을 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어찌하면 양국의 화호가 유지될 수 있겠소?”
황권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서려는 것을 유장이 제지했다. 왕수는 허리를 굽혔다.
“이번 가맹관 공략의 책임자를 엄히 벌해주십시오. 허면 신왕께서도 일을 더 묻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자를 벌하라? 피가 잔뜩 끓던 황권은 머리를 식히고 생각했다.
가맹관 공략의 책임자라면 마땅히 주장인 유비다. 신왕 제갈찬이 만일 유비를 벌하라 요구한다면, 황권의 입장이 다소 애매해진다. 그간 신왕 제갈찬에 적대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해온 황권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실익을 따지자면 유비를 벌하는 것이 옳다.
유비는 전쟁을 주도한 인물, 주전파가 주전파를 화호의 명분으로 숙청하라 부르짖는 것은 아무래도 이치에 맞질 않았다. 지금껏 황권이 군부의 지지를 받아온 것은 강력한 영토와 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해왔기 때문이었다.
왕수가 유비의 숙청을 요구하고 황권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양날의 칼이었다. 유비를 베는 동시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상실할 염려가 있었다.
그런데 왕수의 이어지는 말은 황권의 고민을 일거에 불식시켰다.
“가맹관으로 출정할 적에 참군으로 종사했던 법정을 파직시키고 다시는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조해주십시오. 허면, 신왕께서도 촉왕께서 지니신 화호의 의지를 통감하고 양국의 원만한 관계를 도모하실 겁니다.”
왕수의 선언에 황권은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공이 튀어 오르듯 즉각적이고 격앙된 목소리로 반응했다.
“뭣이!”
뜻밖의 유시(流矢)를 맞은 법정의 동공도 흔들렸다. 사전에 귀띔을 들은 방희만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사태를 방관할 뿐이었다.
유비의 늘어진 귓불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왕수가 쏘아올린 혀의 화살은 유비가 아니라 법정에게 날아가 박혔다. 유장은 입술을 우물거리면서 머뭇거렸다.
“외사령은 지금 참군 법정이라고 하였는가?”
유장의 의문을 왕수는 확인해주었다.
“맞습니다.”
황권은 주먹을 콱 틀어쥐고 항변했다.
“동등한 군왕의 위계에서 한쪽이 한쪽의 조신을 벌하라 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거니와 가맹관으로의 동병은 좌장군 유비가 모든 책임을 안고 있었소이다! 어찌 참군을 걸고넘어지는가!”
왕수는 황권의 항변은 마이동풍으로 흘렸다.
“신왕의 뜻입니다. 참군 법정을 파직하고 다시 중용하지 않겠다고 약조만 해주시면 양국 간의 화평이 유지될 겁니다.”
유장은 깊은 신음을 토했다. 예상 밖의 제안이 혼란스러웠다. 그의 든든한 우군인 유비가 아니라 법정을 파면하라는 제안은 그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성도령 동화와 왕루 등 문관들은 유장의 측근이었다. 유장이 쉽게 법정을 내치겠다고 약조하지 못하자, 왕루가 부채질에 나섰다.
“전하, 신 왕루 아룁니다. 법정이 참군으로서 종군한 것이 신이 생각하옵기에도 죄를 물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신왕께서 이렇듯 사신을 보내 허심탄회하게 속을 터놓고, 양국의 화친을 위해 제안을 하니 마냥 뿌리칠 수만은 없습니다. 법정이 다소 억울하기는 할 터이나 그보다 중요한 것이 양국 백성들의 평안이 아닐는지요.”
황권은 눈을 부릅뜨고 왕루를 노려봤다. 동화도 나서서 아뢨다.
“왕루의 말이 지극히 옳습니다. 대국적인 판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에 황권이 더 참지 못하고 나섰다.
“전하! 만일 신왕 제갈찬의 이와 같은 무례를 받아주신다면 향후 더욱 심한 굴종을 요구할 것입니다! 단박에 물리쳐 촉왕부의 위엄을 잃지 마십시오!”
유장은 턱을 괴며 법정을 바라봤다.
“효직(법정의 字), 경의 의견은 어떠한가.”
법정은 차분하게 답했다.
“신의 목을 쳐 촉왕부의 안정이 보장된다면 어찌 알량한 목숨을 아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촉왕부의 분란을 조장하고 촉왕부를 신왕부의 아래에 두려는 제갈찬의 술책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전하께 해독이 되리니, 결코 받아들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법정은 그렇게 말하고 왕수를 바라보며 꾸짖었다.
“도를 잊어도 심하게 잊었소, 그대의 주군은. 어찌 이다지도 망령될 수 있는가!”
왕수는 여유롭게 받아쳤다.
“그대가 말했듯 당대는 힘과 힘이 맞붙는 난세올시다. 정녕 창칼을 원하신다면 신왕께서는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일 것이오.”
황권이 으르렁거렸다.
“두려워할 것 같으냐!”
“선택은 촉왕 전하의 몫입니다.”
왕수는 유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장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잡다한 자들의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동화와 왕루 등 문관들과 방희의 사람들, 즉 왕당은 왕수의 제안에 응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반해 황권을 비롯한 괄괄한 무부들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라며 반발했다. 그 악다구니판에서 사마의는 가만히 유비를 바라봤다.
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한 마디씩 보태는 판에서 그는 침묵했다.
이러면 조금 실망스러운데……
그러던 차에 유비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배에 힘을 땅땅하게 주고, 불을 뿜듯이 일갈했다.
“그만들 하시오!”
사마의의 눈동자에 흥미가 서렸다.
좌중은 모두 유비를 바라봤다. 유비는 한가운데로 몸을 움직여 시선을 끌었다.
“나참, 제갈찬의 말 한 마디에 이렇게 흔들리는 꼴이라니. 촉왕부의 조신들이라 떠들고 다니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황권이 그의 귀를 물어뜯을 듯이 눈빛을 쐈다.
“이게 다 좌장군 그대의 잘못이 아닌가! 부끄럼을 모르는 것은 도리어 그대요!”
유비는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아이구, 그렇습니까? 제 잘못이 무엇입니까? 이 지독한 백치인 유현덕은 제 잘못을 깨닫지 못하겠군요. 과연 제 잘못이 무엇일까요? 촉왕부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강족을 토벌한 일? 가맹관을 쳐서 탈환한 일? 무엇이 잘못입니까? 만약에 그것이 잘못이라면 과연 이 유현덕만의 잘못일까요?”
황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뭐요?”
“촉왕부의 내로라하는 무부들이 강족에게 패하여 꼬리를 말고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가맹관으로의 동병을 결정할 때 어찌 간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은 촉왕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 유현덕이 결행했을 뿐인데, 지금 그대들은 촉왕 전하를 힐난하는 것입니까? 오, 불충한 자들이여.”